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1.12 | 연재 [문화저널]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위하여 우리풍물굿의 이해
권희덕 풍물연구가(2004-01-29 17:03:44)

농악은 당산신을 깃발에 모시고 잡귀와 재앙을 쓸어내고 신의 축복을 받는 음주가무 신앙예술이다.
모든 농악은 맨 처음에 당산에 꼭가서 당집(神家)에서 신의 깃발이나 초상화, 탈 등의 신체(神體)를 앞세워야 성립된다.
당산(堂山)은 단군성조가 이땅에 내려온 신단수(神檀樹)로서 큰 당산나무가 있는 원시적 교회당이며 여기의 성직자가 ‘단골’이라는 농악의 연주자 들이다. 즉 단군의 신당은 ‘당산’, 단군의 성직자는 ‘단골’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수천년 이어왔다.
그것도 ‘단골’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사용하는 지역은 전라도 지방뿐이다. 그 외 지방에서는 무격․무당․화랭이․무꾸리로 쓰고 있어 끈질긴 민족전통정신이 강한 호남농악에서 민족혼을 엿볼 수가 있겠다. 외세의 억압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민족사이기도 하다.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삼국시대 화랑과 원화가 여자잡색으로 농악에 남아 있고 원효대사가 불교성가대로 포교하였던 소성거사는 지금의 중(?)광대로, 그리고 조선시대 농악에 편승하여 유교식 제사장으로 참여한 수령 군수들의 모습이 양반광대로 남아서 잡희의 작태로 남아있다. 또 대포수는 잡귀 쫓는 창부가 조선말기 서양군사무기 수입에서 삼혈수(三穴手)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농악시작 전에 3발의 발포(축포)예식을 주관하였다. 또 서양 군악대 악기나팔이 등장하여 조선 별기군에서 곡호대(曲護隊)라고 부르자 우리는 ‘꼬꾸랭’ 나발로 불러왔다. 상모돌리기는 상모에 길게 학의 날개 깃을 달아서 전후좌후로 방향을 바꾸어 전진과 후퇴를 신호하던 군사훈련교육이 예술로 발전된 것이다. 또 탈광대(가면)는 신라시대의 처용같은 귀신 쫓는 탈과 산신의 얼굴로 분장하는 경우도 있다. 농악기는 쇠로 만든 꽹가리와 징을 “귀신은 쇠소리를 무서워 한다”는 믿음으로 잡신을 쫓는 소리로 쓰고 장구, 북, 소구 등은 ‘궁상각치우(도레미솔라)’에서 궁(宮)의 소리로 축복을 들이는 소리로 믿고 사용하였다. 군사작전에서도 후퇴신호에는 징, 쇠를 사용하였고 전진의 신호에는 죽, 장구의 소리를 썼다.
그러나 농악대에는 역귀와 축복을 같이 겸용하는 종합적인 농악구성을 하여 변화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삼한, 삼국, 고려시대까지는 귀족과 고관이 행하던 그 시대 배역이 천박한 잡색광대[대포수(화랑), 중(원효), 여자광대(원화), 탈(처용), 양반(제사장)]로 생존한 모습이다. 이들은 그 시대의 국가와 임금의 안녕을 기원하는 역대 농악단장으로 어야가, 용비어천가, 보렴, 대한제국 애국가 등 애국가요를 선창하는 임무를 맡았다.
우도농악의 청영소리는 대한제국 애국가의 제창이다. 그리고 청영소리는 농악시작을 알리는 나발부는 의식에서 사령이 집행하는 소리이다. 뜻은 명령하달을 의미하는 소리이나 곡은 애국가이다. 일제가 애국가 금지로 군악대를 식민정책의 농악으로 만들게 하였다. ‘농자천하지대본’의 깃발은 농사장려의 식민정책의 구호로서 일본서기(일본역사 BC32)의 숭신천황의 어명을 프랑카드로 쓰게하여 농악을 일복악으로 시도한 것으로 본다. 농악에서 쓰던 애국가 사용금지로 가사를 바꾸어 불렀으나 곡은 애국가의 골격이다. 지금 농악에서 태평소로 부는 시나위 가락도 대한제국 애국가의 변주곡이나 그의 영향으로 변주된 점이 많다.
