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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2 | 연재 [사람과사람]
민족의 아픔을 닦아 낸 우리 시대의 의인
故 은명기 목사를 추모하며
고민영 전주임마누엘교회 목사(2004-02-12 14:20:36)

12월호를 기획하던 지난 10월 중순 문화저널로 은명기 목사님의 투병소식이 전해졌다. 문화저널 편집위원회는 그분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서둘러 목사님을 ‘이 사람의 세상살이’ 에 모시기로 결정하고 필자를 선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채 필자가 결정되기도 전인 11월 8일 목사님의 소천(召天) 소식이 전해졌다. 평생을 한결같이 살아오신 이 시대 또 한 분의 의인이 조용히 생애를 마감하셨던 것이다. 문화저널은 서둘러 가신 고 은명기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목사님의 생애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임마누엘 교회 고민영 목사님의 글로 고인의 경건한 삶을 돌아보았다.

1996년 11월 8일 낮 2시 40분에 소천(召天) 하신 진묵(眞黙) 은명기 목사님은 청렴 결백하고 강직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사역(使役)에 모범을 보여 준 우리 시대의 의인이었다. 1921년 1월 9일 전북 고부에서 태어나 45년 동안 교회와 사회에 일관된 일꾼으로 헌신하셨다.
그의 어린 시절은 신동(神童) 이라고 불릴 정도로 영특하고 착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사색하기를 좋아하여 돌아가시는 날까지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 속에서 살아 오셨음을 나는 보았다. 그의 사색은 언제나 사람의 실존문제와 인간의 고통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강원도 깊은 산 속에서 헤매기도 하였고 종교의 힘을 간구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특히 민족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늘 깊이 사색하고 결단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목사님은 소학교 시절에 일본인 교장을 질타하기도 하고 흑판에 “대한민국 만세”를 쓰기도 하여 학교 안에서 큰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었다고 생전에 회고하였다. 어러한 삶, 곧 민생의 삶과 죽임 그리고 고통에서의 해방을 찾기 위해서 목사님은 여러 가지 사색과 종교를 갖기도 했지만 삶의 길은 곧 신앙 속에 있음을 까닫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암송할 뿐만 아니라 깊은 명상으로 생활해 왔다.
은 목사님은 8·15 해방 전후에 죽을 고비를 넘겼고 해방이 되자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 에 입학하여 신학의 길과 교회 사역의 길에 들어섰다. 이 때에 그는 김재준 목사님을 스승으로 만난다. 김재준 목사와의 만남을 통해 삶과 죽음, 고통, 신앙, 신학에 대한 그의 사색은 더욱 깊어졌다. 이곳에서 그는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이 신앙에 있음을 깨닫고 더욱 신앙 생활에 깊이 들어갔다.
신학교 졸업 후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목사 안수를 받고 선생이 첫 번째 목회활동을 시작한 곳은 전주 서신교회였다. 그는 당시 낙후된 서신땅 자리잡고 가난한 민초(民草) 들과 더불어 살면서 철저하게 신앙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한 삶을 다라 살아가려고 부단히 몸부림치셨다. 병들고 찌들은 사람이라 해도 모든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음 그리고 성별의 차이 없이 다 하나님의 형상(形象) 과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알고 사람을 깉이 사랑하면서 옷과 먹을 것을 저들에게 아낌없이 주었고 이 생활은 별세하실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생활 속에서 어른을 공경하고 젊은이를 사랑하여 깍듯이 지킨 예의범절은 각별하여, 그는 ‘선비목사’ 로 불리우기도 했다.
이러한 생활과 정신은 물론 그의 깊은 신앙으로부터 우러나왔고 성경에 기초한 것이었다. 선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해방과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선생은 하나님의 신앙을 삶 자체로 받아들였고 인간이 만든 종교라는 틀 속에서의 기독교라는 용어를 몹시 싫어했다. 철저하게 신앙에 근거하여 생활해 나갔고, 그의 이러한 신앙은 교회를 삶의 중심에 놓는 삶으로 이어졌다. 그의 신앙과 삶에 대한 성찰은 인간을 괴롭히는 불의한 세력과의 끝없는 투쟁을 가져왔다. 정치적으로 억압과 고통 속에 있는 민중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였고, 박정희 군사정권과 맞붙어 신앙과 양심에 의지한 외로운 싸움이 시작된 때는 그의 나이 51살이 되던 1972년이었다.
