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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6 | 연재 [세대횡단 문화읽기]
외로움을 보석으로 빚어낸 소리꾼의 삶, 소리꾼의 길
소리꾼 조통달/박영순(2003-03-26 16:05:24)

이 시대 소리꾼에게는 예술가로서의 지난한 자기 극복이 이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업이자 미덕이다. 그만큼 소리 인생은 험난하고 거친 여정일 터이다.
때문에 소리꾼을 보는 우리의 시선은 그리 간단치 않다. 그들이 걸어온 피와 땀의 결정체가 저 무대 위에서 그렇게 빛나고 있으리라는 짐작, 그것은 차라리 소소한 감상일 것이다. 성대를 깎고 거칠게 만들어 자기 자신을, 자신의 몸을 의도적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과정은 예술가의 외로움과 고통, 그 이상의 표현 영역이다.
우리 시대 소리꾼 조통달·박영순씨가 만났다. 스승과 제자로, 그리고 이제 함께 후학을 길러내는 동시대의 소리꾼으로 그들이 서 있는 자리는 충분히 따뜻하고 진지했다.
홀로 무대에 올라 천 가지 얼굴과 만 가지의 소리를 구사하며 관객들을 울리고 웃기는 이들은 절차탁마의 고단한 수련을 통해 마침내 무대에 오를 수 있다.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그들의 연마와 외로움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이미 소리꾼의 삶이라며 기껍게 받아 안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 우리가 원하는, 우리가 믿는 진정한 소리꾼의 삶과 길이 있다.


조 : 우리 제자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가?
박 : 예. 선생님. 그동안 전화도 자주 못 드리고 죄송합니다.
조 : 바쁜줄 아는데 뭘...
박 : 아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더 죄송해지네요. 오늘 이런 자리가 마련된 덕분에 선생님과 좋은 이야기, 그동안 못 들은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조 : 예... 준비를 좀 많이 해와야 했는데, 그렇게 하질 못해서 좀 아쉽지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눠 봅시다.
박 : 예... 선생님은 그동안 지역에서보다는 서울에서 활동을 많이 해오셨는데요. 얼마전에 지방으로 내려와 지금 후학을 길러내는데 활동의 초점을 맞추고 계시잖아요. 저도 지금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입장인데, 서울에서 활동하고 계신 선생님들이 지역에 내려와 후배 양성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참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우선 선생님이 판소리에 처음 입문하게 된 동기가 궁금한데요. 어떻게 소리를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조 : 한꺼번에 많은 이야기를 해야 될 부분이라 정신이 없네요. 처음에 입문하게 된 것은 친 이모님이 국창 박초월 선생님이라 결국 그 분의 영향으로 시작했다고 봐야죠. 내 어머니가 이모님하고 같이 사셨던 터라, 뱃속에서부터 소리를 듣고 자랐으니까요. 그 당시에는 학원을 운영하는 게 아니라,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쳤거든요. 그러면서 아기때부터 소리를 자연스레 들었고, 말문이 열리면서 흥얼흥얼 여러가지 소리를 하게 된 거죠. 처음엔 너무 어린애가 소리를 하니까 귀여워 하다가, 나이가 조금 더 먹으니까 우리 이모님이 그걸 싫어하시는 거에요. 심지어는 몽둥이로 때리고, 칼을 갖다 놓고 너 이거 하면 너 죽고 나 죽자 하실 정도 였어요. 옛날엔 천대받았고, 너무 힘든 일이었으니까. 당신도 좋아서는 했지만,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 내 자식에게는 전철을 밟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 마침 그 동네에 거문고 명인 신쾌동 선생이 사셨는데, 그 분이 우리 이모님한테 암만해도 이 아이가 끼가 있는 것 같으니 한 번 시켜보라고 그러셨대요. 결국 여러 사람들이 그런 얘길 하니까 한번 가르쳐볼까 생각을 바꾸신거지. 본격적으로 여섯 살때부터 소리를 배우게 된 거죠.
