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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0 | 연재 [문화가 정보]
남원 초촌리 유적
곽장근(2004-01-29 16:08:17)


이번에 소개하는 초촌리유적은 지난번에 소개한 익산 입점리 고분군과 함께 전북지방의 백제 연구를 하는데 있어 귀중한 유적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더구나 이 유적은 다른 유적과는 달리 고분이 자리하고 있는 전지역에 대한 반굴 조사를 실시하여 유적의 성격과 그 조성연대가 정확하게 규명되어 있다. 또 이 유적은 전북지방의 백제연구뿐 아니라 백제와 가야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있어 빼 놓을 수 없는 유적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초촌리유적은 남원지방의 토착세력 집단의 문화로 인식되고 있는 원산리, 건지리, 두락리고분군과 인접해 있고, 또 그 주변지역에는 1987년 전북대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의 결과에 의하면 많은 가야계 유적이 동일한 지역 내에 뚜렷한 지리적 구분 없이 밀집 분포된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적의 위치와 ‘고려장’
이 유적은 행정구역상으로 남원군이백면 초촌리에 있는 무동산의 남쪽 사면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시대의 고분군이다. 남원에서 대구로 연결되는 24번 국도를 따라 남원시를 막 벗어나 이백면 면사무소로 접어드는 옛 국도를 따라 1㎞정도 가다보면 남쪽에 보이는 야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 유적의 동쪽에는 지리산 정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험준한 능선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이 능선을 경계로 하여 남원지방은 일명 ‘운봉고원’이라 부르는 동부산간지역과 그 외 지역을 포함하는 서부평야지역 등 크게 두 지역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이 정상에는 섬진강과 남강의 발원지면서 분기점을 이루는 여원재가 자리하고 있다. 또 능선의 곳곳에는 돌로 만든 성이 능선의 곳곳에는 돌로 만든 성이 자리하고 있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가 아막성을 사이에 두고 국경분쟁을 일으킨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남원지방을 두 지역으로 구분짓는 이 능선에서 서쪽으로 완만하게 흘러내려 지류들로 형성된 지역에 초촌리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은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며 형성된 낮고 평평한 지대로 곳곳에 가야계 고분과 백제계 고분이 지리적 구별없이 밀집 분포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유적의 존재가 처음으로 세간에 알려진 시기는 1950년대 초로 올라간다. 당시 남원초등학교 교사였던 조성교씨가 「남원지」를 집필하면서 이 유적을 ‘고려장’으로 소개하면서부터 이다. 「남원지」에는 이 유적지에 대한 설명이 파괴된 돌방무덤에 대한 설명이 파괴돈 돌방무덤에 대한 소개 정도로 그쳤으나 당시로서는 적잖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요즈음 위에서 언급한 ‘고려장’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지칭하는가? 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고려장은 도시보다는 농촌지역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말로 대체로 고분과 관련 있는 유적을 지칭하는 것으로 토용 되고 있다. 그런데 고려장이란 용어는 지역에 따라 그 명칭상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느 지역에서는 ‘고리장’, ‘고름장’ 등으로 달리 불리워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고 가리키는 것은 어디서나 한결같이 고분과 관련 있는 유적을 부를 때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고려장과 관련되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또 다른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즉 사람이 죽기 얼마 전에 무덤(고려장)을 만들고 그 안에다 살아 있는 사람과 그 사람이 얼마 동안 먹을 수 있는 음식물을 할게 넣어 주었 다는게 그 내용이다. 또 어느 지방에서는 먹고사는 것이 궁핍하여 일부러 죽음을 앞둔 노인들을 편히 쉬었다 가도록 하기 위하여 고려장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우리들이 앵무새처럼 떠들어댔던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주장은 한낮 날조되고 허구에 불과한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지금까지 우리들이 배워왔던 효(孝)의 개념과도 지극히 상방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장례풍습일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그렇지 않다는게 증명되고 있다. 또 이런 당시의 장례의식이 지금보다는 한층 더 정성스러웠고 엄숙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자료가 발굴조사를 통해 속속 확인되고 있다.
