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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1 | 연재 [저널초점]
지역문화를 일구는 사람들
이종민 편집주간(2004-01-29 16:21:31)


사랑의 변질
옛날 로마의 어느 아름다운 언덕 위에 한 어여쁜 여인이 온갖 시름을 잊은채 누워 잘들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지난 잘못을 뉘우치며 자기에게 닥친 여러 가지 시련을 마다하지 않고 견디어 냅니다. 그러다가 그 마지막 시험을 마무리 할 무렵 또 다른 유혹에 넘어가 일을 끝내지 못하고 잠이 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때 마침 이 곳을 지나던 장난꾸러기, 그러나 지금은 무엇인가 심각한 고민에 쌓여 있는 듯한 사랑의 신이 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피곤한 날개짓을 멈추고 이 여인에게 다가갑니다. 평화롭게 잠들어있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그는 잠시 넋을 잃었습니다. 너무도 반가워 숨을 쉴 수도 없었습니다. 이 여인이 바로 자기가 이제까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바로 자신의 어여쁜 신부 프쉬케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평화로운 아름다움에 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여인의 뺨에 입을 맞춥니다. 그의 그 훈훈한 열기에 여인이 조용히 눈을 뜹니다. 어리둥절함에서 벗어난 여인은 목메이게 그리던 자신의 낭군을 알아보고 너무도 반가웠지만 부끄러움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서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두 손을 부여 안은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그 말없는 눈맞춤속에서 그간의 온갖 오해와 불신과 죄의식이 눈녹듯 풀리어 내립니다. 사랑의 신은 어여쁜 신부의 손을 이끌고 저 놓은 올림포스산 위로 향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최고의 신 앞에 꿇어앉아 자기 신부의 영생(永生)을 빌었습니다. 그들의 지극한 사랑을 확인한 제우스 신은 이 여인에게 영생을 허락하고 인간의 불멸의 영혼을 관장하도록 해줍니다.(푸쉬케의 영어식 발음은 사이크[Psyche],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 모든 단어들은 모두 여기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무리되는 그리이스 로마신화의 사랑의 신 이야기는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사랑의 신 탄생부터가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태초에 광막한 공간, 「입을 쩍 벌린」카오스가 있습니다. 곧 이어「가슴팍이 넓은」대지 가야가 등장하는데 이때 사랑을 관장하는 신 에로스(로마에서는 큐핏이라 불림)가 함께 나타나 '열매를 맺게 하는 결합의 힘'을 가지고 만물을 생성하게 됩니다. 대지의 신 가야는 천공(天空)의 신 우라노스와 더불어 많은 자식을 낳게 되는데 이 우라노스가 자식들을 잡아먹어 버립니다. 이에 분노한 가야는 아들인 크로노스를 부추겨 아버지인 우리노스를 살해하게 되는데 이 때 돌도끼로 찍어낸 우라노스의 생식기가 바다에 떨어져 생긴 흰거품에서 아프로디테 (비너스 : 미의 여신)가 탄생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신 에로스가 이 여신을 어머니로 섬기게 됩니다. 애초에 '만물 생성의 원리'이었던 사랑이 자신보다도 탄생이 늦은 아름다움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에로스는 성애(性(愛),즉 색정적인 사랑이라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 후 큐핏(에로스)은 어머니 비너스를 따라다니며 온갖 짖궂은 장난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파랗게 질려있는 어머니의 급한 부름을 접하게 됩니다. 한 처녀가 비천한 인간인 주제에 감히 미의 여신의 권위를 능멸하고 있으니 이를 처벌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예의 화살통을 지고 이 처녀를 찾아갑니다. 이 처녀를 비참한 사랑에 빠지게 하려고 활을 겨누던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그 '무시무시한 화살촉'으로 자기 스스로를 다쳐 자신이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 이 때 이 처녀가 미의 여신을 능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녀를 미의 여신으로 오인하여 비너스 사당을 찾아가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아름다움을 찬양만 할 뿐 구혼하는 이가 전혀 없어 애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꿈 속 같은 궁전에서 지극한 사랑의 행복에 빠져있던 푸쉬케는 어둠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자기 님의 신원을 확인하고 싶어 안달입니다. 혹 악마는 아닌가 하는 경망스런 생각까지 하면서. 어느 날 남편이 잠들어있는 사이 그녀는 약속을 어기고 불을 밝히게 됩니다. 등불 아래 드러나 남편 큐핏의 늠름한 모습에 넋을 잃고 있는 푸쉬케는 그 황홀경 속에서도 죄책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그러다가 뜨거운 기름이 사랑의 신 어깨 위에 떨어지게 되고 잠에서 깨어난 큐핏은 배신의 분노와 절망감속에 소리를 치며 떠나가 버립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 큐핏(사랑)은 머무를 수가 없다."