그러니까 소리를 해 온 지가 올해로 52년이 된 셈이네요. 중간에 남자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다고 해서 보성에 계신 정응민 선생을 찾아가 배우고, 또 돌아가신 임방울 선생께 수궁가와 춘향가를 좀 배웠어요. 그렇게 해서 오늘까지 온 거죠.
박 : 저도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시작한지가 15년 정도 된 것 같아요.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시작을 했으니까요.
조 : 벌써 그렇게 됐나?
박 : 예. 저는 이제 15년이 됐지만, 선생님은 52년동안 그야말로 외길을 걸어오신 건데요. 저도 나름대로 이 길을 걸어오면서 만족스럽기도 했지만 힘든 점이 참 많았거든요. 선생님도 52년동안 평탄한 길만을 걸어오신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있으셨을 것 같아요.
조 : 50년이 넘었으니까 강산이 벌써 다섯 번 변한 셈이네요. 짧은 시기가 아니었던 만큼, 제자님께서 말했듯이 좋은 점도 많았지요. 하지만 예술가들은 상당히 외로워요. 무대에서 화려하게 공연할 땐 박수와 환영을 받지만, 무대에서 내려와 분장 지우고 의상 갈아입고 나면 참 허전하거든요. 물론 좋은 점 나쁜 점이 있더라도 내가 좋으니까 여기까지 오게 됐는데, 힘들었던 점은 한두가지가 아니었죠. 나 같은 경우는 남자니까 한 때 변성기가 있었어요. 아기명창으로 조통달 조통달 한창 이름을 알리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턱에 수염이 나기 시작하면서 목소리가 가라앉는 거에요. 그러면서 내 성음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좌절했는지 몰라. 서울에서 살 때니까, 북악산에 매일같이 올라가 공부를 했는데, 목이 너무 안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어느날은 높은 소나무에 올라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으려고도 했어요. 결국은 떨어졌는데 낭떠러지로 떨어진 게 아니라, 나뭇가지에 걸려서 대롱대롱 매달려 옷 다 찢기고 멍투성이가 되기도 했어요. 이게 한 두 번이 아니었고, 한 번은 목에 칼을 들이댄 적도 있었거든. 판소리는 조통달의 제2의 생명이라는 생각을 열 두어살때부터 하고 살았어요. 제 3의 생명은 부모와 처자식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거지. 그런데 이 제2의 생명인 목소리가 안 나오는데, 어떡합니까? 죽어야지. 죽으려고 별 짓을 다 했는데, 그 얘기를 어떻게 다 하겠어요.
박 : 변성기 때문에 많이 힘 드셨던 것 같은데요. 원래 옛날에는 남자 명창들이 더 많았잖아요.
조 : 더 많은 정도가 아니라, 원래는 여류명창이라는 게 없었거든. 박유전이나 신재효 시절에 진채선 명창을 발굴해서 갓을 씌워 남장을 해 대원군 앞에 소리를 하게 했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진채선이 대원군 눈에 들어 나중에 후처가 되고 이름을 날린 거죠. 그때부터 여류명창이 죽 등장하게 된 겁니다. 지금은 남자보다 여류명창이 더 많아요. 지금은 세월이 좋아진데다 소리하기는 좀 힘들고 하니까 판소리에 소질 있던 애들도 다 사물놀이로 돌아서요. 참 안타까운 일이죠.
박 : 예. 최초의 여류명창이 진채선이었죠. 제가 오페라 <진채선>에서 진채선 역을 맡았었잖아요. (웃음) <그리운 논개>에서 논개 역도 맡았었구요.
조 : 음 그랬지. 참 잘 했어요. 연기라는 것은 한도 끝도 없고 판소리도 그래요. 계속해서 늙어 죽을 때까지 연마해야 되거든. 조금 한다고 해서 쉬고 그러면 안되죠.
박 : 예. 지금은 더 힘들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예전엔 소리에 대해서 깊이 있게 모르고 그래서 더 겁없이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조금은 가는 길을 알게 되니까, 무대에서 10분만 소리하려고 해도 겁이 나요.
