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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 | 연재 [꿈꾸는 학교 행복한 교실]
스물여섯, 내 실패의 기록
노동주 교사(2014-02-05 10:38:34)

아홉 개의 그림자

 

첫 학급의 학생 수는 아홉이었다. 그 숫자가 주는 기대란 개별교육의 실현이나 가족 같은 분위기만은 아니었다. 편협한 심보지만 통제의 용이 그리고 어깨의 가벼움 같은 것도 끼어 있었다. 보통 한 학급을 구성하는 숫자와 비교하자면 좀 여유를 가져볼 법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교실 공간에서 학생과 교사가 쏟아 붓는 시간과 노력은 물리적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인구밀도 같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삼십이든 아홉이든 학생 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교실 속 책상 사이의 간격일 뿐, 마음속에서 내 아이들 아홉 명이 차지하는 면적은 잴 수 없을 만큼 컸다. 더구나 매일 마쳐야 할 수업의 분량과 빽빽하게 다음을 기다리는 행사 일정, 시험에 대한 압박 등으로 마음 한구석에 여유를 부릴만한 공간이 없었다. 한 아이의 그늘마다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아이들의 그늘은 생각보다 넓고 깊었다. 그들을 품기에는 내가 산처럼 크지 않았고 환하게 밝지도 못했던 것이다.

 


무관심의 평등

 

아홉 명 중 절반이 학습 부진아였다. 그중에 두 명은 특수 아동이었다. 성미와 요한은 통합교육 원칙에 따라 몇 개의 과목 시간에 특수교육지원반 선생님께 맡겨지고 나머지 시간은 반 아이들과 공부했다. 통합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수업은 재구성되어야 했고, 일곱 명의 또 다른 수준에 맞추느라 허덕거리는 날들이 늘어갔다.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과 특수아동 사이의 거리였다. 누구도 그 아이들과 같은 팀이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 누구도 그 아이들과 나란히 앉고 싶지 않다는 것.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적의를 노출하는데 두려움이 없었다. 싫증과 짜증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 솔직함이 너무 눈부셔 화를 참으며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다시 눈을 떠 정미와 요한의 표정을 바라보면 가슴 한쪽이 짠하다 결국 시렸다. 그 아이들과 함께 하는 팀을 위해 보상의 정도를 달리하거나 게임 안에서 차별을 두어야 했다. 갈등과 이해를 조정하는 것. 나는 그것을 정치라고 언젠가 가르쳤다. 그때 아이들 사이에서 내가 했던 것은 교육이었을까 정치였을까. 아이들에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협동과 연대의 기쁨을 안겨주는 대신 협상의 기술을 통해 순간순간을 넘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일에 지쳐갈 때 나는 이따금 아이들 모두에게 평등해졌다. 무관심의 평등이었다.

 


얼음 그리고 땡

 

아이들은 제 몸을 봄과 겨울처럼 바꾸며 뛰놀았다. 얼음 그리고 땡. 봄꽃을 찾는 나비처럼 날아오르던 아이들. 얼어붙은 강처럼 멈추어 서 있던 아이들. 그러나 늘 겨울인 아이가 있었다. , 봄이 왔다고 알리는 데도 늘 겨울인 아이. 누가 그토록 그 아이를 얼게 했을까. 햇살을 머금은 겨울 강처럼 맑게 빛났지만 끝내 속을 알 수 없던 아이는 정미였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때론 빙어낚시 같은 것이라고 그때 생각했다. 차가운 얼음장 밑에 팔딱거리는 숭어가 있고, 투명하게 속내를 드러내는 빙어 떼가 있지만 그 얼음장 밑을 보는 일이 아득했기 때문이다. 차갑게 얼어붙은 아이의 내면을 녹이는 것은 사랑이라고 믿었지만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빙판을 뚫는 것은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쇠로 만든 스크루 같은 것이니까. 그걸 깨닫고 난 뒤 빈손을 자주 쳐다봤다. 자책하다 결국 특수교육지원반 선생님께 정미를 떠넘기듯 부탁하며 하루하루를 견뎠다.

 


나의 빗금(/)

 

아이들은 이미 실패에 익숙했다. 그것을 실패라 부르는 일조차 부당한 일이지만 세상의 어법이 그랬다. 시험 성적 때문에 아이들의 어깨는 축 처지지 않았다. 그렁그렁 눈물도 고이지 않았다. “조금 짜증은 나는데 별로 신경 안 써요” 아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 무덤덤함에 마음이 깊게 가라앉았다. 혼자 열뜨며 살았구나, 누굴 위해 조바심치며 살았을까,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웠다. 그건 아이가 스스로 성적에 신경 쓰길 바라는 내 욕심과 세상이 빚어낸 환상이었으니까. 채점이 된 시험지를 보며 한 아이가 말을 걸어왔다. 빗물 사이에 웅덩이가 고여 있다고. 어디서 그런 농담을 배웠을까. 맞은 개수보다 틀린 개수가 많은 아이. 빗금(/)을 긋는 대신 세모를 그렸다면 어땠을까. 빗금(/)은 어느새 실패의 기호가 되고 말았다. 삼각형의 한 변도 저런 모양인데…. 부모와 교사가 나머지 두 변이 되어 그 아이의 중심을 잡아 줄 수 있었을 텐데.



실패의 트라이앵글

 

모든 게 실패의 기록이며 고민의 풍경이다. 서른에 보는 스물여섯의 그는 실패한 교사였다. 기억 속 쥐구멍에 숨어 있는 그를 세상 밖으로 보낸다. 야물지 못한 것. 완벽하지 못한 것. 빈틈이 많은 그에게 누군가는 돌을 던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다시 다독거린다. 트라이앵글의 울림이 아름다운 것은 한쪽 모서리가 비어있기 때문이란다. 서른의 그를, 그가 고민하며 살아온 날들의 두께를 믿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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