금년도 전국체전의 농악마스게임과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우도굿 정읍농악과 좌도굿 필봉농악에서 대한제국 애국가를 태평소로 연주하였으나 농악의 시나위 곡으로 착각하였을 정도였다. 그것은 조선시대 군사훈련 과정에서 농악으로 밴드역할을 하며 신식군사훈련을 하면서 편곡되었기 때문이다.
신무기 포병을 도입하여 1776년에는 군악과 포병의 열세를 극복하려고 무당악사만을 선발하여 포병을 만들고 1777년에 농악기로 군악을 치는 법을 제정하고 전국에 예비군 훈련으로 대사습대회를 10월 7일에 매년 실시하였다. 포병은 신식군사로서 좋은 대우에 서구적 밴드 군악대 역할까지 농악으로 하였다. 판굿에서 두줄, 세줄, 네줄배기와 가세진 8진굿, 가세진 십자굿등은 신군사훈련의 안무가 농악에 남은 흔적이다.
농사놀이의 두레 굿은 논에 단군신을 앞세워 잡귀(병충해)를 쫓고 풍년의 복을 받는 의미이며 집안굿 역시 단군의 힘으로 잡귀를 내몰고 축복을 주는 행사로 쌀과 돈으로 종교헌금을 바치는 신앙이다. 민족말살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농악은 민속의 한 잔재가 아닌 민족의 종합예술체로 보아야 한다.
통일 신라시대의 당나라 사신맞이 문화통로였던 줄포, 정읍, 임실, 남원은 백제가요라 예술의 중심지역으로 느껴지게끔 지금도 전라도의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이 지정되었다.
우도(정읍)농악과 좌도(필봉)농악의 중간에서 태어나 살면서 견문하여 살펴본 경험으로 좌우도 농악의 특징과 역사적 배경을 현장에서 찾아 보고자 한다.

좌도굿의 특징과 역사적 배경

전라좌도의 굿이 분포 된 곳은 무진장에서 임순남, 곡성, 화순, 여수에 이른다. 백제 고이왕 때의 당산굿(산천제사)을 고취(鼓吹)로 시행하였다. 553년에는 백제의 왕자 여창이 농악으로 고구려를 진격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마이산과 지리산이 화랑도의 국가를 위한 가무제사가 늘 행해지는 지역이며 임실 필봉은 당나라 사신이 지나가는 통로로서 나당의 사신맞이 고취축제가 이어지던 지역이다. 673년에는 김유신의 장례식에 당나라 고취(鼓吹)패 100명을 왕대시켰고 옥보고 같은 신라 최고의 음악인도 운봉(지리산)에서 음악을 배워야 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최치원 역시 궁중음악의 미숙함을 느껴서 정읍(칠보)군수를 자원하여 농악과 가요를 수집하여 진성여왕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정읍사, 지리산가 등을 고려사 악지로 편찬한 정인지는 최치원은 사모해서 인지 임실에서 ‘초가(楚歌)라는 군가(軍歌)가 들리네’라는 시를 짓고 가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가무기예인이나 글안의 기예인을 모여 살게 한 곳이 ‘거단정’으로 임실군 강진면이 ‘가단정’으로 필자는 노인으로부터 익혀 들어 왔으므로 예술인이 정착하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필봉의 좌도굿이 있는 지역은 이처럼 예술의 기예가 성행될만한 여건과 역사적인 배경을 가졌다.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 역시 남원의 황산 전투에서 왜병을 농악으로 격퇴하고 남원 읍에서 크게 나례(농악)굿으로 개선하였다. 그 후에는 왜적이 시성계 유별난 군악의 나발소리를 함경도에서도 알아 듣고 도망할 정도엿다. 그 힘이 비대하여 최영의 군사도 1388년에 개성에서 이성계 군사의 유별난 농악(나발)소리에는 속수무책이었다 한다. 이전에는 공을 크게 쌓지 못한 이성계는 남원 농악의 흥으로 지리산 산신을 신봉하고 왕이 되었으니 1397년에는 육군훈련소 격인 동문교장(東門敎場)을 세우고 언제나 농악소리와 깃발로 훈련하였다.
그러니깐 좌도(남원)농악은 이 시기에 모두 등용되어 조선 군악을 유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좌도굿으로 진안 중평농악 임실 필봉농악 남원, 곡성, 화순 등의 농악에는 복장과 박자 대형이 농경이나 오락보다 군사 훈련성이 많이 보인다.
