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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2 | 연재 [교사일기]
어느 해직교사의 하루
심인영 전 고창상하중 교사(2004-01-29 17:02:58)

오늘 가야할 학교는 오수중․오수고․오수국․지사중․지사국 모두 다섯 학교다. 학교방문 계획을 미리 꼼꼼하게 세우고 진행 해가는 습관이 부족하여 늘 허덕이는 날들이다. 수첩에 적어 놓은 시간표를 뒤적이며 차시간을 계산해 보는 일도 처음 몇 번에 그쳤다. 필요한 만큼 학교에 머물다가 적당히 시간이 맞는 차를 탈 계획이다. 임실에 처음 왔을 때의 팽팽한 긴장과 어색함이 풀리고 웬만큼 선생님들과 익숙해지면서 생긴 여유 때문이다.
학교방문은 해직교사의 일상활동이다. 89년 해직 바로 이후의 학교방문은 모진 바람 속에서도 의연하게 나부끼는 깃발처럼 전교조가 그렇게 살아 있음을 끊임없이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시절 학교방문은 그래서 힘이었다. 동료 교사들은 깊이 감춰진 상처를 아프게 되짚어야 했고 교장․교감 선생님들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당당하게 학교방문을 막았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학교에 침입자처럼 우리는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고 입시름이라도 한 날엔 몹시도 우울했었다. 더구나 애초부터 해직을 결심하고 전교조 결성에 참여한 터가 아니라서 거꾸로 해직이 나를 선택한 지경이 되어버린 상황과 1년밖에 안 되는 짧은 교직기간 때문에 여러 가지로 닥쳐오는 일에 완급을 조절하며 대처하는 여유나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 애를 삭이기가 힘겨워 때로 운동장을 애돌아 나오는 길에 눈물바람을 하기도 했다. 좀 더 솔직히 고백하면 그런 마음의 부담 때문에 핑계거리를 찾아 학교방문을 안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그때와는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89년 9․10․11․12월. ‘조직복원기’라고 이름 붙여진 그 가을과 겨울동안 다시 모인 선생님들과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며 조금씩 일을 꾸려 가는 동안 우리의 투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수 차례의 참교육을 위한 강연과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열악한 근무여건 개선투쟁, 5월의 시국선언투쟁과 88년 여의도 교사집회 이후 처음으로 만 여명의 교사가 참가했던 5. 26교사대회. 그리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공정한 인사관리규정 제정 투쟁으로 이어지는 힘찬 물줄기들이 갈수록 더 흐름을 형성하면서 일렁이고 있다. 물론 상근 교사와 현장교사들의 전교조에 대한 애정과 헌신이 가장 큰 힘이었고 나는 그 물줄기에 실려 90년, 91년을 살았다. 적극적으로 전교조를 선택하며 시작하지 않았지만 비로소 전교조와 나를 일치시기까지 가장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은 고창의 선생님들이었다.
89년 가을 찬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한 낯선 사무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참교육 화장지와 뺏지를 사시며 우리와 함께 하기 시작한 정선생님, 안경 너머로 그 검고 맑은 눈을 자주 껌뻑이시며 정기모임에 소리 없이 참석하기 시작했던 또 다른 정선생님, 어렵고 힘이 들었지만 남편과 저녁상을 함께 하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지역방문을 다녔던 상근 동료 고성생님, 살며시 사무실로 찾아와 병설 유치원의 어려운 유아교육환경을 이야기하며 답답한 가슴을 풀어 놓았다던 문선생님, 그리고 89년의 회오리 속에서 탈퇴각서를 두 번이나 쓰고 현장에 남게 되어 고통스러웠지만 끝내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난 고선생님, 이제 막 교단에 발을 딛고 앳되지만 사려 깊은 얼굴로 찾아 온 박선생님, 이선생님, 최선생님, 아직 전교조가 뭔지 잘 모르지만 학급운영자료와 교과자료가 좋아 나오기 시작했다는 백선생님, 모두들 각자 학교의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는 그 선생님들의 앞뒤에서 눈웃음같은 후원금을 건네주던 수많은 선생님들……. 9월에 전선생님의 출산휴가로 자리가 비게 된 임실지회로 배치를 받고 고창을 떠나오면서 지난 시간들의 부끄러움과 후회 같은 것들 한 켠에 나에게 희망과 믿음을 준 고창 선생님들의 얼굴도 꼭꼭 가슴에 묻으며 왔다.
임실은 고창에 비해 학교수가 적고 선생님들도 대부분 선배층이라서 사뭇 긴장이 되었다. 학교방문 갈 때의 옷차림도 신경이 쓰였고 이미 생활의 틀이 잡혀서 어쩌면 단단한 벽을 쌓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혼자 답답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더 오랜 시간동안 교육의 모순을 느끼면서 묻어 둔 이야기들을 간혹 짧은 몇 마디로 한숨처럼 표현하시기도 하고 선배교사로서의 몫을 다 하지 못했다는 눈빛으로 내 손을 꽃 쥐어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이제 나에게 학교방문은 가야할 의무가 아니라 내 스스로 필요한 요구가 되었다. 학교방문을 갈 수 없는 날엔 왠지 신명이 떨어지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교장…교감선생님들의 그릇된 생각과 불손한 태도에도 이제 여유있게 대처 할 만큼 단련이 되었다. 아직 사무실에 정기적으로 나오지 못하는 학교에 전교조신문과 교과자료를 들고 가는 일이 선생님들에게 소중한 기쁨이 되고 참교육의 밑거름이 되는 것을 생각하면 교장․교감 선생님들의 오만쯤이야 이제는 아프지 않다.
날이 갈수록 현장선생님들의 자주성이 높아가고 있다. 90년 원상복직서명 탄압의 아픈 기억을 딛고 시국선언투쟁으로, 시국선언투쟁의 승리를 기반으로 인사관리규정 개폐투쟁에는 1,064명의 선생님들이 참가했다. 임실지역 선생님들의 예상을 뛰어 넘는 참여속에서 나는 억압의 굴레를 벗고 자주적으로 살고자하는 마음과 투쟁의 의지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하나로 흐르고 있음을 알았다. 2학기 활동의 열기를 모아 지난 11월 20일 그 동안의 준비위원회를 임시지회로 바꾸는 창립대회를 치루었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 같지만 오히려 가슴이 벅차오르고 숙연해진다.
오늘도 학교방문 길에 오르며 꿈을 꾼다. 학교앞 섬진강물 모여 바다로 가듯 처음엔 작은 목소리였으나 마침내 함성이 되어 가는 꿈, 자주․민주․통일의 새 날을 위하여 처음에 낯익은 남일뿐이었던 우리 모두가 투쟁속에 동지가 되어 어깨를 거는 꿈, 임실로 되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그 꿈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가늠해 보노라면 멀리 내가 끝내 돌아가야 할 고향같은 아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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