그 해 12월 그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선포 및 계엄령선포와 맞붙어 전주 남문교회에서 철야기도회를 열고 자신의 철학과 신앙 속에서 가장 강력하게 항거했다. 결국 철야기도 도중에 군화발로 교회강단까지 쳐들어온 독재자의 하수인에 의해 그는 연행되었고 곧바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정치적 민주화를 위해 싸운 목회자를 첫 번째로 구속한 사건이었다. 불의한 세력과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는 신앙과 신학적 신념으로 그는 온몸으로 싸웠다. 마치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찢겼듯이 민중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던 것이다. 그의 평생 사역의 목표였던 인간 해방이라는 신앙고백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된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는 첫 번째 구속에도 불구하고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중심으로 불의와 부정에 맞붙어 싸웠다. 1976년 8월 10일 광주 양림교회의 기도회 사건으로 경찰서에 연행되어 많은 고초를 당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신앙이 확고한 선생을 군사정권은 투옥하지 못했다.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따르는 행동이었기 때문에 군사정권이 선생을 감옥에 가두지는 못했지만 그의 말과 행동에는 언제나 감사가 뒤따랐다. 언제나 역사의 현장 속에서 가장 강렬한 불꽃으로 피어났던 그의 신앙고백은 1980년 광주 민중항쟁 때에는 광주지역 지도자로서 독재정권과 싸웠고 수습위원으로 활동하다가 당국의 수배자로 몰리어 200만원의 현상금으로 수배되는 몸이 되기도 했다. 군사정권은 선생을 제거하기 위해서 잘못된 신앙을 가진 성도를 회유해서목사님의 사역을 괴롭히고 교회에서 추방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교회와 그의 하나님은 불의에 항거하는 목회자를 끝내 지켜냈다.
선생은 또한 평소 자신을 내세우기를 싫어하셨다. 한국기독교 장로회 전북노회장과 교단 총회장을 역임하셨고 일반사회에서 많은 봉사를 하셨지만 남들에게 이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의 청빈한 삶은 13평짜리 집에서 십년 이상 된 이부자리를 사용하는 검약으로 나타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도 영예로운 총회장(葬)을 거절하고 결국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게끔 했다. 선생의 장례는 가족장으로 그가 세웠던 전주 임마누엘교회에서 교회가 주관하는 가운데 장례예식으로 치러졌다.
선생의 죽음은 그가 평생을 살아왔던 신념에 값할 만큼 아름다웠다. 예수님이 자신의 육체와 피를 인류를 위해 모두 바치셨듯이 목사님도 이를 따라 전북대학 의대생을 위한 해부학습용으로 육신을 남기셨다. 목사님은 민족의 미래를 언제나 생각하시고 젊은이를 사랑하시어 사회 각계 각층에서 일하는 훌륭한 인물을 키우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이 사회에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활동하고 있는 영향력 있는 후진을 양성하였고, 그들은 모두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 학교 등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목사들이 소홀하기 쉬운 가정 생활 가운데서도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고, 손수 주방에서 일하는가 하면 아이들의 교육에도 세심하게 관심을 쏟아 훌륭하게 키우셨다.
은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제로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사랑하시었고 하나님의 은총에 언제나 감사하시면서 사셨다. 전주 서신교회, 성광교회, 남문교회, 광주 양림교회, 그리고 전주 임마누엘교회의 사역자로서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신앙과 삶으로 보여주셨다. 선생의 장례식에는 선생의 생활과 삶을 존경하고 아꼈던 많은 선배, 동료들과, 후학들이 참석했다. 백형기 총회장, 박종화 총무, 홍남순 변호사, 조아라 장로, 한승헌 변호사, 이희호 여사, 장영달 의원, 정동영 의원, 유종근 도지사, 명노근 교수 등이 선생의 장례예배에 참석했다. 선생이 사랑했던 황성규 교수는 장례예배의 설교에서 목사님의 청빈, 결백, 강직함의 삶을 증언하였고 고완철 목사는 추모기도에서 목사님의 고결한 인품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았다고 전했다.
목사님은 죽음의 순간에서도 하나님의 신앙을 증언하였다. 600여명의 참배객들은 목사님의 서거를 안타까워했지만 선생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세상에서는 빛도 없고 명예도 없고 이름도 없이 살기를 원하셨지만 오직 신앙과 양심을 믿고 붙들어 살아가신 목사님의 삶이 오늘의 사역자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리라 의심치 않는다. 하나님의 품안에서 평안하시기를 기원할 뿐이다.

고민영 / 1938년 임피 출생. 한국신학대학원,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졸업. 한국기독교 장로회 선교사업국장, 한국기독교 협의회 도시농촌선교위원장으로 활동하고, 현재 임마누엘 교회 목사. 동학혁명과 기독교와의 관계에 관심이 많아 이곳 저곳 찾아다니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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