여러지역의 농악에서비교적 공통되는 점과 임실, 강진(가단)의 필봉 농악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좌도농악의 특징과 이해
가. 매굿
매년 12월 말일 밤에 농악을 당신에서 당산신을 ‘맞아오는’굿을 의미한다. 부여시대의 놀이 영고(迎鼓)의 뜻과도 같다. 단군신을 설날 밤 12시에 하늘에서 당산나무로 하강하기에 2시간을 맞추어서 맞이하는 뜻으로 매굿이라 한 듯 하다.
모든 농악은 반드시 당산나무 밑에서 시작하는 들(入)당산과 끝나고 신을 모셔다 주는 날(出)당산굿이 있다.
나. 마당밟이
음력 정원 초하루부터 3일까지는 세배와 제사의 예식 때문에 농악은 칠수 없고 4일 이후에 날을 택하여 마당밟이를 한다. 이것은 뜨븗이 지신밟기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농악수의 모임을 알리는 나발을 세 번 불게 한다. 그리고 깃발을 세우고 깃발을 신성하게 하는 깃굿을 친다. 깨끗한 깃발을 세우고 당산으로 가서 인사굿을 치는데 이것은 당산신이 깃발에 씨어들게 하는 무속적 신받이를 뜻한다. 이것을 들당산굿이라고 한다. 그 당산신을깃발에 모시고 마을로 간다.
첫 번째 농악은 마을 우물굿이다. 그리고 집안에 들어 가기 위하여 대문굿을 한다. 집에 들어 가서도 반드시 샘굿부터 치는 것은 당산은 천신(天神), 샘은 지신(地神)으로 생각하여 우선적인 순서로 한 듯 하다.
이어서 마당놀이는 마당 가운데에 모닥불을 놓고 돌게 하여 정지굿(부엌)철융굿(장독)굿을 한다.
다. 당산제
음력 1월 9일에 시행한다. 먼저 할미당산부터 제사를 지내는데 영기가 없이 농악이 참여하고 제사장(밑집)에 내려와서 다시 준비하여 당산(아랫당산)에 제사는 영기(삼지창)를 챙겨 농기와 같이 행진한다. 이 때에 영기와 농기가 넘어 지거나 나무에 스치면 불길하다 하여 조심한다.
라. 보름굿(찰밥걷기 농악)
정월 보름날은 불을 상징하는 보름달의 빛을 받으며 가정에 복을 전하는 농악을 친다. 가정에서는 집에서 만든 찰밥을 한 덩이씩 떼어 준다.
마. 노디굿(징검다리굿)
마을 앞의 건너 들어오는 징검다리에서 농악을 치며 축원하는 수신(水神)에 대한 제사로서 중국 요순시대에 세 발 달린 자라가 발자욱마다 물이 솟는다는 수신왕(水神王) 신화능(龍)의 옛 발음으로 생각되며 인근에는 ‘능다리’, ‘너디로’ 부르는 곳이 있다.
바. 걸궁굿(???)
걸궁굿은 곡식을 구걸하는 고취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의 나례(귀신을 쫓는 고취)굿을 행하는데 지방에서 선발하여 서울에 가고 올 때에 여비를 걷어 쓰게 하던 농악을 걸량, 걸굿으로 사용한 말이다. 정월 16일부터 30일 사이에 많이 한다. 2월 1일은 환웅(단군)신이 하늘에 올라가는 날이기 때문에 그 후에는 천신(天神)의 효과가 없다는 의미로 본다.(그래서 우리민족은 설과 추석에 천지신(天地神)을 맞는 시간이다. 한해의 생존하는 복을 타는 날이라는 단군신앙이다)
걸궁굿은 다른 마을에 가서 치는 경우에는 그 마을 앞에서 문굿을 쳐서 기능을 합격하여야 마을에 들어간다. 여기서 모든 판굿을 보여서 관람할 의사를 갖게하는 것이다. 들어오라는 나발신호가 떨어지면 반드시 그 마을의 당산부터 찾아가서 당산굿을 쳐서 그 마을의 신(神)을 가정에 맞게하는 것이다. 걸궁이 끝나고 마을에서 나올때도 역시 그 마을의 당산에 들러서 당산나무에 그 마을의 단군신을 모셔두고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들(入) 당산굿 날(出)당산굿이라 한다.
