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4.2 | 연재 [클래식 뒷담화]
자유와 방탕의 도시가 키운 음악가 비발디
문윤걸 교수(2014-02-05 10:37:02)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고 즐겨듣는 클래식 음악이 비발디의 <4>라지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으로 <4>는 빠지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도 비발디는 서양음악사에서 바흐나 헨델만큼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호평과 악평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비발디와 바흐, 헨델은 동시대에 활동했습니다(비발디가 바흐와 헨델보다 7년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도 바흐는 서양음악의 아버지, 헨델은 서양음악의 어머니라는 영광스러운 별칭을 가지고 있지만 비발디는 ‘빨간 머리의 사제(il Prete Rossa)’ 정도로만 언급될 뿐 서양음악사에서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서양음악사에서 바흐와 헨델을 음악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삼은 걸 보면 아마도 바흐시대를 기점으로 바흐 이전과 이후를 나누어 서양음악을 이해하는 듯합니다. 비발디는 바흐와 동시대에 활동했지만 이전의 작곡가들의 양식을 흡수해 거대한 음악의 바다를 만들어낸 바흐만큼의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 음악가 스트라빈스키는 “비발디는 똑같은 내용의 곡을 백번 넘게 써갈긴 사람이다”라는 혹평을 하며 음악사적으로 크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평하였습니다.


그러나 과연 비발디가 그러한 취급을 받아도 되는 작곡가일까요?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비발디의 음악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그가 베니치아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물과 운하의 도시 베네치아는 독특한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발디가 주로 활동하던 18세기초 베네치아는 불타는 황혼과 같은 역사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베네치아는 1797년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1천년 도시국가의 역사를 마감하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중세의 다른 도시들과는 전혀 다른 역사적 위상을 가진 도시였습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지중해라는 지리적 이점과 동서양 중개무역과 능란한 외교술로 주변 강대국들 틈바구니 속에서도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귀족 중심의 중세사회에서도 최초로 주민투표를 통해 국가원수를 뽑는 공화제를 시행(오늘날의 입헌군주제와 비슷한 정치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하여 돈많은 상인들이 귀족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위세를 가질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베네치아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자유분방한 삶을 즐길 수 있었고 새로운 문화예술을 쉽게 받아들이며 그것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즐겼던 것입니다. 오페라라는 새로운 형식의 문화예술도 피렌체에서 시작되었지만 오페라가 크게 꽃피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우리가 베네치아에 가면 꼭 눈여겨 보는 관광상품이 있습니다. 바로 화려한 가면인데요. 베네치아의 가면이 유명한 것은 베네치아에 가면축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1년에 6개월 이상 카니발을 즐겼고 카니발 기간에는 신분과 지위를 가리는 가면을 쓰고 일상의 규범이나 금기를 넘어서는 해방된 일탈을 즐겼습니다.


6개월 이상 축제가 벌어지는 곳, 그리고 축제 기간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가면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이 되지 않나요? 그리고 이런 열정이 넘치는 도시의 사람들이 중세적 분위기의 경건한 교회음악으로만 만족했을까요? 이 두 가지가 바로 비발디 음악을 결정하게 됩니다.

먼저 해방과 일탈, 자유와 방탕은 도시에 새로운 문제를 낳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풍속의 문란과 그로 인해 도시에 사생아가 넘쳐난다는 것이었지요. 이런 아이들 중 많은 아이들이 거리에 버려졌습니다. 그 중 남자 아이들은 나폴리의 고아원으로, 여자 아이들은 베네치아의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 고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비발디는 바로 여자 아이들이 모여있는 피에타 고아원의 음악교사로 부임하여 37년간이나 근무했습니다. 비발디는 25세에 사제가 되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이 넘쳐 사제로서 보다는 음악가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비발디의 전기에는 비발디가 어릴 때부터 앓았던 천식으로 기침이 심하고 병약하여 미사를 책임지기 어려울만큼 건강이 나빴다고 하지만 비발디가 의술이 뛰어나지 않았던 당시에 63세까지 이곳 저곳 연주여행을 다녔던 것을 보면 아마도 사제로서 보다는 음악가로서 살기를 더 원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사제라는 신분이 주는 신뢰감 덕분에 여자 아이만 모은 고아원의 음악교사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고아원에서는 여자 아이들에게 수녀교육과 음악교육을 주로 시켰습니다. 두 영역 모두 당시의 인력수요가 많았던 영역입니다. 비발디에게 이곳은 자신이 만든 새로운 음악들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바로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은(당시 음악가들은 귀족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후원자인 귀족의 취향과 필요에 맞는 음악만을 해야 했지요) 자신만의 오케스트라(음악교육을 받아 숙련된 여자아이들)를 가질 수 있었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만든 작품을 이 오케스트라를 통해서 연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특히 비발디는 아주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자였기 때문에 바이올린을 잘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어떤 독설가는 비발디는 바이올린주자로서는 훌륭하나 작곡가로서는 별로다. 그러나 사제로서는 빵점이다 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지요). 다만 한 가지 문제는 자신이 가르친 아이들이기 때문에 연주기량을 잘 알고 있어서 그 수준에 맞는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악단의 수준에 맞도록 비슷한 유형과 수준의 작품을 많이 작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이 때문에 스트라빈스키에게 혹평을 듣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비발디의 음악들은 당시의 음악적 양식 아래에서는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음악은 어떤 상황에 필요한 음악들이 주로 만들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의 예배에 필요한 음악, 귀족의 오락과 여흥을 돕는 음악, 귀족이 여는 만찬에 분위기를 잡아주는 음악 등 어떤 일을 하는 데 분위기용 배경음악으로서 주로 작곡되었습니다. 하지만 비발디는 귀족이나 주교에 예속되지 않은 신분이었기 때문에 후원자들의 일상에 필요한 배경음악으로서의 음악보다는 성당이나 상인과 시민계급이 주로 찾는 공연장 같이 잘 만들어진 연주회장에서 공연되는 음악 중심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만의 악단을 가지고 있었고, 또 자유로운 신분이었기 때문에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이점에서 비발디는 매우 운이 좋은 음악가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베네치아의 분위기로 인해 음악적 분위기도 밝고 경쾌하며 현란한 리듬감을 바탕으로 칙칙하고 무겁지 않은 화려한 음색의 음악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비발디는 합주곡에서 음악사적 발전을 이루어냈는데 그것은 이전의 합주곡은 한 악기군과 다른 악기군, 즉 합주협주곡이었는데 비발디가 실험을 거쳐 점점 한 악기, 독주자와 여러 악기, 합주자들로 구성된 독주합주곡의 형태로 발전시켜갔습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낸 비발디의 명성은 전 유럽에서 매우 높았습니다. 그는 잘 훈련된 자신의 악단을 데리고 전 유럽을 순회하며 연주여행을 다녔습니다. 또 당시 오늘날의 악보 표기법을 개발한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의 출판사와 계약을 맺어 악보집을 출간하는 등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사실 출판사는 다른 작곡가(코렐리)와 계약하려 했으나 계약금이 너무 비싸 꿩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비발디와 계약했는데 대박이 난 거지요). 그럼에도 그의 말년은 평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베네치아를 떠나 오스트리아 빈에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모차르트처럼 서민이나 극빈자들이 묻히는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보장되어야 영원히 남을 예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비발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