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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0 | 연재 [문화비평]
문예진흥기금, 염불과 잿밥의 차이
윤덕향(2004-01-29 16:01:12)


보도에 의하면 문예진흥기금이 조성되어 내년부터 그 기금을 사용하여 문예진흥을 위한 각종 사업과 지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기금의 사용을 앞두고 이런저런 논의들이 있고 열악한 여건 속에서 근근히 살림을 꾸려온 각종 문화예술단체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 같다. 이에 이번 문화저널에서는 그 기금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타당할 것인가에 대하여 몇몇 분의 이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면서 그분들의 의견만을 전달하고 우리의 입장이나 관점을 밝히지 않는 것은 자칫 기회주의적인 행위로 지탄받을 소지도 없지 않다. 또 다른 지역에 비하여 참으로 힘겹게 조성된 기금의 활용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되어 몇 가지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문화나 예술은 그 속성상 하루아침에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러 부문과 여러 경우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일시적인 흥분이나 단기적인 투자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문화나 예술은 거의 없으며 또 그 성과라는 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문화나 예술이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 듯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봄부터, 아니 매운 바람이 부는 겨울부터 피오 땀으로 땅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을 통해서만 풍부한 가을걷이가 가능한 농사와 같다. 그런데 경제원칙에 지든 우리네의 인식으로는 부동산 투기처럼 즉각적이고 손에 쥘 수 있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문화나 예술에는 많은 시간이 투자되어야 하며 농부가 여린 곡식을 비바람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쏟는 것과 같은 애정과 지속적인 관심에 바탕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두 번째로 문화나 예술이라는 것이 한 두 차례의 행사나 흔히 부르짖는 구호에 의하여 공동체 성원들에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국민속경연대회가 해마다 열리고 그 행사를 통하여 잊혀져가던 우리의 전통적인 민속행사가 발굴되고 널리 알려지는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를 통하여 텔레비전에 등장했던 행사들 중에서 지금껏 그 지방에서 전통적인 행사로 맥을 잇는 것이 얼마나 있는가를 생각해볼 시점이 되었다. 아마도 거의 없을 것 같다. 앞집, 옆집, 형, 동생, 아저씨, 조카들이 얼마간 주머니를 털어서 막걸리에 흥겹게 밤을 지새우던 민속놀이들이 이제는 언론매체에 출연하기 위한 연기나 행사로 변질된 것이다. 한 점 흐트러짐이 없이 일사불란하게 치루어 지는 민속놀이는 제멋에 겨운 흥을 억제하기 위하여 몇날 며칠을 연습한 연기 경연대회로 변질되고 더 이상 돈이 생기지 않는 연기는 되풀이 할 수 없다는 의식을 심어주지나 않았는지 따져볼 일이다. 이처럼 행사를 위한 행사로 문화가 발전하고 예술이 진흥된다는 인식이 바탕에 자리한다면 콩심어 놓고 팥나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세 번째로 문화라는 것이 대학이학시험처럼 정답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문화가 참으로 가치 있고 이런 경우에는 이런류의 문화가 최고이므로 그것만을 육성하고 장려한다는 것은 문화, 예술을 죽이는 일이다. 동서양의 문화사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한 시점에서는 이단적인 것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대단한 가치를 평가받는 것이 문화이고 예술이다. 따라서 혹시라도 어떤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획일적인 문화나 예술은 속성상 항상 변하는 것이며 획일적인 문화, 예술은 인간의 사고를 획일화하고 유기체적인 문화와 예술을 죽이는 것이며 그런 곳에서는 자유로운 창조가 싹틀 수 없다. 즉 다양성과 창의력이 문화와 예술의 요체라는 점에서 획일적이고 고답적인 의식에 기초한 정책으로는 문화와 예술의 맥을 살릴 수가 없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기금의 활용과 관련하여 운영이 합리성, 공개성, 객관성을 지니는 것이어야 한다. 보도에 의하면 문예진흥기금의 활용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고 위원회에서 제반 운영을 담당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운영을 담당할 위원회의 구성은 매우 중요하며 위원회의 구성에 적잖은 관심이 주어진다. 원론적으로 위원회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공개적으로 구성되고 위원들 각자가 문화와 예술에 대한 장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건전한 사명감을 갖고 업무에 임한다면 그처럼 바람직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즉 위원회의 구성이 행여나 관주도로 이루어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관과 거리를 두고 있는 집단에서는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이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 공동체가 걸어왔던 짧은 역사에서 본다면 자명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 관과 밀접한 관련을 지녔던 집단은 자신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기득권을 행여 침해당하지 않을까 고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더하여 위원이라는 자리를 개인적 출세의 지표로 생각하거나 이권이 오가는 자리로 생각하는 문화, 예술을 매매하는 사람들의 개입도 우려된다.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위원의 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나 각종 문화, 예술의 분야는 많으며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분야가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 같은 인식은 문화, 예술에 필요한 정당한 자존심이며 그 같은 인식이 결여된다면 맥빠진 것이 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칫 그 같은 인식이 지나쳐 다른 분야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양상으로 표출될 때 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은 대단히 어려워진다.
따라서 문화, 예술 각 분야를 균등하게 발전시키기 위한 폭넓은 계획과 그 계획이 공개되어 합리성, 객관성에 대한 논의와 의견을 수려함으로써 이에 대한 각종 이해집단의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운영이 요구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칫 소외될 수도 있는 집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치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문화 예술의 진흥이라는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어떤 의도, 정치적이건 사회적인 의도가 개입되는 것은 철저히 차단되어야만 한다.
문화 예술 진흥 위원회의 구성이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제반요소들이 포함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또 어차피 그것이 우리 공동체의 문화, 예술에 대한 의식수준이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나약한 생각을 지울 수도 없다. 그러나 참으로 정치적인 의도가 개입된 것이 아니고 위기의 벼랑에 선 우리 문화 예술을 되살리려 한다면 적어도 투철한 역사의식을 지닌 위원회가 구성되기를 바란다. 또 위원회의 운영은 공개적이고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것이기를 바란다. 우리의 주위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행정이 들러리로서 위원회가 구성되고 정상배들과 같은 운영으로 일관된 다면 문화, 예술 진흥은 염불에 불과하고 기금이라는 잿밥을 나누어 갖기 위한 또 하나의 야바위판을 벌리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 문화와 예술은 또 하나의 야바위판을 벌리고 있을 만큼 한가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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