사. 두레굿
만두레 김메기로서 3벌 김메기 할때에 나발을 삼초(세번)불어서 농악대와 일꾼을 모아서 당산에 들러온 다음 논두럭에 농기를 세운다. 농사꾼의 앞에서 농악이 선도하며 잡신(병충해)을 쫓고 농기에 모셔진 당산신의 위력으로 풍년이 들게 하는 신앙 농사이다. 이 때에 농사가 잘 된 집은 그 집 머슴을 소에 태우고 가서 놀기도 한다.
아. 판굿
판굿은 군악과 놀이의 요소가 많다. 메굿, 당산굿, 노디굿, 걸궁굿, 두레굿 등을 당산신을 모시고 축복을 받는 의미이지만 군악은 군사가 전투하는데서 성황신을 모시고 그 위력으로 적을 치고 자기의 생명을 보존한다는 신앙이다. 깃발은 신이며 농악소리는 곧 신의 명령소리이다.
‘북, 장구치면 나아가서 징, 쇠치면 그치네’라는 군사훈련 모습을 그린 권우의 시(1397)와 유성룡의 징 비록에도 농악과 나발수의 양성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필봉농악의 판굿은 묘한 박자와 대행과 신호의 특색이 강하다.
①칠채굿
일체에서 칠채 박자는 일반적인 3박자나 4박자의 박자에서 징이나 쇠의 박자가 추가되거나 줄여져서 매우 어렵다. 그러니깐 외부인이나 적군이 알 수 없는 암호와 같은 의미를 띤다. 일체에서 순서대로 치다가 칠채로 박자가 바꿔지면 바로 돌던 대형을 바꾸어 시계침도는 반대 방향으로 돈다.
②호호굿
원을 만들어 안 밖에 두줄로 만들다가 혼합박자(암호)를 길게 치다 똑같이 ‘호호’소리를 내는데 이는 적군에게 위협의 고함지르기 군법이나 군사모으기의 신호로 본다. 그리고 잦은 호호굿의 박자가 바꾸어 지면 사물과 잡색의 두줄은 쇠, 징의 팀과 장구, 상모으 l팀이 반대로 돌아가는 안무로 바뀐다.
③짝드름
쇠가락을 주고 받으면서 맺을 때와 풀을 때 징의 박자에서 방향을 바꾼다.
④늦은 풍류
굿거리, 길굿과 비슷하게 느린 춤장단으로 한량춤을 추게 한다. 안팎에 겹줄로 잡색과 사물이 원을 만들어 드는데 저절로 박자는 빨리 치면서 느린 삼채인 반풍류굿으로 이어진다.
⑤반풍류굿
삼체박자에 무등의 꽃받이 춤을 추며 까치새 걸음(스키핑스탭)으로 방울진을 만들어 나간다. 또아리(달팽이)감기를 세 번한다 하여 삼방진이라고도 한다.
⑥미지기 영산굿
상쇠와 장구가 어림굿으로 어룬다. 상쇠가 상모를 좌우로 움직여서 장구를 끌어들이고 밀면서 두 줄을 만들고 군사훈련과 점호, 사열식을 연상한다.
⑦영산다드레기
가락이 빠르게 바뀌고 상쇠의 높은 쇠소리와 부쇠의 낮은 쇠소리를 교대로 표현하는 묘미를 음색으로 나타낸 예술이다. 장구와 북, 소고는 낮은 화음의 박자로 계속된다. 소쩍새 소리와 같다고 하여 일명 소쩍새 소리굿이라고도 한다.
⑧노래굿
노래굿은 굿거리 풍의 노래 장단에 따른 농요를 부르지만 임금의 안녕을 노래하는 보렴이나 대한제국가의 변주곡으로 군가와 민요가 혼합된 듯하다.
⑨돌굿
상쇠의 쇠가락으로 시작과 끝을 알리며 싸잽이 박자로 춤을 추다가 쇠와 징의 강박신호에 그치거나 대형이 바꾸어 지며 논다. 또는 길굿가락으로 치다가 징이 1박 빠르게 장구박자에 치면 상쇠는 곧 바로 다른 박자로 바꾸고 이어서 대형이 바꾸어 지며 돈다.