조 : 그게 관록도 생기면서 선생의 전철을 밟는 거거든. 어릴 때에는 왜 소리를 안 시켜주나 그랬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게 힘들고 겁이 나지. 왜냐면 잘 한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아주 잘 해야 되거든. 그런데 조금만 못하면 크게 확대돼서 소문이 나는 거야. 세상이 참 어려운 세상이지. 그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잘 해야겠다는 생각에 조금 신경을 더 쓰게 된다는 거야. 판소리, 이 성악이라는 건 목을 풀어봐서 잘 되면 내 맘대로 잘 '앵긴다(안긴다)'고 하잖아? 그렇지 않으면 내 맘대로 목을 쓸 수가 없거든. 그 때는 좀 조심스럽고 신경이 많이 쓰이지. 소리라는 것은 그래서 참 어렵고 분위기를 잘 타는 특성이 있어요. 청중들이 얼씨구 잘 헌다 하면 신바람이 나는데, 앉아서 시큰둥해 있으면 소리를 하다가도 정신이 하나도 없거든. 그러니 청중들이 성의 없이 들으면, 하는 사람도 자연스레 좀 재미없는 소리를 하게 되지. 반대로 청중들 호응이 좋으면 좀 힘든 소리, 어려운 소리를 할 수가 있게 되고.
박 : 판소리는 누가 뭐래도 종합예술이잖아요. 혼자서 몇 사람의 역할을 소화해 내면서 소리로써 웃기고 울리고 희노애락을 다 표현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가장 힘든 음악이면서 아름다운 음악인 것 같아요. 선생님은 판소리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꾸준히 창극 활동을 해오셨잖아요. 지금 전라북도에도 관립단체가 적지 않은 편인데요. 그 단체들이 다들 창극을 하거든요. 창극이라면 소리만이 아니라 연기도 잘 해야 되잖아요. 극적으로 잘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관객들에게 전달이 되니까요. 아니리가 연극적인 요소에 굉장히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조 : 그렇죠. 판소리는 그야말로 종합예술이에요. 서사시적인 면, 소설적인 면, 희극적인 면이 다양하게 배치돼 있거든요. 많이 연마를 해서 판소리에 적합한 득음을 해야 하고, 세상에서 나는 모든 소리를 이 입으로 다 내야 되거든요. 그래서 판소리가 어려운 거고, 그것을 얻을 때 비로소 명창이 되는 겁니다.
박 : 예. 그런데 창극은 소리만 가지고 될 수 있는게 아니더라고요. 연기력도 다방면으로 필요한 부분이니까요.
조 : 백번 옳은 말이에요. 옛날에 임방울 선생하고 김연수 선생이 싸운 얘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내가 볼 땐 두 분 다 옳은 얘기에요. 김연수 선생은 창극을 만들어서 주목을 좀 끌어내자 했고, 임방울 선생은 창극을 하면 목을 다 버린다고 주장을 했거든요. 창극을 하게 되면 성음 자체를 깎고 눌러 쓰게 되니까 말이죠. 결국 판소리는 판소리대로, 창극은 창극대로 나가야 된다 해서 싸우게 된 겁니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두 가지 다 중요한 부분이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박 : 저는 판소리가 우선이라는 생각엔 변함 없습니다. 소리는 전문인들이 갈고 닦아 연마한 기술이지만,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악은 아니잖아요. 우리 음악이고 우리 것인데도 어릴 때부터 서양음악만을 접하게 되니까 우리 음악이어도 일반인들에게 어필이 되질 않아요. 창극은 연기를 하면서 극으로 보여주니까, 혼자서 소리를 하는 것 보다는 대중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조 : 맞는 얘기에요. 혼자 하는 판소리도 극적인 요소가 없으면 생명력이 없는 겁니다. 표정연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거죠. 판소리를 잘 할수록 소리는 물론이고 발림이나 너름새가 확실해야 하고, 소리꾼과 고수, 청중과 합치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법입니다. 노래만 잘 하면 인정받기 힘들어요. 감정이 없는 예술은 결코 살아 있는 예술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음악이 서양과 다른 점은 바로 한의 예술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음악은 호흡이거든요. 반대로 서양음악은 박동, 비트의 음악이고. 감정이 더욱더 필요하다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판소리는 더 고소한 맛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마음의 한을 청중들의 심금을 울리며 호소력 있게 전달해야 그게 살아있는 예술이죠.
