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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3 | 연재 [클래식 뒷담화]
불운의 연속, 결국 유서를 쓰다
베토벤
문윤걸 교수(2014-03-03 18:31:16)

1802 10. 32살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 12.17~ 1827. 3.26) 죽음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장문의 유서를 동생 칼과 요한에게 남겼습니다( 유서를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라고 하는데 당시 동생들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한참 베토벤이 죽은 후에야 발견되었습니다). 무엇이 젊은 베토벤으로 하여금 죽음을 결심하게 했을까요? 그리고 베토벤은 어떻게 고통을 이기내고 25년이나 삶을 이어갔을까요? 베토벤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베토벤이 죽음을 이겨낸 이후 25년에 쏟아져 나왔으니 만약 베토벤이 유서를 남기고 바로 세상을 떠났더라면 서양음악의 유산 뭉텅이는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1802 10,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라는 곳으로 휴양을 있었습니다. 하일리겐슈타트는 빈의 북서쪽 교외에 있는 작고 조용한 마을입니다. 마을은 미네랄이 풍부하여 각종 병에 효험이 있다는 온천이 있어서 베토벤은 병치료를 위해 이곳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이곳에서 베토벤은 6 전원교향곡을 작곡하기도 했는데이곳 산책길에서 전원교향곡 2악장 <시냇가의 전경>모티브를 얻었고, 방울새, 나이팅게일, 뻐꾸기 등이 곡을 작곡하는 도움을 주었다라고 말했습니다(그러나 사실은 베토벤이 전원교향곡을 작곡할 무렵인 1808년에는 이미 귀가 많이 어두워져서 그런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 마음으로 들은 것이겠지요).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로 휴양을 떠나 가장 이유는 20 후반부터 앓아 귓병과 계속되는 불운으로 인해 심신이 크게 상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베토벤의 삶은 불멸의 음악가,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게 불운의 연속이었습니다. 평생 가난했고, 수없는 좌절을 겪었으며, 끝없이 고통을 주는 질병과 싸우면서 주변 사람들과 마찰했고, 사랑에도 연이어 실패한, 참으로 지난한 삶이었습니다.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네델란드에서 이민 본의 궁정악단 단원이었고, 아버지 역시 궁정악단의 테너가수였습니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좋은 교육을 받았으리라 생각하시겠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베토벤이 어려서부터 남다른 소질을 보이자 아버지는 2 모차르트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음악신동으로 소문나면 돈을 있었기 때문이지요. 어린 베토벤은 아버지로부터 혹독한 매질을 당하며 음악훈련을 받았습니다(아마 때문에 베토벤은 고집스럽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비타협적인 성향으로 자랐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대만큼 돈을 벌진 못했습니다(아버지는 나이를 속여가며 베토벤을 무대에 세웠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모차르트처럼 신동 흉내를 내는 어린 음악가들이 많았거든요. 모차르트 이후로는 신동이 너무 흔하다 보니 웬만해서는 주목받기 어려웠을 겁니다).   

신동 모차르트처럼 되라고 가혹한 훈련을 받았지만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마음으로부터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빈으로 찾아가 그를 만나고 싶어했으나 쉽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만큼 경제적 상황이 곤란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병을 앓고 있었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이기 때문에 사실상 가족을 돌보는 사람은 베토벤밖에 없어 차비조차 마련할 길이 없었지요. 그러던 어렵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784, 14세가 되던 해에 스승 네페가 여비와 숙박비를 마련해주어 어렵게 모차르트를 찾아갈 있었던 것입니다. 