⑩수박치기(손벽치기)
고려시대 수박희(手博戱)로 정중부 등의 무신들이 힘을 얻었던 기예가 수박치기로 필봉농악에 남아 있다. 사물들이 원을 돌고 있으면 그 안에서 상쇠와 잡색들이 두 줄로 앉아서 손벽치는 놀이이다.
⑪콩등지기
서로 뒤로 바꾸어 업어 보면서 ‘콩떡’ '쑥떡‘하면서 놀다가 두 줄로 서서 새끼줄풀기 놀이를 한다.
⑫군영놀이
구종놀이(??戱)가 군악에서 군영으로 된 듯하다. 우도굿에서의 개인놀이 현태이나 여기서는 잡색까지도 자기의 재주를 보인다.
⑬도둑잽이굿
대포수와 상쇠의 코미디(재담)으로 시작하여 방울진, 화투, 투전판 등을 벌리면서 대포수가 도둑이 되면서 도망치면 상쇠가 재주껏 잡아내어 문초하고 목을 베고 죽은 후에는 다시 의원을 부르고 살려 침을 노아서 내는 등의 연주이다.
여기서 도둑의 목을 벨 때에는 ‘왜장청장놈의 목을 베어라’하는 말을 하는데 일제시대하의 도둑잽이 굿에서도 관헌을 피하여 한밤에 공연하였다.
여기에서의 도둑은 왜적과 청나라까지를 뜻하는 말로서 동학군의 놀이로 짐작한다.(동학교주 전봉준과 김계남이 필봉마을 인근에 있는 회문산으로 왔거나 오다가 체표되었음) 여기서는 농악을 군물(軍物)이라고 말한다.
⑭탄머리굿
영기의 종이를 썰어서 만들어 메달은 수술을 떼어서 들고 춤을 추며 놀다가 두 영기를 따라 양쪽으로 도는 등 놀다가 ‘별따자 별따자 하늘 잡고 별따자’ 등의 구호를 울리다가 ‘갈리세 갈리세 구경꾼도 갈리세’ 등으로 헤어지는 구호를 외친다.
그리고 탄머리, 탈 등을 모닥불에 넣고 불을 넘기도 한다.


우도굿의 특징과 역사적 배경

우도굿은 전라도 서해안 지역과 정읍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나주에서 북쪽으로는 익산에 이르는 농악을 총칭한다. 그러나 이 지역도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고 있으니 그것은 역사적 지역성의 변화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농악, 강원농악, 영남농악, 충청농악 등이 군사훈련과 농사놀이의 안무가 많은 것은 전라 좌도의 농악과 조금씩이라도 맥을 같이 하는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우도농악에서도 군사훈련의 대형이 많으나 개선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우선 그렇게 형성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상고시대부터 대략 찾아보면 이해가 되리라 믿는다.
마한시대에는 소도(蘇塗)와 같이 방울 달린 농기깃발의 농기 아래서 줄지어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며 백제 시대에는 오방성(五方城)의 중앙성으로 문화중심이 고부성이다. 백제 무왕은 직접 궁중에서 대신들과 같이 음악을 직접 연주하며 신하와 손을 들며 춤을 추었으며 일본에 탈춤, 기악을 보냈고 동양 최대의 익산 미륵사탑과 왕궁을 지었다. 이러한 방대한 국방력은 백제가 중국의 동부를 식민지로 삼아서 들여온 국력과 문화가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통일 신라시대에도 신라의 당나라 통로로서 부안, 정읍, 임실, 남원의 거리가 문화사절단 왕래의 거리가 되고 최치원이 정읍(칠보)군수로 중국사신을 맞는 책임자로서 우리 음악을 수집 정리하였기 이해에 삼대목이란 음악책이 나왔으며 고려사 악지에는 정읍, 선운산, 반등산(고창), 지리산, 무등산 5곡(曲)만이 남아서 전한다.
그리고 최치원은 신태인을 무성(茂盛)이라는 중국의 음악고를 이름으로 고치고 음악인의 집단 거주지를 음성향(音聲鄕)을 반등산 밑에 두어서 중국사신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악지에 남아있는 백제가요는 음성(정주시 삼산동)을 둘러싸인 곳의 지명들 뿐이다.