믿지 못하여 사랑을 잃게 된 푸쉬케는 자신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떤 시련도 견디어 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만이 자기 삶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길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질시에 찬 비너스 여신의 악의에 찬 시험을 아무런 불평없이 감내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시련이 바로 지하의 왕국(죽음의 세계)에 가서 '아름다워지게 하는 묘약'을 얻어온 약이 바로 '잠'(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잠을 충분히 자야 한답니다!) 인데 푸쉬케도 여인인지라 아름다워지고 싶은 열망을 억제치 못하고 열어보지 말라는 상자를 열게되어 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지하의 왕국이 곧 아름다움을 관장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지하의 왕국을 다스리던 신 풀루토는 바로 재물(財物)을 관장하는 신입니다. 결국 만물을 생성하던 사랑은 아름다움의 하수인이 되고 또 이 아름다움은 다시 재물(돈)의 손아귀에 놓여있는 것입니다.(보리고개를 모르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란 우리 젊은이들이 얼마나 이쁩니까? 또 혼수 때문에 사랑이 깨져버린 일이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나를 세우는 사랑
애초의 참된 사랑은 무엇인가를 주체적으로 창조함으로써 우리를 주인되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최초 에로스의 모습이 그러하고 자신을 세우기 위해 갖은 시련을 주체적으로 견디어 내는 푸쉬케의 자세가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아름다움이나 재물 등과 같은 것에 의해 조건지워지는, 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의해 부림-한용운 선생은 「채근담 강의」에서 '사람으로서 사물의 부림(役)을 받는 것은 사물의 변지( 指)이며 사람이 아니다'라 하시며 경계하셨습니다-을 당하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곧잘 '사랑에 빠졌다'라는 피동의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이 주체적인 의지의 행위가 아니라 무엇에 의해 유도되는 이끌림의 행위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우리가 무슨일이건 주체적으로 할 때는 그 보상을 크게 문제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에 의해 강제되어 그 일을 하게 될 때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없으면 쉬 실망하게 지치게 됩니다. 사랑을 받는 것은 우선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끊임없는 상대방 사랑의 증거가 확인되어야만 지속될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 있어서도 상대방의 사랑에 의해서만 보람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확인하려 한다면 곧 어려움에 부딪치게 됩니다. 번잡한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시켜 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서양사람들처럼 만날 때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하기도 남세스러운 일이지요. 자식을 다 키우고 가정도 이제 안정적인 위치에 이르게 된 중년부인이 삶의 허무를 호소한다는 얘기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국의 한 시인이 노래한, 말장난 같은, '사랑을 위해서만 사랑을 해주세요'하는 말도 무엇에 의해 피동적으로 조건지워지지 않는 주체적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선는 마음에 담아둘 만합니다.
'짝사랑이 가장 순수한 사랑이다'라는 말이나 '첫사랑이 진짜 사랑이다' 하는 말도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말일 것입니다. 정말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는 짝사랑이 과연 가능한가,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있을 만큼 지속적인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정작 더욱 심각한 문제는 실제 이런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심히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야 문제될 게 없겠지만 '당신의 무엇무엇 때문에 당시을 좋아합니다'라는 말을 일단 들어 알게 되면 그 '무엇무엇'이 우리들 마음을 구속합니다. 그 '무엇무엇'이 환상일 때에는 더욱 어색한 굴레로 작용합니다. 그런 흉내를 항상 의식적으로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환상을 깨버리는 것도 서운한 일이며(환상이 깨지는 것을 환멸이라 하는데 내가 환멸의 대상이 되다니!) 상대방에게 너무 잔인한 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일이 이 정도에 이르면 그 짝사랑(이제는 짝사랑이라 할 수도 없겠습니다만)도 구체적인 대응(보상)을 요구하게 됩니다.
해결 방안은 결국 내가 짝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주체로 서는데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부림의 굴레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줄 것입니다.
