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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0 | 연재 [문화와사람]
한국화가 목정 방의걸
김은정(2004-01-29 16:09:52)


한 미술전문지에서 <오늘의 한국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기획특집으로 다룬 적이 있다. 이 기획에 필자로 참여해 <한국화 논의가 겉도는 이유>를 기고한 미술평론가 유홍준씨의 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중략―또 하나의 이유는 작가 정신의 고갈에서 온 침체현상이다. 다른 분야와 달리 한국화 작가들은 기법에 연연하는 것이 생리처럼 되어있다. 그들은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세심한 신경을 쓰지만 무엇을 그릴 까에 대해서는 거의 무의식 상태였다. 그러니깐 「장인정신」은 있어도 「작가의식」은 없는 셈이었다.’
이 몇 줄의 글 내용이 오늘의 한국화가 안고 있는 문제의 가장 중심적인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이후에도 한국화를 접하게 될 때마다 가장 절실하게 안게된 인식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사실 오늘의 한국화분야에서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참으로 치열하게 고뇌하는 작가를 만나는 것만도 결코 쉽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됐는데 그것은 적잖은 작가들이 지나치게 빨리 자기세계를 설정해 놓고 <전통>이니 <현대>니 하며 형식적인 자기 영역만을 고수하려는 데만 급급하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화가 목정(木丁) 방의걸의 그림을 볼 때 마다 나는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내가까이 있어왔던 것 같은 친근함을 느끼곤 하는데 그것은 그가 다루는 산수풍경이 대부분의 한국화에 등장하고 있는 소재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거나 전통회화의 옛 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란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0년 가까이 그의 그림을 보아 오면서 (이것은 소박한 감상자의 한 시각에 의한것이다.)바로 그 친근감이, 우리가 늘상 보아왔던 전통회화의 면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예외 없이 새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그가 지닌 필력과 먹빛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이즈음의 일이었다.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 했던 날 그를 우연히 전북예술회관의 다방에서 만났다. 그는 의자에 앉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도대체 정신은 없고 기능만 앞세우려하니 큰일이에요.” 예술회관의 윗층 아래층을 둘러보았던 그는 젊은 세대들이 작업을 대할 때마다 예외 없이 이런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늘 불만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았다.
인터뷰를 위해 목정을 다시 찾은 것은 그 날 늦은 오후였다.
제자의 화실 한쪽을 빌어 쓰고 있는 그의 작업실은 언제나 그렇듯이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빼곡이 들어찬 온갖 화구들과 그리다만 화선지와 작업대. 늘 그랬듯이 널려져 있다는 느낌을 주는 그의 작업실벽 한쪽엔 문인화 소품이 걸려 있는데 그 느낌이 하도 정성스러워서 이 그림 하나로도 목정이 추구해온 세계가 말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 인가 제자에게 시필 해 주었던 작품 이예요. 그때 별생각 없이 그렸던 것을 후에 가져와서 낙관을 해달라고 하더라구요. 이 그림을 보면서 나 스스로도 새로운 느낌이 들더군요. 무엇인가 잘 그려보려 했을 때는 아무래도 부질없는 욕심이 더해지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이 경우에는 본능적으로 그런 경우거든요? 사인을 하면서 나는 창작의 과정 자체가 배움과 깨달음의 연속에 다름 아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산수 풍경을 주소재로 다루고 있는 그의 그림의 특징은 수평식 구도와 먹과 담채의 우려냄이 주는 독특한 맛에 있다. 필력과 먹빛을 작업의 한중심에 세워두고 있는 그의 그림을 두고 미술 평론을 하는 이들은 ‘그는 굳이 전통적인 준법을 따르려고 하지 않을 뿐더러 용필의 근본원리에 따라서 자유로히, 그러나 격식에 맞게 그리려는 태도를 취한다. 건봉 침봉 측봉들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자연의 섭리와 용필법이 일치되기까지 꾸준히 붓을 다뤄온 그는 겉치레로 눈요기에 집착하는 작화자들을 질타하며 굳게 화법이 일단을 지키는 것이다.’ 고 평가하기도 한다.
목정의 그림이 보여주는 먹빛의 <곰삭은 맛>은 자신이 표현처럼 성급하게 우렁찬 그림을 얻어내기보다는 전통을 바탕으로 한국화의 현대적 변모를 수용하는 부단한 노력의 과정을 더 소중하게 여겼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목정 스승 청전(靑田) 이상범선생은 늘 상 이렇게 가르쳤다 한다. “먹빛이 맑으면 곱긴 하나 가볍고, 탁하면 강하나 더럽다. 고개미 젓같이 곰삭은 맛 그것이 제일이다.”