고래시대 1294년 충열왕은 몽고의 식민지로서 원나라 왕비와 떨어져서 정읍(옹동)출신의 시무비(祡無比, ???)와 도라산에서 늘 가무로 지냈으며 ‘정읍가요’가 여기서부터 역사서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고려의 음악을 크게 발전시킨 충열왕은 시무비의 사랑으로 몽고왕비가 자살하고 왕위까지 스스로 버렸으니 정읍의 가무예술의 극치를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궁중음악인들은 시무비의 세력으로 대겨 등용되어 기틀을 세웠기에 고려사 악지에 백제가요가 이 고장의 가요만 기록되어 있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1737년 영조때에 암행어사 원경하는 전라도 부안에서 두레농악을 하는 것이 제 2의 정여립의 대동굿(大同??)이 될까 두려워 농악기를 압수하였다. 정여립의 대동계는 농악과 민속악의 모임이 다져진 힘으로 관군이 무서워 하는 서해안 왜적을 정여립이 물리친 대동굿이다.
대원군이 전국의 농악대를 불러서 공연하였던 경복궁의 건축공사가 끝나고 그 인부와 명창 농악수들이 정읍의 보천교 건축장(정읍,입암)에 모여 들고 농악반주로 찬송하였다.
서양음악과 군악대 음악을 익히 들었던 경향 각지의 농악수들은 정읍에서 종교농악 공연으로 정착하고 발전하였다. 쏠로(solo)독주가 산조(散調)라는 말로 변음되고 ‘쏠로 장구’가 ‘설장구’라는 말로 창조되었다.
설장구는 군악대 행진 드럼곡을 장구로 표현한 것으로 보천교, 강증산교의 찬송농악놀이에서 창조 발전되었으나 지금은 똑같은 박자로 전국의 모든 장구놀이로 유행되어 쓰이고 있다. 상고시대부터 농악을 좋아하는 기질이 있어서 역사적으로 농악을 연주하는 자가 환영받는 지역이 굳혀진 것으로 본다.
판소리가 유일하게 서민과 평민의 벼슬의 등용문으로 크게 유행하자 판소리의 박자 순서에 맞게 농악을 창조한 오채일굿, 풍류굿, 세마치, 삼채 등의 색다른 곡이 있는데 이점이 우도굿을 독특하게 한다.
대부분 좌도 농악과 맥을 같이하나 서구의 문화물결이 청나라, 일본, 군사교육 등으로 몰려들어 감수성 높은 이들에게 동서 혼합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서구의 폭댄스, 발레, 쏠로, 밴드 등의 신식군사교육에서 외국군이(미, 일, 청, 불, 영국)에 의해 교육시켰다. 군사해산 후에 군악, 군가를 교육받은 군사들이 정읍 보천교 회당에서 성가대 찬송 반주자로 우대하여 기거하므로 좌도농악과 다른 특징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1)우도농악의 특징과 이해
(가) 당산굿
우도굿의 당산굿은 깃발이 방대하고 느린 박자를 사용하나 좌도굿과 유사하다. 모든 농악이 시작 될 때에는 당산으로 가서 연주하는 들당산굿을 치고 당산신을 모셔 내려온다. 역시 신의 깃발을 들고 매굿, 보름굿, 걸궁굿, 두레굿 등에서 신으로 군림하여 역귀를 쫓고 축복을 받는 행사이다. 이렇게 굿이 끝이 나면 농악대는 또 다시 당산에 가서 신의 깃발을 당산에 내리게 하고 돌아온다.
이러한 깃발은 신(神)을 상징하기 때문에 거리에서 두 깃발이 만나며 서로 비켜주지 않는다. 자기의 신을 노엽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다른 부락의 깃발을 넘어 뜨리는 싸움도 있다.(함열 농기뺏기)
(나) 기세배굿
마한이 농사 놀이에서 소도(蘇塗)라는 깃봉에 방울을 달고 출입을 금지시킨 풍속의 기록이 중국에 있는데 지금은 기세배 굿으로 남아 있다. 마을이 생기면 마을의 신(神)의 깃발인 농기를 제작한다. 그러나 신의 정기가 없어서 인근의 먼저 생긴 농기에서 신의 정기를 불로 붙여 오듯이 붙여 오는 깃발의 세례이다.
