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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0 | 연재 [문화저널]
연길에서 만난 북한자들(2)
하우봉(2004-01-29 16:11:20)


이번엔 만난 북한친구들 중 특히 인상에 남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약간 더 소개를 해야겠다. 자성남과 최영옥은 앞서 이야기하였고, 나와 비교적 깊이있는 대화를 나눈 상대는 리철룡과 김세민이었다.
리철룡은 조선사회과학자협의회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이번 북한측의 부단장이었다. 나이는 나하고 동갑이라고 하나 훨씬 점잖고 처음 볼 때 나보다는 최소한 5년정도 연상으로 보였다. 그는 철학 종교부회의 공동책임자로서 차분하면서도 자신만만한 태도로 토론회를 진행해 나갔다. 그와의 토론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북한의 ‘인민대중’과 남한의 ‘민중’의 차이점에 대한 나의 질문에 노동당의 간부나 고위관료는 물론 김일성수령도 인민대중의 일원이라고 대답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은 현재 무계급 사회에 도달하였느냐고 재차 묻자 북한이 아직 무계 급사회에는 진입하지 못하였고,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농민계급을 노동자계급으로 올리는 것이 과제라고 대답하였다. ‘계급’의 개념에 대한 인식 차가 있어 나는 질문과는 약간 초점이 맞지 않는 답변이기는 했지만 나로서는 평소 궁금하게 생각하였던 문제에 대해 확인하게 되었다. 간단한 문답이었지만 통일의 길이 역시 간단치는 않겠구나 하는 우리를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휴계시간중 그에게 통일을 위한 남북의 공통분모를 찾기 위해서라도 남한의 민중에 대해 보다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줄 것을 부탁하자 그는 그러마고 대답하였다.
김세민씨는 유일하게 참석한 역사학자였던 만큼 남북한사학계의 현황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 연구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번역사업에 15년간 종사하였다 한다. 그는 이 실록국역사업에 참가한 세데중에 가장 젊고 해방후 세대로는 유일한 일물 로서 북한에서는 보배와 같은 존재라고 같이 온 북한학자들이 소개하였다. 발표논문도 대다수 북한 학자들의 논문과 달리 아주 실증적 이었으며 전형적인 사학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김세민씨는 또 자신의 스승인 홍기문 친필의 실록발췌기사를 보여주기도 하였다.(홍기문은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의 아들로서 현재 북한 사하계의 거목중의 한사람이다. 올해 87세인데 올 봄부터 노환으로 자리에 누워 거동이 불편한 상태라 한다.) 그가 요번의 학술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정된 후 인사차스승을 방문하자 홍기문은 자신이 옛날 임꺽정의 난에 관해 실록에서 발췌한 노트를 직접 주었다고 한다. 그 노트를 약간은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는데 우리는 한 원로사학자의 친필원고를 소중하게 보면서 전체를 다 촬영하였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는 임수경이야기를 하면서 상투적인 선전을 하기도 했으나 점차 친해지고 또 마지막날 밤 술한잔을 하고 난 뒤에는 아주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홍난파, 현제명의 노래를 부르며 즉석에서 시를 읊기도 하는 둥 풍류를 과시하였는데 매력이 넘쳐흘렀다. 이번에 만난 북한측 학자 중 가장 인간적이었으며, 그가 왜 홍기문의 사랑을 받았는지 그 이류를 알 것만 같았다.
그는 남한 사학계의 사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한국역사연구회와 같은 이른바 진보적인 학술단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다. 내가 남한에서의 북한원전에 대한 개방과 최근의 연구상황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는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으려 하였다. 나는 남한의 진보적, 학술단체와는 공통분모가 많으므로 보다 진지하게 남한에 대해 연구해 달라고 부탁하자 김세민은 더 이상 말은 하지 않고 내 손을 꽉 잡았다. 서로간에 무언중 진한 감정이 교류되는 것을 느꼈다.
8월 1일 우리일행은 백두산 등정을 위해 아침 9시쯤 출발하였다. 북한측 학자들은 호텔입구에서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일찍부터 나왔으며 아쉬운 작별을 악수를 나누었다. 북한학자들도 이날 오후 북경으로 간다고 하여 우리들은 며칠뒤 북경에서 만나 북한정부가 경영하는 류경식당의 평양냉면맛을 보자고 약속하였으나 그 뒤 만나지 못하였다. 전말 저녁 약속한대로 내년 북경대회에서 만나질지 아니면 남북자유왕래나 통일이 이루어진 뒤에야 만날 수 있을지 당장은 기약할 수 없는 작별을 하였다.

