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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6 | 연재 [82회백제기행]
제 82회 백제기행 - 거제도편걸음마다 변화하는 세계, 빛이 쏟아지는 여행
고영희 운암중학교 교사(2003-03-26 16:07:40)

빛이 제법 산하에 가득하다. 거제도로 향하는 길은 멀기만 한데, 소태정 고개를 오르는 길은 연분홍 산벚으로 뒤덮여 있고, 길가의 자운영, 보리밭, 철쭉들이 색상표에도 없는 연한 파스텔 색감으로 4월의 풍경을 수놓고 있다. 문화저널에서 주최하는 백제기행에 참여한지 어느새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버스 안에서 자기 소개하는 시간에 낯익은 얼굴들이 제법 보여 정겨움과 반가움을 느낄 수 있다.
섬을 이어 육지로의 역할을 묵묵히 잘 해낸 거제의 수문장 거제대교를 건너, 드디어 거제도에 도착했다. 멀리 보이는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은 저 현상계를 감싸는 절대자의 미소같은 안개에 쌓여있고, 바닷가에는 갈매기만 한가로이 날아다니고 있다.
거제도 해안도로를 따라 어렵게 찾아간 숙소의 이름은 여장군 횟집이었다. 2002년이 아니라 마치 60년대를 연상하게 하는 분위기였지만 바다가 가까이 있다. 저녁식사 후 우리의 첫 목적지인 거제박물관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바닷가 조그만 해변에서 삼삼오오로 거닐며 잠시 밤바다의 낭만을 즐겨본다.
언덕 위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박물관은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카사비앙카라는 노래를 연상하게 했다. 아직도 소년처럼 해맑은 웃음을 지닌 황수원 박물관장님의 안내로 자유로이 박물관 안을 둘러본다. 1층은 생존해 있는 북한 작가들의 작품을 기획. 전시해 놓았고, 2층은 우리 조상들이 생활 속에서 사용했던 생활용품들을, 3층은 고분을 재현해놓거나 도자기들을 진열해놓았다. 이 거제박물관은 거제의 역사와 문화를 수집, 정리, 연구하고 전시하여 보여주고 또 이를 잘 보존하여 후세에 넘겨주는 기능을 매우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2층의 조그만 강의실에서 황 관장님이 거제도 지도를 보여주시며 섬의 모형이 날개를 편 독수리를 닮아 보이지 않느냐고 반문하신다. 준비해오신 자료 중 슬라이드가 작동이 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지만 내일을 기약해본다.
잠시 거제의 역사를 살펴보자.
거제라는 이름은 1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많을(鉅)거와 건널(濟)제 라고 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옥포대첩을 이루었고 6..25동란 때에는 피난민의 구호와 포로수용으로 100만 명을 구제함으로써 입증되었으니 거제는 이름 그대로 구제와 은혜의 고장이라 할 수 있으리라. 길가에 구르는 한 개의 작은 돌멩이에도 역사의 숨결은 흐르고, 역사의 나이테를 더듬을 수 있다고 했을 때, 하물며 수쳔 년의 격한 세월 속에서도 잊혀지지 않고 내려오는 한 고장의 지명이 주는 의미는 결코 심상 치 않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숙소로 돌아와 어설픈 잠을 청해보았으나, 철썩이는 파도는 나를 그대로 잠들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희뿌연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새벽에, 물이 빠져 고운 모래가 드러나는 인적 없는 바닷가 백사장을 갈매기와 함께 한가로이 걸어본다. 어느새 백제기행의 귀염둥이가 된 나의 아들 상민이는 또래 친구와 함께 백사장에서 언제 허물어질지도 모르는 모래성을 열심히 쌓고 또 쌓고 있다.
아침식사 후 다시 황 박물관장님의 안내로 거제도 답사에 나섰다. 먼저 들른 곳이 옥포대첩비 공원이다. 정상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양쪽에 오르내리는 계단이 좌우 대칭이고 중앙의 기념비는 돛의 모양을 하고 있어 전제적으로는 배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박물관장님이 설명해 주신다.
1592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최초의 전투이자 첫 승전을 한곳이 바로 이곳인데 지금은 대우조선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 당시를 회상해본다. 이 잔잔한 바다가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역사를 보여주고 위상을 지켜주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롭다.
박물관장님이 거제의 지명설화( 장수바위, 상사바위등)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주시는 가운데 버스는 계속 다음 목적지인 용소마을로 이어져 있는 해안도로를 달린다.