그러면 와전된 이야기에 대한 반론에 앞서 고려장에 대한 보다 더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려장이라는 것은 통상적으로 고분과 관련 있는 유적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보다 더 엄밀하게 설명하면 시신을 안치하고 있는 부분을 돌로 축조된 고분을 지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와 같이 시신을 안치하는 부분을 돌로 만든 고분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장구한 세월에 걸쳐 사용된 묘제로 그 종류도 역시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고려장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고분에 국한시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이 시기에 속하는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는 다른 분야의 유적들보다 월등하게 많이 조사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고분의 장례방법, 축조과정 등 그 모든 성격이 학술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삼국시대(고려장)와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장례의식과는 많은 부분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그 당시에는 무덤 안에 시신과 그 사람이 생전에 사용했던 많은 물건(유물)을 함께 부장 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고분에 서는 금관, 금동제 신발 등 귀중한 유물뿐 아니라 여러 형태의 그릇(토기)과 낫, 도끼, 거울~생활용구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또 일부 부장된 토기내에서는 당시에 넣어 두었던 음식물의 잔해도 확인되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고려장에는 죽음을 앞둔 산(生)사람을 그냥 매장하였다는 것으로 잘못 와전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발굴조사를 통해 고려장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을 안장하였고, 또 많은 유물을 부장한 것은 당시에 유행했던 엄숙한 장례의식의 하나로 판명되었다.
위에서 고려장에 대하여 장황할 정도로 길게 설명한 것은, 우리주변에 고려장이라 불리워 지는 유적들의 보존 실태와 함께 초촌리유적에서 자행된 도굴에 대한 실상을 소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유적중에 특히 고려장과 관련있는 유적에 대한 보존상태는 한마디로 엉망이다. 다시 말해서 유적의 본래 원상 파악이 불가능한 정도로 마구잡이로 파헤쳐지고 도굴된 상태이다. 이처럼 고려장이라 불리우는 유적이 도굴의 주된 대상으로 전락한 근본적인 이유는 고분안에 유물(골동품)이 다량으로 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여러 가지 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분(고려장)중에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유적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이다. 더군다나 도굴은 유적의 일부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지역에 걸쳐 자행되어 그 피해를 입지 않은 고분(처녀분)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이런 예의 대표적인 유적이 바로 이번에 소개하는 초촌리유적 이다.
l 유적은 60년대 초반부터 70년대까지 골동품수집의 유행에 편승하여 거의 모든 고분이 도굴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런 처참한 광경을 여러차례 직접 확인한 원광대전영래교수는 긴급조사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곧바로 발굴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발굴조사는 1978년부터 1979년까지 2차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그 조사에서 백제계 돌방무덤 2백11기와 독무덤 1기가 조사되었다 특히 그 발굴은 보기 드물게 고분이 분포하고 있는 유적의 전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실시되었다.
그런데 우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이 유적에서 조사된 2백여기이상 되는 고분중에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처녀분이 단 1기뿐이라는 사실이다. 나머지 고분들은 골동품에 눈이 먼 도굴범들이 아주 처참하리 만큼 무참히 파괴하여 유물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고분의 형태조차 파악할 수 없는 것이 많았었다고 하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이런 현상은 이 유적에서만 볼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려장이라 불리워지고 있는 거의 모든 유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이다. 이게 바로 고려장 유적들에 대한 보존실상의 전부이다. 지금도 어느유적에서 누군가가 고분을 뒤집는 끔찍한 일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어리석은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에 말이다.

