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2.6 | 연재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한국적인' 강박관념의 유령등
신귀백(2003-03-26 15:59:15)

눈덮인 조선의 들판을 기차를 타고 가보라. 머릿속은 백석이요, 눈은 이상범이다. 차창이 만든 프레임은 조선의 땅과 나무와 집들을 표현하는 데는 청전(靑田)의 준법(峻法)만한 것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 창 곁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은 김호석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인물들. 한국적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한국적”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미의식을 넘어 강박관념으로까지 노대가를 옥죄는 것일까?
취화선! 화가 장승업을 통해서 우리는 결국 장인 임권택의 예술세계를 본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영화의 뒷장면부터 이야기하자면, 임권택 그도 저 불가마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자신의 살아온 날들에 대한 부끄러움의 은유와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자기정리요 선포에 다름 아니다. 장승업도 임권택도 한 덩어리 주먹밥과 거친 잠자리를 위해 그림을 그리던, 한 달에 두 작품을 찍던, 그 대중들의 기호나 취향에 몸과 마음을 맡긴 것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먹가는 시간도 없이 아침의 죽과 저녁의 술을 위해 붓을 놀리던 환쟁이처럼 그도 우선 찍고 봤을 것이다. 박주와 산채라도 겨우 해결되자 천재에겐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 컴플렉스가 찾아온다. 필연이다. 칸느에 가고 작가소릴 들을수록 국적불명의 그것들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천재의 삶은 당연히 형사(形似)를 중시하던 화면에서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태도로 나아간다. 하여 지붕에 올라가 악을 쓰거나 물속에 뛰어드는(무리라 싶게 레토릭이 약한) 장면으로 장승업이 자기를 학대할 때, 임권택은 <만다라>의 무채색을 지나 <서편제>로 가고 있었을까.
속도감 있는 에피소드 속에서 갓 쓴 이들의 예술에 대한 한마디씩의 평가는 안타깝게도 마치 20자 영화평처럼 진행된다. 당연히 관객이 몰입할 틈은 적다. 정말, 풍자와 진지의 세계를 넘나드는, 사랑과 혁명을 꿈꾸는 고수끼리의 대화는 그게 아닌데 말이다. 한국영화 속에서 지식인들이 계몽주의자 아니면 시니컬한 아웃사이더의 독백으로 머문 것처럼 <취화선>의 겉도는 대화들도 거친 결을 남긴다. 정일성이 담은 화면이야 아름답지만 애국가 뮤직비디오 같은 삼천리 화려강산이 아닌 서늘한 느낌을 주는 4.3의 스산함까지 담아내는 강요배 그림같은 화면은 너무 큰 욕심인가?
거장 임권택은, “꽃이나 술에 묻히어 살던 도연명이 아니” 라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을까? 시대의 문화?역사?생활?미의식 등 담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기에 여기에 유령이 끼어든다. 소위 ‘역사의식’ 말이다. 농민전쟁의 병사들, 김옥균 등 모두 노대가를 둘러싸고 있는 <디 아더스>에서 나타난 유령들에 다름 아니다. <감각의 제국>에서 골목을 지나는 군화발소리 정도의 은유면 모두 눈치채는데 오뙤르 임(林)과 철학자 도올은 슬픈 근대사의 메시지에 너무 매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혀가는 전봉준의 눈빛은 쏘아보는 힘이 없고 어깨가 그렇게 허약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어느 나이에도 사랑은 새롭다. <춘향뎐> <취화선>을 보면서 70이 다 되어서도 항상 새로운 사랑에 목말라 하는, 길을 만드는 자의 고독과 그 낯섬이 보인다. 너무 낯섬만 이야기 했는데 어찌 국밥같은 따뜻함이 없었으랴. 매향과 오원이 늙어 다시 만나 발톱을 잘라주는 것, 발을 씻어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장면이 아니었을까. 어르신 그림자도 밟지 말랬는데, 색깔도 소리도 이젠 됐으니, 이런 따뜻함을 보고자 하는 간청인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