박 : 창극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씀인데요. 일본은 가부끼, 서양은 오페라, 중국은 경극, 우리는 창극이 비슷한 장르잖아요. 서양 오페라는 많이 활성화돼서 그 나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참 가까운 예술 장르인데, 창극은 우리 음악인데도 여전히 잘 모르는 분야고, 대중화가 잘 안되어 있다는 생각이에요. 창극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해외에까지 나가 많이 선보이고 세계화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조 : 좋은 이야기에요. 그게 우리 모두의 바람이고 그렇게 돼야죠. 오히려 외국이 우리 판소리를 더 많이 알고 소중히 해요. 이번 프랑스 문화축제에 내가 뽑혀서 10월에 완창을 두 번 하고 올 예정입니다. 88 올림픽 이후에 나하고 안숙선 씨가 유럽의 7개국을 돌아다니면서 판소리 완창발표를 했거든. 내 생각에는 그 유럽공연이 성공리에 끝나서 이번 프랑스 문화축제에도 또 다시 초청될 수 있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이런 성과들이 참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박 : 판소리 완창뿐만 아니라, 창극도 해외에서 더욱더 빛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조 : 그래요. 우리 국민들이 우리 음악을 보는 눈과 외국인이 보는 눈이 많이 달라요. 오히려 국내 공연 할 때는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뜨는데, 외국인들은 끝나고 나서도 기립박수 치고 공연 이후에도 싸인 받고 그러거든. 그것만으로도 공연 예술을 관람하는 메너가 많이 다르다는 거에요. 지금 외국의 석학이나 교수들이 우리나라 판소리나 예술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있거든. 이 교수들한테 배운 제자들이 한국에 나와서 우리음악이나 예술에 대해 한국 사람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좀 두렵고 걱정이에요. 지금 외국인들이 오히려 우리것을 파고들고 있고, 바야흐로 21세기는 세계 문화의 전장입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들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우리것에 대해 너무 등한시하고 남의 나라 문화만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때문이라고 봐요. 앞으로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것 뿐이에요. 그러려면 영순이처럼 제자들을 많이 길러내고 가르치는 젊은이들이 많아져야지. 여태까지는 앞에서 선생이 씨앗을 뿌리고 왔으니까, 이제 영순이 세대들이 그 열매를 잘 따먹어야 돼.