굽이굽이 돌 때마다 다도해의 멋진 정경을 볼 수 있어 와! 하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길게 이어진 해안선을 따라 달리던 버스는 어느새 내륙으로 들어선다. 거제도의 주산인 계룡산을 배경으로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펼쳐진다. 버스를 내려 옥산금성으로 향했다. 상당히 가파른 길을 등산을 하는 마음으로 올라갔다. 이 산은 성안에 있는 물이 수정같이 맑다고 하여 수정봉이라 부르는데, 신비스럽게도 지금도 이 성안의 우물에는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성은 거의 허물어져 있지만 산 정상에 자그맣고 운치 있는 정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쑥향기를 머금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주는 가운데 우리들은 박목월 시인의 「윤사월」을 읊으며 송홧가루 냄새를 귀로 듣는다. 내려가는 길목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삐비를 뽑아 껍질을 벗겨 씹어본다. 모두 어린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향수를 먹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산을 내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가까이 다가가니 버스 옆에 붙어있는 granbird라는 글귀가 새삼 눈에 들어온다. 항상 백제기행때마다 우리와 함께 하는 한솔여행의 버스로 몇년째 동고동락을 같이 하는 우리의 다정한 버스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기성관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온통 민들레 밭이다. 민들레 꽃밭 속에 고풍스런 자태로 기성관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거제면 동상리에 위치한 기성관은 객사(영빈관)로 사용하던 곳이다. 이 건물의 특징은 우아한 고전미를 간직한 층단식이며, 화려한 남아식 불화단청이 돋보인다. 천천히 살펴보면서 못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지은 우리의 조상들의 뛰어난 건축솜씨에 감탄을 하면서 정성과 멋스러움을 다시 한 번 자랑스럽게 생각해본다. 지붕기와의 곡선과 한복소매의 끝, 살포시 들어올린 버선코 끝선의 아름다움과의 일치감을 느껴본다.
기성관 바로 앞에는 거제동헌(東軒)이 있다. 이곳은 지금의 행정 사무실 또는 도서관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곳의 정원은 우리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양식 - 주변의 경치와 연결시켜서 단순하면서도 연속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한 - 이다.
이곳을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각산정'은 바다가 가까이 보이는 곳에 잘 차려놓은 밥상이다. 이곳에서 바다와 마주하고 맛보는 바다 내음 가득한 매운탕의 맛을 그 무엇에 비할 수 있겠는가!
다시 차를 타고 거제 자연 예술랜드로 향했다. 7만 5천여 평의 부지에 펼쳐진 난(蘭) 상설전시장, 난 배양 온실 등이 잘 갖추어져 있는 곳이다. 그 가운데에 자리잡은 조그만 분수는 동전을 던지면 다시 올 수 있다는 로마의 트래비 분수를 연상하게 한다. 나 또한 작은 동전 하나에 그 소원을 담아 던져본다.
이 난(蘭)공원 설립자이신 능곡 이성보 선생은 수필가이시다. 능곡 선생은 우리들에게 이곳을 설립하기까지의 눈물겹고 어려웠던 지난 일을 진솔하게 이야기 해주시는데, 바로 그런 정성과 애정 어린 고집, 집념으로 이곳을 세우셨단다. 나는 그분의 투박하고 거친 손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세월과 피땀을 쏟아 부었는가를 가늠해본다. 능곡 선생은 우리가 보다 잘 사는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남에 대한 배려"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이제는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렸다고 씁쓸하게 웃으신다.
다음은 이번 거제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거제도 포로 수용소 유적관이다.
이곳은 우리 겨레의 한이 서린 곳,- 이념의 허울로 유린당한 민족의 처참한 울분, 처절함이 머물고 간 자리- 바로 그곳이다. 전시실에는 그 당시 포로수용소의 모든 것이 50여 년 전의 그때 그 상황을 말없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유적관 바로 옆에는 그때의 폭동을 주동했던 수용소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곳이 있는데, 철조망에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철망 너머로 말 혹은 물품을 교환치 말 것"
친공과 반공으로 나누어진 그때의 상황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데,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곳에서 부산 국제 영화제 개막작품인 "흑수선" 촬영장소로 사용되었다 하니 역시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나보다.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아이구 다리야! 다리가 몹시 아프다. 하지만 여행은 힘과 사랑을 우리에게 돌려준다. 어디든 갈곳이 없다면 마음의 길을 따라 여행해보라. 그 길은 빛이 쏟아지는 통로처럼 걸음마다 변화하는 세계다. 그곳을 여행할 때 그대와 나는 변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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