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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0 | 연재 [문화비평]
잊혀져 가는 전통음악의 계승
신용문(2004-01-29 16:09:02)


중국의 인구는 56개 소수민족에 의하여 이루어져 있다. 그 56개 소수민족들은 대체적으로 중국전체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우리민족은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 가장 많이 살고 있으며 북경에도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연변 자치구를 제외하고는 언어조차 잃어 버렸으며 조선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는 문화혁명 때 조선어를 쓰지 못하게 법으로 막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홍콩을 경유하여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 고향을 나오니 북경 조선어학교 고장과 교감선생님께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북경 조선어학교는 중국중앙민족학원(대학)안에 있는데 북경 천안문 사태 이후 외국인에게는 학원출입이 통제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입고 있던 옷도 중국사람들처럼 흰색 계통의 상의 또는 허술한 옷을 입고서 중국인 행세를 하고 들어가야 한다고 이들은 설명했다. 우리 일행은 흰 상의나 허름한 옷을 입고 버스에 탔다.
조선어학교에는 중앙민족학원 음악교수들과 학생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음악을 들려주었고 단소, 가야금, 장구, 꽹가리, 징, 북 등 아기를 기증하였으며, 단소와 타악기를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단소의 맑고 영롱한 소리를 듣고 신비함을 느끼며, 조금이라도 더 배우려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 학교에는 장구와 타악기 몇 점은 있었으나 단소는 없었다. 그러나 가야금을 가르치는 교수는 있었다. 그는 북한에 몇 차례 가서 가야금을 배워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가야금 역시 북한의 13현 가야금이었다. 그 교수는 이제 한국에 유학을 하여 올바른 한국전통음악을 가르치겠다고 말했다.
이 학교의 주된 교육은 조선어이며 부수적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 예절, 풍습 그리고 농악을 중심으로 지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육은 중국의 타민족들로부터 많은 호기심과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앞으로 농악대를 구성하여 중국의 전체를 순회하며 조선인의 긍지를 심을 것이라 하였다.
지금은 그들이 초보자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 민족의 얼을 잊지 않으려고 심혈을 기울여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아낌없는 비수와 천사를 보내고 싶다.
다음에 이 학교를 다시 방문하려 했으나 우리가 방문했던 사실을 학교 당국에서 알고 철저한 출입통제를 하여 방문치 못하고 연변 조선족자치주인 연길시로 갔다. 이곳 연변에서 8일간 체류하는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이곳은 어디를 가나 조선어로 된 간판이 붙여 있으며 언어는 조선어로 통하고 거리거리는 한국 가요가 넘쳐흘러 타국에 와 있다는 느낌을 전혀 갖지 못할 정도였다. 또한 그들에게서 우리는 민족 특유의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었으며 순진함도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다음날 두만강을 찾았다. 두만강을 경계로 이들은 도문 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다리의 색깔은 흰색(중국)과 청색(북한)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중국에서는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고 북한쪽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다리를 통하여 북한을 바라보니 김일성의 대형 초상화가 보이고 산에는 속도전이란 글씨가 보였고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면서 중국에서는 북한을 이상한 나라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나라 땅을 타국에서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현실에 깊은 회의에 빠졌고 찹찹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다음날 백두산(장백산)을 향하여 버스로 6시간을 타고 백두산 입구에 도착했다. 연변에서의 날씨는 화창하였으나 이곳에 오니 장대 같은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백두산 입구에서 여장을 풀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는 계속 오고 있었다 그래도 정상을 향하여 짚차를 타고 올라갔으나 비가 강풍을 동반하여 퍼붓는 바람에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하산하여 백두산 폭포 쪽으로 천지를 가려 했으나 도중에 머리위로 바위 덩어리가 굴러 내려와 백두산 등반을 포기하고 연변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우리의 영산을 끝내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다음날 소년궁(우리나라 유치원 같은 곳)의 초대를 받아 방문하였다. 이곳에서는 음악과 예능교육을 하고 있었다. 유치부 어린이들에게는 연중 교육이 실시되지만, 국민학교 학생들은 방학을 이용하여 수업을 하고 있었다.
수업내용은 가야금, 무용, 피아노, 아코디온, 전자오르간, 미술, 동양자수, 컴퓨터, 모형 비행기 제작등 다양한 과목을 학습하고 있었는데 가야금은 북한의 13현 가야금과 연변에서 개량한 21현의 가야금 까지 있었다.
여섯 살 정도의 유치부 어린이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훈련이 되어 있었으며 연주내용을 암기하여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전공인에 가까울 정도의 실력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연변 예술단과 교환 연주를 하였다. 그들의 아기는 대금, 해금, 양금, 태평소, 옥류금, 전자오르간, 장구, 드럼, 가야금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금은 개량하여 풀륫식으로 만들었으며 청공은 없었고 음역은 우리의 산조대금과 거의 같았다. 단소, 가야금, 옥류금은 북한의 악기였다. 북한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거문고는 없었다.
연주형태는 한국의 국안관현악단 연주형태로 지휘자의 지휘에 의해 연주를 하였고 음악은 거의 북한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북한음악의 북사판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성악 역시 북한과 같은 창법으로 노래하는 것을 볼 수 받았다.
또한 이들의 음악은 예술음악 이라기 보다는 사회주의 국가에 알맞은 음악인 것 같았다. 56개 소수민족중에서 침체되지 않아야 하고 항상 발전을 해야 하다는 의식 아래 악기 개량과 연주곡목에 새로움(선동적?)을 나타내야 한다고 한다. 그 결과 느림 음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빠른 음악과 서양음악과의 혼합된 음악을 볼 수 있었다. 전통적인 음악은 이미 잊혀지고 새로운 창작곡과 민요 정도의 협주곡 형태로 음악들이 대부분 연주되고 있었다.
우리가 앞으로 중국 또는 중국의 우리민족과 음악교루를 한다면 기초적인 부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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