박 : 예... 알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지금 조기교육이 전혀 안 돼 있기 때문에 판소리 대중화가 무척 어렵지 않나 싶어요. 초중고부터 정규 과목으로 판소리나 국악을 가르칠 수가 없는 형편이고 그러다 보니 배울 기회도 없는 거죠. 왜냐면 우리나라 음악 교과서가 대부분 서양음악만 있고, 교사들 역시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에 우리 음악을 가르치고 싶어도 가르칠 수가 없는 거에요. 제 생각엔 국악을 전공한 많은 선생님들이 각 초중고교에 배치돼서 전문적으로 그 수업을 해야 우리 음악이 어릴 때부터 탄탄하게 쌓여지고, 나이가 들어도 거부 반응 없이 가까워질 수 있다고 봐요. 우리 국악은 나이든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니까요. 음악 선생님들마저도 우리 5음계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 상황이잖아요. 제대로 된 교육이 실시돼야 국악의 대중화가 빨리 올 수 있다고 봐요. 선생님도 국악 대중화에 애써 오신 걸로 아는데, 얼마전까지 전주 MBC <얼쑤! 우리가락> 사회를 맡아오셨잖아요? 그런 작업도 대중화의 일환이라고 보거든요. 일반인들이 쉽게 따라 배울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준 것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조 : 좋은 얘기를 해줬는데요. 국악 대중화는 아주 시급한 문제에요. 내가 유태평양을 가르쳤잖아요. 그 아이가 그렇게 영특해서 크게 될 줄은 몰랐죠. 오히려 조통달은 잘 몰라도 유태평양은 세계적인 인물이 됐거든? 외국 공황을 가니까 그렇게 환대를 해 주더라고. 이런 모습을 볼 때 상당히 기뻤습니다. IMF 왔을 때도 태평양이가 뜨니까 국악학원 안 된다는 얘기는 안 나왔거든요. 어쨌든 국악의 조기교육 붐이 일어난 거죠. 얼마전만 해도 0.3%만이 학교에서 국악을 가르친다고 나왔더라고. 이거 정말 남부끄러운 얘깁니다. 이런 나라가 세계 각국을 아무리 뒤져봐도 없어요. 정말로 통탄할 일이고 우리 선조들이 벌떡 일어설 일 아닙니까? 옛부터 그 나라의 음악을 보면 그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다고 했어요. 우리나라 음악은 멀리 해버리고, 서양음악은 덮어놓고 우대하고 말이죠. 소리축제 때도 외국 공연자들은 수억원이 아깝지 않게 퍼부으면서도 국악 하는 사람들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홀대를 하는 판이니... 이런 인식부터 개선이 돼야죠.
박 : 예. 맞는 말씀입니다. 선생님께서 요즘 젊은 국악인들에게 평상시 느낀 점이나 바라는 점이 있으시면 이번 기회에 한 말씀 조언해 주시죠.
조 : 예... 요즘 학생들 재주꾼들도 많고 열심히 하는 학생도 있어요. 지금 세상은 스피드 시대에요. 내가 왜 고향으로 내려온 줄 압니까? 옛날엔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했지만, 요즘은 그거 틀린 말이에요. 어떻게 하다보니까 내가 고향에 내려온 선구자처럼 그렇게 알려져 있는데, 서울 부산마저도 이제 하루 권역이잖아요. 이제 소리하는 예술가들도 서울로 어디로 쫓아다닐게 아니라, 나를 찾아오게끔 해야 한다는 거죠. 그만큼 앉아서도 예우를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겁니다. 굳이 서울로 올라갈 필요 없이, 고향 지키고 후학을 기르면서 그렇게 활동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앞선 선생들이 뿌려놓은 씨앗을 열매로 따 먹더라도 무턱대고 그러라는게 아니라, 연구하면서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무엇보다 실기와 이론을 제대로 겸비해야 하는 거에요. 그래야 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다고 봐요.
박 : 선생님께 공부를 죽 배워오면서 저 역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는 입장이 됐거든요.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이제야 선생님들이 속 타고 힘들어하신 부분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겠더라구요.
조 : 음... 이제야 철이 드는구만. (웃음)
박 : 예. 이번엔 조금 다른 얘긴데요. 이번 소리축제는 전과는 다르게 소리, 목소리를 타이틀로 정한다고 해요. 우리 판소리가 중심이 된다는 거죠. 선생님께서는 개인적으로 소리축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조 : 소리축제 하면 물론 여러 가지 소리의 종류가 있겠죠. 나는 처음엔 소리축제라 해서, 판소리 축제인 줄 알고 기대가 많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또 그것도 아니더라고. 우리나라 음악이 주가 되고, 남의 나라 음악은 당연히 객이 돼야 하죠. 그래야 오히려 외국 사람들한테 주목받을 수 있어요. 앞에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외국인 연주자들에게 수 억원씩 퍼주면 받을 땐 "땡큐"하겠죠. 하지만 뒤돌아 서서는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오히려 우리를 더 깎아내리고 비웃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많이 자리가 잡힌 것 같아요. 어쨌든 누가 뭐래도 판소리는 우리나라 음악의 꽃이자 대표인 겁니다.