목정은 스승의 가르침의 참뜻을 헤아리고 익혀내려는 일념으로 붓을 잡아왔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오는 동안 그는 대부분의 한국화가들이 안고있는 <전통적 기법과 오늘의 정신과 정서>의 접목사이에서 참으로 많은 갈등과 고뇌를 일정한 기간을 두고 홍역처럼 앓아야 했다. 남들보다 본격적인 창작의 길에 늦게 들어선 그는 그만큼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자신감보다는 늘상 의구와 회의와 불투명한 자기작업의 가능성이 안겨주는 시렴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야 했다. 이 기간동안의 치열했던 자기와의 싸움이 자신이 필력과 먹빛을 가져다준 소중한 바탕이 되었음을 목정이 깨달은 것은 그 이후 수년이 지난 최근의 일이다.
목정은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화가가 되리라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어린 시절의 재주가 인연이 되어 미대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도 한참동안 미술교사로 있다가 15년이 지난 후 에서야 화가로서 삶을 꾸리기 시작한 늦깍이 화가 이다. 그럼에도 그가 한국 화가로서 뚜렷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작가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된데는 늦게 시작한 만큼 더욱 치열한 창작의 의지로 이어왔던 노력의 시간들이 바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1938년 고창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크리스챤 집안의 (그의 부친은 목사였다.) 7남매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개척교회를 전전하는 아버지를 따라 국민학교시절부터 이곳저곳 옮겨 다녀야 했고 중고등 학교도 입학은 이곳에서, 졸업은 저곳에서 하는 식으로 그나마도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에 따라 몇 개월은 쉬기도 하면서 마쳐야 했다. 고창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기왕에 대학을 가려면 의대나 국문과에 가기를 바랐던 부모들의 뜻을 거스르며 홍익대 미술과에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미대에 입학한 것은 우연한 기회에서 였어요 고등학교때 클라리넷을 불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음대에 가고 싶었지만 체력에 따라 주지 못할 것 같더군요. 졸업하던해 대학을 알아보려고 서울에 올라갔는데 창경원에서 한 여자가 스케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한테도 그럼그리기 재주가 있었다는 기억해 내게 되었죠. 그 길로 떨어져도 그만이다는 생각을 하면서 홍익대 원서를 샀습니다. ”
다행스럽게도 그는 합격했다. ‘큰재목은 아니었어도 예능에 남다른 기량을 발휘’했던 그는 스스로 자기적성을 찾아낸던 것을 지금도 대견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부터 그의 어려움은 시작됐다 뎃상부터 시작되는 기초를 전혀 익히지 못했던 목정은 같은과의 동료들을 따라가기 위해 밤을 세우며 뎃상을 섭렵해야 했고 어깨너머 습작과정도 남들보다 곱절의 시간을 거쳐내야 했다. 그는 처음에 서양화를 공부했다. 그러나 노무자들이 먹는 빵과 물로 끼니를 떼우던 그 시절에 서양화를 전공하기위해 써야하는 물감 값은 그의 허기진 배를 더욱 허기지게 만들었다. 어느 날인가 문득 그는 재료상의 문제가 예술작업을 좌우한다는 것에 분노와 갈증을 느꼈다. 그 즈음 그의 의식을 새롭게 깨우치며 다가선 것이 먹과 물이었다. 우리 민족이 정서에 맞아떨어지는 묘한친근감을 받으며 그는 망설임없이 한국화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것이 대학 3학년때였다. 같은해 7회 국전에 경험삼아 응모했던 그는 입선으로 용기를 얻기도 했지만 그후 작업이 풀리지 않기 시작하더니 <작가로서의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는 심한 좌절과 무기력에 빠져 더 이상 그림을 그릴수 있는 의욕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졸업을 즈음해 그는 착실한 미술교사가 되어 자기가 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했다. 서울의 아동미술연구소에 잠시 몸을 담기도 했던 그는 이리상고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해, 전주 신흥고에 1년 재직한 동안을 제외 하고는 꼭 15년을 그 학교에서만 미술교사 노릇을 했다. 그는 그동안에 자신이 창작에 전념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제자들에게 풀어냈다. 작가로서 역량이 엿보이는 아이들은 여지없이 그의 눈에 잡혀(?) 미술반에 들어오게 됐고 이때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지금은 이지역 미술계를 이어가는 재목들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화의 유창희, 김문철, 이철량, 공예의 임옥수, 김기천 등 도내 각 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창작활동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는 당시의 미술반 제자만도 10명에 가깝다.