서양음악사의 빛나는 위대한 인물이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훗날 자신과 쌍벽을 이루는 위대한 음악가가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겠지요. 모차르트는 어린 베토벤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짧은 음악마디를 연주하고 뒤를 이어 즉흥곡을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14세의 어린 베토벤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기대 이상으로 곡을 이어가 모차르트를 기쁘게 했습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모차르트는 베토벤의 형편을 고려해 일체의 수업료도 받지 않고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만남은 겨우 한달 만에 끝이 났습니다. 독일에 있던 베토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베토벤이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베토벤은 1792년에 다시 빈을 찾아 오는데 그때는 모차르트가 사망한 1년이 지났고, 베토벤은 하이든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어렵게 찾아간 모차르트와의 인연도 짧게 끝나고 무너진 가정도 책임져야 했지만 베토벤은 시름에 빠져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훌훌 털고 일어나 악단에서 연주도 하고, 위대한 작곡가(하이든, 알브레히츠베르거, 살리에리 )들을 찾아다니며 음악수업도 받으며 하나 작품을 써내려 갔습니다. 베토벤이 연주를 하고 작품을 써낼 때마다 베토벤의 재능을 알아본 후원자들이 늘어갔습니다. 작품 하나로 해의 생계비를 벌어들이는 일도 생겼고, 모차르트처럼 유럽순회 연주여행을 떠나기도 했으며, 베토벤의 동생 카를은 베토벤의 작품을 인쇄 출판하여 돈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이제 베토벤에게 불행은 끝이 나는 보였습니다.   

그러나 1797, 베토벤은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베토벤의 유서를 보면 때문에 베토벤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섯 동안 절망적인 고통을 겪어왔어. 몰지각한 의사들은 고통이 점점 심해져가고 있는데도 나아질 것이라는 거짓된 희망으로 속여 왔어. 결국은 병을 벗어날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없구나…. 그러나 사람들에게 말할 수는 없었어. “ 크게 말씀해 주십시오. 귀가 먹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욱 완벽하게 갖춰야 하는 감각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어찌 받아들일 있을까. 어떤 면에서 나의 감각은 누구보다도 완벽했는데…. 이제 나는 동료들과 편안히 있을 방법이 없고 세련된 대화를 나눌 수도 없으며 사상을 교환할 길도 없어. 나는 추방된 사람처럼 외톨이로 살아야 .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면 불에 듯한 공포감이 나를 사로잡고 나의 상태가 간파될까 겁에 질린다….” 

유서 내용에서 보듯 베토벤은 난청에 시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이 알아챌까봐 무서워 했던 같습니다. 그래서 들키지 않으려고 무던 애를 썼지만 들리지 않으니 동문서답에, 짜증과 신경질까지, 사교생활이 엉망이 되어버렸지요. 이내 베토벤은 괴팍하고 성격이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 찍혔는데 억울함 때문에 유서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내가 죽으면 슈미트 박사에게 이름을 대고 병이 무엇인지 설명해달라고 부탁해라. 그리고 글을 병에 대한 진단서에 첨부하도록. 그렇게 하면 내가 죽은 뒤라도 세상이 나와 화해할 있을 테니까….” 자신의 괴팍함이 질병 때문이었음을 변명하고 사람들로부터 이해받고 싶어 했던 것이겠지요( 때문에 유서대로 베토벤은 사후에 실제로 부검을 했습니다).   

질병 때문에도 고통이 컸는데 무렵 사랑하는 여인(월광소나타의 주인공인 줄리에타로 베토벤의 불멸의 여인으로 추정되는 여성입니다)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피아노 제자였던 줄리에타와 베토벤은 열렬히 사랑했지만 줄리에타는 결국 1803 아버지의 권유로 다른 백작과 결혼해 베토벤을 떠났습니다(하지만 유서에 실연에 대한 고통은 언급되지 않은 걸보면 때문에 죽고 싶지는 않았나 봅니다).   

당장 세상을 떠날 같은 비통한 유서를 남겼지만 베토벤은 무려 25년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유서를 남긴 그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세상에 드러내면서 오히려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존경하려니 괴팍하고, 사랑하려니 돈이 없고, 무시하려니 위대하다.” 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이 베토벤에 대해 내린 평가였다고 합니다. 1827, 베토벤의 장례식에는 인구 29만명 2만명이 넘는 조문객이 참여하여 횃불을 들고 관을 호송했다고 하니 괴팍한 베토벤을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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