단군의 깃발에서 점점 내려가서 마을에 교회당의 신상(神像)으로 쓰인 셈이다. 상고시대는 하늘의 신을 어른 마을에서 당산제굿을 하면서 받아 내려서 주는 종교예식이다. 그 깃발을 들고 집에 가면 집안이 축복받고 논에 가면 단군신의 힘으로 풍년이 든다는 신앙이다.
(다) 매굿
매굿은 지신밟기(가정방문굿)에서 문굿, 샘굿, 고사굿(성주굿)을 하고 마당에서 판굿을 하고서 마친다. 그리고 부엌(정지)굿과 뒷 장도겡서 철융굿을 한 다음 인사굿을 치고 나간다.
여기서는 장소를 옮기는 장단을 길굿이며 길굿 장단으로 인사 세 번을 한 다움에 삼채박자로 상쇠가 주술적인 주문을 외워 제장한다. 그러면 모두 그 박자에 맞게 따라서 농악을 친다. 성주굿에서는 성주풀이 민요를 부르기도 한다.
부엌에 가서는 ‘정지구석도 네구석 방구석도 네구석 구석 구석 네구석’ 장독굿에서는 ‘장독 밑에 쥐들어간다. 쾅쾅 눌러서 잡자’ 샘굿에서는 ‘이시암물 좋구나. 벌덕벌덕 마시자’ 문굿을 칠 때에는 ‘쥔 쥔 문여시오 나그네 (나례)손님 들으요’ 또 다리를 건너게 되는 경우에도 다리굿을 그와 같이 하고 ‘헛다 그 다리 좋구나 치렁 처렁 건너자’ 등의 구호를 외친다.
(라) 판굿
판굿을 마당놀이의 오락적인 것과 군사훈련이 현대화 된 예술로 발전되고 있다.
가) 오채질굿
전라우도굿의 특징은 가야금 산조와 같이 느린 진양조(오채질굿)에서 중모리(풍류굿), 중중모리(양산도), 자진모리(삼채), 휘모리(다스름)의 순서로 판소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농악이다.
특히 오채질굿의 박자는 우도굿에서만 쓰이고 있다. ‘함평천지 사는 몸이 나주고 찾아간다’라고 부르는 판소리 ‘호남가’에서 첫머리 5마디 진양조 박자로 농악을 치던 것이 점점 빠르게만 사용되어 변주된 것이라고 본다.
나) 풍류굿
풍류굿은 굿거리 박자나 길굿의 박자와 길이는 같아도 신민요의 박자에 아주 잘 맞는 박자이다. 그러니까 경기민요의 태평가, 풍년가 등에 맞는 장단이다. 풍류굿 박자는 노래나 새납의 멜로디 연주에 잘 맞게 되어 있으니 풍류꾼들의 농악 장단으로 멜로디용 풍류꾼 명창이 창조한 농악장단 이라고 본다.
다) 양산도굿
양산도굿은 경도 민요 양산도에 아주 잘 맞는 세마치 장단이라서 그렇게 이름이 되었다. 경기농악에도 없는 세마치 장단은 왜 전라도 우도농악에만 있는가?
양산도, 도라지, 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등은 우도농악으로만이 반주할 수가 있다. 경기민요라고 말하지만 경기민요를 싹티울 예술의 ‘거름기적 박자 문화’가팽배한 곳이 우도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라) 안바탕 겉바탕(삼채)
양산도 박자가 점점 빠르게 진행되면서 저절로 삼채박자가 된다. 3박자를 많이 쓰던 우리 음악은 이 시기에 서양음악의 째즈와 행진곡 찬송가 밴드의 영향으로 4박자가 많이 쓰였다. 농악을 군악으로 쓰던 모든 군사는 서양군인이 4발자의 군가, 제식훈련을 교육시켰기에 3박자와 4박자를 같이 쓸 수 있는 다목적용도의 삼채박자가 우리식으로 쓰인다.
♪♩♪♩♩♪♪♩의 박자를 느리게 치면 3박자로 12/8박자이나 빠르게 치면 ‘♬♬♬♬’의 4/4박자로 사용된다. ‘♩♩♩♩’의 4/4박자는 우리나라 체질에 맞지 않는 서양박자이며 농현의 효과가 없는 박자이기 때문이다. 삼채박자는 우리나라 만이 있는 박자이다. 전국의 농악박자는 삼채를 주로 사용한다.