4.

작년 오사카대회에서도 북한측학자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공식 행사외에는 일체 접촉이 없었다. 그들이 묵는 호텔도 알 수 없었고, 주최측의 보호아래 집단적인 행동을 하는 바람에 사적인 교류는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당초 우려했던바와는 달리 이번에 북한학자들을 가까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그들을 만나 우선 느껴지는 것은 작년에 비해 태도가 상당히 유연해졌다는 점이다. 특히 자성남같은 인물은 능수능란하게 우리들의 질문을 받어 넘기고 대화를 주도해 나가기도 하였다.
또 그들은 전반적으로 아주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이 점은 일부 남한학자들의 거만한 태도에 비해 좋게 느껴졌다. 그러나 질문도 거의 하지 않는 등 토론에 소극적 태도로 일관한 점은 유감스러웠다. 내가 참석한 부회의 경우 발표내용 중 현재 북한에서 취하고 있는 입장과 다른 부분이 있어도 그들은 질문을 하지 않았고, 사회자가 질문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웃으면서 사양했다. 단지 북한과 직접 관계 있는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이고 항의성 질문을 할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겸손하기보다는 소극적 이라할까 아니면 수동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았다. 휴게시간에 내가 북한측 입장에서 토론해 줄 것을 권유하자 리철룡씨는 ‘이번에는 할 수 배우러 왔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또 하나의 특징은 남한에 대해 질문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들이 집요할 정도로 북한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하는 것과는 너무 대조적인 태도였다. 말 안해도 다 안다는 것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거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학문적 호기심이 별로 없지 않느냐 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음으로 그들이 나눠준 선전책자 이야기다 우리는 학술서적이나 논문을 주었는데 비해 그들은 평양, 인민학습당, 소년궁전 등을 찍은 책자 등을 열심히 나눠주었다. 나는 고맙게 받으면서도 약간 심술이 나서 평양모습은 우리도 매주 보고있으니까 다음부터는 학술지를 가져와 달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준책 자에 나오는 평양시의 웅장한 건축물과 이날 오후 연길시의 시장에서 본 북한 잉용품의 초라함과는 너무 차이가 나 나로서는 일순 분노의 감정마저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순간 무색하졌고, 나도 아차 하는 느낌이 들면서 당황 스러웠다.
그러나 이번엔 우리가 만났던 인물들 가운데 몇몇은 북한의 문제점과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모색중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공식적인 표현자체는 제한이 있었지만 자체내의 사회모순과 기술이 낙후성에 대한 지적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였다. 그중 어떤 사람은 앞으로 1년내 북한사회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작년 오사카대회가 구성면에서 국제적이고 노숙했다면, 이번 소장학자 대회는 민족적이고 발랄했다고 할 수 있다. 작년의 경우 1,000여명의 참가하였고, 서방측과 소련, 동구, 중국 등지의 학자들이 많아 국제적 성격을 많이 띤 반면, 이번의 경우 남북한과 중국과 일본의동포 등 주로 우리 민족이 주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저런 면에서 이번 학술토론회는 당초의 기대보다 훨씬 진지하고 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남한쪽에서 비교적 진보적인 성격의 학자들이 참가하였고, 북쪽에서도 유연한 태도를 보이는 덕택으로 대화가 순조로웠다. 물론 상호간의 인식차는 있었고 비판도 오갔지만 감정적인 대립이나 언성을 높이는 일은 전혀 없었다. 다른 의견들이 모두 토론의 장에 수렴됨으로써 토론회의 열기는 더 높았고 오히려 진지함이 돋보이게 되었다. 학술적인 성과 외에도 특히 남북한의 소장학자들끼리 인간적인 공감을 나누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는 행사였다고 여겨진다 가능하다면 조선학 국제학술토론회와 같이 격년제로 하여 앞으로도 계속 열였 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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