박 : 젊은 소리꾼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현존해 있는 판소리 5바탕 이외에 이 시대에 맞게 재창조되어 나오는 창작 판소리가 많아져야 한다고 봐요. 시대 감각에 맞고 쉽게 이해되는 판소리 창작 작업 말이죠.
조 : 그래요. 나도 예전부터 그 점에 대해서 고민도 많았고 생각해 왔던 부분이기도 해요. 나도 죽기 전에 몇 바탕 만들어 보려고 마음먹고 있어요. 젊은 사람들도 여러 창작 작업을 시도해 봐야 하겠지만, 원래의 곡은 건드리면 안돼요. 내 자리 고집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면서 그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야 하고요.
박 : 예... 선생님 지금까지는 국악에 대한 일반의 이해가 부족하고 관심이 적은 풍토를 아쉬워하면서 이런 저런 말씀을 나눠봤는데요. 반면에 우리 국악인들이 스스로 또 반성해야 할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대사습대회도 전국적으로 대통령상이 많아지다 보니까 그 권위가 예전 같지 않거든요. 여러 가지 비판도 많이 받고 있구요.
조 : 전주 대사습놀이는 그야말로 전통과 권위를 이어온 대회임에는 틀림없어요. 그런데 이런저런 대통령상들이 많아지고, 거기에 계보 문제도 걸려 있어서 개선해야 할 부분이 없지 않은게 사실이죠.
박 : 계보로 인한 폐해도 있지만, 지금 대통령상이 너무 흔해졌거든요. 제가 알고 있는 것만도 열 서너가지가 돼요. 제 생각으로는 권위 있는 대회 1~2개 정도로 축소시켜서 그야말로 희소성과 가치를 높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젊은 세대 중에서도 잘 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세대 교체가 이뤄져서 대통령상 수상자들의 연령층이 많이 낮아졌거든요.
조 : 그렇죠. 권위있는 상이 남발되면 그 권위와 가치를 잃게 마련이죠. 어찌보면 예술인에겐 좋은 기회가 많으니 좋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염려되는 부분은 상을 한번 타면 뭔가를 다 이룬 것처럼 오해를 할 수 있다는 거에요. 겸손하고 꾸준하게 자기 연마를 해야 하는데, 국악계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경계해야 할 일인 것 같아요.
박 : 예... 정말로 가치있는 등용문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저도 좋은 상도 타고 많은 사람들에게 검증받고 싶지만 몇 년 더 열심히 해서 어느정도 스스로 만족스럽다고 느낄 때 그 때 대회에 나가고 싶어요.
조 : 그래요. 우리 제자님은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보고. 어느 대회든 공정한 심사도 필요한 법이에요. 나도 여러 군데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봤지만, 주최측의 사정이나 여러 여건 때문에 뭔가 좀 잘 못 돼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우리 심사위원들도 반성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박 : 예.. 여러 아쉬운 부분들이 제대로 개선되고, 저 역시 열심히 노력해 제가 도전하기 전까지 어떤 상이든 그 때까지 가치 있는 상으로 남아 줬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보람이 클 것 같구요. 저는 젊은 소리꾼으로서 판소리 다섯바탕 이외에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작창도 하고 싶고, 그럼으로써 이 시대에 맞는 진정한 소리꾼이 되고 싶어요. 또 소리가 대중화되면서 저 역시 일반인들이 쉽게 찾고 다가서는 그런 국악인이 되고 싶습니다. 선생님 계획은 어떠세요?
조 : 그래요. 충분히 해 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나는 지금까지 자청해서 내 소리를 CD로 담아낸 적이 없는데,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그동안 해 왔던 내 소리를 CD로 내볼까 하는 계획을 갖고 있어요.
박 : 예... 선생님 오늘 말씀 너무 고맙습니다. 선생님 뜻 이어서 열심히 하는 소리꾼 될께요.
조 : 그래요, 제자님... 만나서 반가웠고, 앞으로 연락 자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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