마) 오방진굿
오방진굿은 좌도굿의 방울진과 놀이대형은 거의 같으나 박자는 우도굿이 여유있고 길다. 또아리를 동서, 남북, 중앙에 각각 감아돌고 풀다 좌로 감고 우로(시계 바늘 방향)돌면서 훈련하는 조선시대의 군법이다.
바) 호호굿
좌도굿과 거의 같으나 박자가 길다.
사)달어치기굿
상쇠가 호허굿을 마친 다음 원의 대형에서 뒤로 돌아서 부쇠, 종쇠, 징, 장구들의 사이로 빠져 나오면 모두 앞사람 뒤에 붙어서 따라 나오는 군사훈련의 대형놀이다.
아) 미지기굿
훈련굿이라고도 한다. 쇠와 징(1열), 장고와 북(2열), 상모(3열) 등이 3열종대로 서서 좌우로 걷거나 두줄로 마주보고 서서 밀고가고 밀려오는 제식훈련 모양의 대형이다. 조선군사의 서구식 훈련과정이 조선후기에 대사습대회를 실시함에 따라서 발전된 놀이가 안무화 된 것으로 본다.
자) 짝드름(품앗이굿)
쇠와 징이 장구와 북을 마주보고 밀고 당기며 품앗이 장단을 친다. 상쇠와 부쇠가 번갈아 치는 놀이이다. 좌도의 영산굿과 비슷하나 박자는 다르게 표현된다. 쇠와 장구, 북의 소리를 교차로 조화시킨다.
차) 일광놀이
북부, 경기지역과 영남의 오광대놀이 같은 탈놀이가 없는 전북지방에는 탈춤의 관객이 없기 때문에 막간을 이용하여 탈이 없이 재담으로 꾸며대는 연극이다.
상쇠와 대포수, 설장구가 약식 도둑잽이굿으로 엮는데 정읍의 ‘떼쇠’라는대포수가 지었다 한다. 내용은 농악이 끝나자 땅에 놓은 꽹과리를 대포수가 집어서 옷속에 숨긴다. 상쇠가 대포수를 수상히 여기고 쇠채로 대포수의 배를 땔서 ‘똑똑’꽹과리 소리가 나자 대포수는 도망간다. 농악을 오방진굿 대형으로 치면 또아리 대형의 사이에 숨고 찾아내는 놀이이다.
카)구종(舊蹤)놀이
농악의 끝 부분에서 농악의 개인놀이이다. 또는 악기별로 공연한다.
① 쇠놀이
상쇠가 혼자 나와서 쇠를 요란하게 울리다가 상모의 깃털을 세우고 쇠를 가볍게 들고 춤을 춘 다음 좌우로 돌리기도 한다. 쪼그리고 앉아서 좌우전후로 시방조시, 전조시 산치기등 묘기를 보인다.
② 상모놀이
상모놀이는 벅구잡이가 나와서 소구를 좌우로 치면서 묘기를 보인다. 그리고 상모를 돌리면서 묘기를 보이다가 뒤짐벅구(줄거리) 연풍대등의 묘기를 보이면서 맺는다.
③ 설장구놀이
설장구놀이는 우도농악에서 처음 시작하였다. 조선군사 훈련에서 군악으로 사용할 때에 서양의 드럼박자와 행진구령을 장구로 표현하여 나온 설이 있으며 군사들이 장구묘기에서 만들엇다는 설 그리고 정읍의 이복문이라는 설장구가 처음 치든 것이라고도한다.
설장구의 박자를 살펴보면 처음에 연주되는 것은 군사훈련의 구령박자와 행징드럼박자와 유사한 점이 있으며 후반에 맺고 굿거리 장단부터는 산조의 진행순서로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연풍대 휘모리 단모리의 빠르기 순서로 마친다.
④ 12발 상모놀이
상모에 긴 줄을 달고 엽전을 붙여서 축복을 유인하고 창호지(백지)한장을 전부 테이프로 만들어 돌렸다 한다. 앉아서 돌리기, 누워서 돌리기, 서서 돌리기, 뛰어 돌리기, 옮겨가며 돌리기 등이 있다.
상모돌리기의 기능은 어깨와 발의 움직임으로 한다. 머리로 돌리면 보기도 흉하고 힘이 든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