참사랑은 바로 이러한 자기 해방의 몸부림입니다. 적어도 미의 여신인 탄생하기 이전 에로스의 본 모습은 그랬습니다. 그런 신화의 시대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물론 꿈같은 얘기입니다. 우리를 옥죄는 각종 '마음이 빚어낸 사슬'이 이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들의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합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우리는 우리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의 부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참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허무와 절망과 한도 끝도 없는 갈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사랑하며 이를 주체적으로 일구어 나가야 합니다. 사랑은 바로 스스로 일구어 나가야 합니다. 사랑은 바로 스스로 일구어가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입니다. 살림으로써 스스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말의 '사랑'이라는 말은 '사람'혹은 '살림'이라는 말과 우연스럽게도 울림이 비슷합니다. 영어나 독일어에서도 '사랑하다(love/lieben)'는 '살다(live/leben)'와 그 철자가 비슷합니다. 우연이라 해도 의미심장한 우연입니다. 사랑은 무엇인가를 일굼('살림')으로써 우리 스스로 주인되게 (참된 '사람'이 되게)해주는, 우리들 존재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일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사랑
우리 주변에는 스스로 주인되기 위해 무엇인가를 열심히 일구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되지 못한 사람들이 보면 어딘가 모자라거나 정신나간 사람들입니다. 무엇의 보상을 바라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사랑하는) 일을 열심히 꾸려갑니다. 그것이 자기해방의 몸부림이라고 거창하게 생각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냥 좋아서 합니다. 짝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그러나 그들은 자기 좋아 그런 일을 하면서도 이것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을 위한 사랑'이 병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림'을 위하고 '사람'을 위한 사랑이어야 만 그것이 스스로를 주인되게 해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심각한 경종을 주고 있는 것은 서구 모더니스트들의 삐뚤어진 사랑입니다. 이들은 문화 예술에 대한 사랑이 '욕스러운'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일상까지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위력속에서 이들은 돈이 자신들 예술을 지배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자본의 시장원리가 자신들 예술혼까지를 구속하려 하는데 전율한 것입니다. 이러한 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그들은 어렵고 기이한 문화 예술의 형식실험에 함몰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자본의 위력은 이것마저도 그 희귀성에 힘입어 훌륭한 상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삶에 절망했습니다. 삶 속에서는 어떤 구원의 징후도 발견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삶을 살아가는 일을 '하인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예술의 성'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욕스러운 삶에서 벗어나고자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내세우다가 결국은 삶 자체를 부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자본 세상의 상업주의에 염증을 느끼던 한 시인이 뭇솔리니의 파시즘을 옹호하고 나서는 파행에서 우리 '들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사랑의 파국을 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들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들꽃 같은 우리들 삶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그 세세한 모든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사랑의 대상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거창하게 무뚱그려진 추상적 전체가 아닙니다. 인류 혹은 국민 전체에 대한 사랑은 강조하는 정치꾼들과 다른 저이 여기에 있습니다. 저들이 그 거창한 명분으로 우리들 이웃의 희생을 강요하고 또 이것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거창한 것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우리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들꽃과 같은 아름다움을 키워내기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아름다움이 바로 삶으로부터 우러나오고 또 그 삶을 살찌우게 해주는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꾸는 아름다움은, 그 문화와 예술은 삶의 대체물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의 위용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기가 꺾이지는 않습니다. 이 궁벽한 지역에서 조그만 문화의 꽃을 일구는 것이 그 찬란한 전당에서 거창한 예술행사를 치루는 것에 못지 않게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구체적 삶과 연관되고 이 지역 주민들의 구체적 정서에 근거한 문화 예술이 오히려 더 귀중한 것임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향'이라는 허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소박하게 이것이 나를 세우고 우리를 살리는 일이라 여기어 열심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 삶의 욕스러운 부분들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여기고 있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문화예술은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구실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건은 너무도 열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등에 의한 대리 오락에 만족하여 이들의 작업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안락함을 행복으로 여기고 있는 많은 이들을 비웃기조차 합니다.
저희 「문화저널」은 이들의 작업을 소중히 여깁니다. 스스로도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기도 합니다. 그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 없을까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그것이 그들을 살리는 길이요, 우리들 모두를 주인으로 살리는 일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소중한 작업에 격려와 찬사를 보내며 저희「문화저널」이 우선 파악하고 있는 이들 명세서를 일부 소개해 드립니다. 삶을 아끼며 진지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지역 모든 이들의 관심과 참여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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