유적의 성격과 빈약한 출토 유물

이 유적에서 조사된 2백여기 이상되는 돌방무덤은 땅을 파고 그 안에 널방(玄室)을 마련한 것으로 널방의 구조와 형태 그리고 널방으로 들어가는 널길(연도)의 위치등 몇가지 차이점을 근거로 4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제 Ⅰ 유형 : 널방은 장방형 형태이며 그 남쪽벽에는 완전히 동쪽에 치우쳐 널길을 시설하였다. 널방을 구성하고 있는 네벽은 바닥에서부터 어느 정도까지는 수직으로 쌓다가 약간은 안으로 좁혀 가면서 천정폭을 줄이고 그 위에 뚜껑돌을 덮어 놓은 형식이다.
제 Ⅱ 유형 : 널방의 형태는 장방형이며 제Ⅰ유형과는 달리 널길을 널방의 서쪽에 치우쳐 시설하였다. 널방의 축조방법은 벽면의 하단에는 판자모양의 돌을 세우고 그 위에 깬돌을 안으로 좁혀서 천정폭을 줄이고 나서 그 위에 뚜껑돌을 올려 놓았다.
제 Ⅲ 유형 : 널방은 폭이 약간 넓은 장방형으로 널방의 남벽 양쪽에 귓기둥을 세워 중앙에다가 널길을 만들었다. 널방의 동서벽은 아래쪽에는 넓은 판자모양 돌을 세우고 그 위에 계산식으로 물리도록하여 안쪽으로 좁혀 가면서 쌓았으며, 북벽과 남벽은 수직이 되게 쌓았다.
제 Ⅳ 유형 : 이 유형은 전형적앞트기식으로 돌방의 폭이 아주 좁은 장방형 형태로 널길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남벽 입구를 막돌로 막았다. 널방의 축조방법은 깬돌로 세벽을 쌓은 다음 그 위에 뚜껑돌을 얹었는데 양장축벽 상단만 안쪽으로 기울게 하고 북벽은 수직으로 쌓았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거의 모든 고분이 완전하게 도굴되어 유적의 규모에 비해 그 수량은 초라하기 그지 없다. 다만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에서 목단지 4점과 접시형토기 2점 등 토기류와 쇠낫, 도끼, 쇠칼 각 1점씩과 뱀머리형 쇠화살촉 3점 등 일부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파괴돈 고분의 수습과정에서 세발토기, 뚜껑접시, 단지 그리고 금동제 귀걸이 각종 철기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을 뿐이다.
이외에도 바로 인접한 척문리에 있는 파괴된 돌방무덤에서 은판을 당초문모양으로 오려서 만든 은제화형입화식이 수집되어 현재 국립전주박문관 1층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이것은「삼국사기」에 백제의 6품관인 내솔(奈率) 이상의 관등을 가진 사람만이 꽂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초촌리 유적의 연대와 성격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귀중한 유물중의 하나이다.

이상으로 초촌리 백제 고분군의 발견 경위부터 출토유물까지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유적은 수차에 걸쳐 진행된 완벽한 도굴로 출토유물이 빈약한 상태이다. 그리하여 이 유적에 대한 연대와 성격파악은 고분의 구조를 중심으로 파악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먼저 초촌리 제Ⅰ유형에 속하는 고분은 공주지방에서 조사된 고분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그 시기는 대체로 6세기 전반경에 해당된다. 이는 초촌리 유적에서 시기가 가장 올라가는 것으로 6세기초에 이르러 백제가 이 지역에 진출하였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으로 불 수 있다. 그리고 제Ⅲ유형에 속하는 고분은 6세기 후반경에 해당되며, 제Ⅱ유형은 그 중간 당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 유적에서는 백제 후기에 속하는 부여지방에서 조사되고 있는 고분의 형태는 보이지 않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7세기초에 백제 무왕이 아막성을 사이에 두고 신라와 여러차례 국경분쟁을 일으킨 역사적인 기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아막성이 학계에서는 초촌리유적과 인접한 곳에 있는 성(아영면 성리 합민성)으로 비정 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백제와 가야와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차원에서 초촌리유적의 인근에서 확인된 많은 가야계 고분군 유적에 대한 발군조사가 절실히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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