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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6 | 연재 [삶이담긴 옷이야기]
억척스런 한국 여인의 상징, 몸뻬
최미현 패션 디자이너(2003-03-26 16:11:11)

고관 부인들의 옷 로비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을 때, 활빈당인가 하는 단체에서 국무총리실로 몸뻬 여덟 벌을 보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연정희 씨가 몸뻬입고 차라리 산에 들어가 살고싶다는 처절한 말을 남기기도 했었다.
또 누군가 인천 구치소를 방문하여 때밀이 수건 열두 장과 몸뻬 한 벌을 수감 중이던 임창렬 경기 도지사 부인인 주혜란 씨에게 전해 달라고 한 일도 있었다.
왜 하필 몸뻬였는가를 놓고 말이 많았지만 열심히 일하고 살라는 뜻이었을 것 같다.
몸뻬는 일본에서 여성들이 논밭에서 일할 때 치마 위에 겹쳐 입는 작업복으로 우리나라 고쟁이와 비슷하나 밑이 트이지 않았고 허리와 발목을 단추로 잠그게 되어있다.
패전을 앞둔 1940년대 일제는 전시체제를 표방하며 한국 여인들에게도 몸뻬 입기를 강요하였다.
남편 바지를 개조하거나 그것도 없으면 시어머니 고쟁이를 밑을 꿰매어 입도록 하였는데 속옷 같은 바지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 여인들의 수치심을 자극하여 우리 여성들의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는 몸뻬를 입지 않으면 관공서 출입을 금하고, 공공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며 쌀 배급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또 여학생들에게도 몸뻬 입기를 강요하고, 교복도 전쟁수행의 노력동원에 적합한 형태로 개조하도록 했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몸뻬가 웃긴다`라는 제목 하에 마치 류머티스에 걸린 펭귄 같은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난다고 썼다.
멋이 있는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몸뻬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허리와 발목에 고무줄을 넣어 입고 벗기 편하고 발목에 먼지가 들어가는 것을 막아준다. 또 허리에 여분이 많아서 앉아서 일해도 편하고 몸에 감기지 않으며 값이 싸고 세탁하기 편하고 겨울에는 솜을 두어 입기도 한다.
몸뻬는 그야말로 한국 근대사를 말해주는 옷이기도 하다.
일본 패전 후 사라졌던 몸뻬가 한국전이 발발하면서 고달픈 생계전선에 뛰어든 여인들의 옷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가장을 잃고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시절 이었고 전투와 같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복 겸 일상 복으로 자리잡았다.
전통사회에서 여성의 바지는 오직 치마 속에 속옷으로만 입혀졌었다. 서양 역시 1차 세계대전으로 여성복이 남성복 화되면서 여성들이 바지를 입기 시작했고 우리나라 여인들의 최초의 바지라고 할 수 있는 몸뻬 역시 대동아 전쟁과 한국전을 계기로 널리 입게 되었다.
전쟁은 전통적인 성 역할을 바뀌어 여성들도 노동의 현장에 뛰어들도록 했다.
서양 여성의 바지가 남성복에서 빌려 온 것이라면 우리나라의 몸뻬는 형태상 속옷이 겉옷 화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면서도 그루터기 같이 묵묵히 힘든 생활을 버텨 가던 여인들에게 멋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변화 많은 시기에 자신의 고단함을 딛고 더 나은 날을 위하여 끊임없이 일했던 우리 어머니
들이 이룩한 것들이야말로 평범한 인간의 힘과 의지력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이 땅의 모든 어머님 누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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