그가 다시 북을 잡은 것은 70년대 말이었다. 홍익대를 졸업한 제자이자 후배인 김문철이 하루는 그에게 그림을 다시 시작해 볼 것을 권유했다. 그때가 25회 국전이 열린 해였는데 제자와 서로 의지하며 붓을 잡았던 그들은 같이 입선을 했다. 그때까지 만해도 거의 유일한 작품발표의 바탕이었던 국전은 미술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관문중의 하나였던 때문에 그는 이후 한 두해 더 국전에 응모, 입선했지만 갈수록 혼탁해지는 공모전 분위기에 염증을 느껴 아예 어느 공모전에도 출품하지 않을 것을 작정하고 오로지 자기 창작의 과정에서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당시 국전이 미술인들에게 창작의욕을 불어넣고 계기를 마련하는 등 미술발전의 바탕이 되었던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예나 지금이나 갖고 있다고 말했다.
몰정은 79년 마침내 본격적인 창작의 삶을 꾸리기 위해 교직생활을 청산한다. 아내와 4남매를 돌보아야 하는 가장으로서 생활이 될 수 없는 작가의 자리에 서는 일은 참으로 큰용기와 결단력이 필요 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하고자 하는 일을 이해하면서도 가장으로서 무모하다는 반대입장을 보였고 그 자신도 수차례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이때 그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목정의 아버지였다. 남편의 무모함을 말리기에는 벅차다는 생각을 했던 아내는 원정을 얻기위해 시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 시아버지는 뜻밖에도 며느리를 호되게 꾸짖었다. “평생을 공부하겠다는데 말리는 것을 보니 내 며느리를 잘못 두었다.”시며 휙 뒤돌아 앉으시는 시아버지의 등뒤를 아내는 눈물바람으로 돌아나와야 했다.
“아내의 반대도 당연했습니다. 일단 집사람을 설득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아내를 데리고 전시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지요. 이후 몇차례 전시회를 둘러보면서 아내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나봐요. 어렵게 장만했던 이리 집을 파아 전주로 옮기고 화실을 냈습니다.”
80년, 그는 다시 붓을 잡은 이후 첫 개인전을 가졌다. 섬세한 모사에서 벗어나 발묵의 밝은 분위기와 공간 구성의 새로움으로 그의 그림은 큰 관심을 모았고 호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또다시 자기작업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는 짐을 꾸려 선운사에 들어앉았다. 자기를 되돌아보는 일로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원했던 목정은 그러나 선운사 칩거의 두달여동안 단 한점의 그림도 그릴 수 없었다. 그의 붓 놀림은 그에게 막연한 한계를 느끼게 했고 4.5월 눈부신 봄날, 선운사 주변의 산들과 들판이 보여주는 신록의 아름다움을 마주하며 그는 더 큰 절망을 느껴야 했다고 말했다. “내가 화가가 되려는 것은 사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는 당장 보따리를 쌌다. 돌아오는 길에서 였다. <샘터>라는 작은 잡지를 들춰보던 그는 박호석 선생의 <석악산운경>과 함께 실린 작품에 대한 단상을 읽고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시건방진 것인가를 깨달았다. “70객의 이 작자도 자기 세계를 찾기 위해 아직도 이렇게 고뇌하는데 여기에 비하면 내 의지는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하는 부끄러움이 들더군요.”
이후부터 그는 섣불리 무엇을 이루어내겠다는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는 것으로 세워두기로 했다.
그의 그림은 더욱 성실해지고 한구석도 그냥 놓치지 않는 꼼꼼한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물상 적인 가시적 조건에만 집착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느끼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장식적인 요소 밖에 되지 않는 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그는 산수를 즐겨 하지만 문인화가 갖고 있는 독특한 맛에 더욱 깊이 심취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이면의 아름다움을 읽어내게 하는 문인화를 그는 그림이 갖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자 이것이 곧 작가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관념산수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평을 굳이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오히려 자신의 그림이 진정한 의미의 관념을 관객들에게 전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가 생각하는 관념이란 단순히 모방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사의(思意)와 상념이 조화된 세계이다. 그래서 목정은 자신이 그려내는 나무의 한가지에서 돋아난 잎새에도 개별적인 생명력을 부여하고자 한다. 그러한 노력을 때로는 단순화된 선만으로, 또는 은은한 먹빛만으로, 또는 여백의 미로 투영돼 그의 독창적 작품세계를 발휘하는 요소가 된다.
81년부터 시간강사로 대학 강단에 서왔던 그는 85년 전남대 미술과에 정착했다. 85년 광주에서 개인전을 가진 이후 6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이 언제부터인가 고여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평을 하는데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자신이 그리다만 풍경화에 눈길을 주고 있던 그가 이렇게 말했다. “정확히 짚어낸 것이지요. 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머무르는 것은 곧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고통의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먹의 색깔을 볼 수 있고 내가 읽은 물상의 표정을 이 공간 속에 그대로 담아 낼 수 있기까지 나는 결코 서두르지 않을 것 이예요.
작업대 위의 화선지엔 그 특유의 차분함으로 이어낸 푸근하고 친근한 먹빛의 은은한 빛깔이 잔잔한 생명력을 담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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