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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3 | 연재 [NGO 주장]
NGO 주장눈 감지 말고, 귀 막지 말라!
전준형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집행위원장(2003-03-26 16:45:16)

2002년을 전쟁의 해로 선포한 부시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한반도에 전쟁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대대적인 전쟁에 힘을 얻은 듯 브레이크가 없는 미합중국의 움직임에 전 세계, 특히 한반도가 긴장하고 있다. 도대체 한반도에 있어서 미국은 어떤 존재인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의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조금 살펴보면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한국전쟁당시의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
지난 2월1일 영국BBC 방송은 한국전쟁초기 미군의 양민학살의 진실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죽여버려 (Kill'em All)>를 방영하였다. <다 죽여버려 (Kill'em All)>는 비밀해제 된 미군 문서들과 참전 미군들의 증언을 통해서 미군이 민간인들을 어떠한 사실 확인절차도 규정하지 않은 채 무조건적으로 규정하고, 명령에 의해 계획적인 학살을 자행했다고 밝혔다. 이것은 2001년에 미 국방부가 발표한‘노근리 사건 조사보고서’가 의도된 거짓임을 확인해 주었다. 또한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노근리 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서 민간인이 학살되었음을 지적하는 등 미군에 의한 전쟁범죄가 수없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사건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미국측은 단1건(노근리)만을 인정하고 있다고 BBC는 비난하였다. 한편 국방군사연구소(현 군사편찬연구소)의‘민군(民軍)관련사건 연구결과보고’문건에서 1999년 10월부터 4개월 동안 접수한 민간인 피해사례는 미군 관련 40건에 38건이 인명피해를 신고하였다. 특히 100명 이상의 대규모인명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신고된 곳만해도 충북단양군(51년1월20일 미군기 폭격으로 300여명 사망), 경남 사천시(50년 7월29·31일 이틀동안 미군기 폭격으로 250여명 사망), 전남 여수시(50년 8월 2~3일 미군기 사격으로 150여명 사망), 경북 포항시(50년 9월1일, 미군함 폭격으로 100여명 사망) 등 4곳이었고, 총 사망자 1338명으로 집계하였다. 전북지역에서는 1950년 7월11일 미군폭격기(B29)가 이리역(현 익산역)과 평화동 변전소에 폭탄을 투하하여 이리역 직원54명을 비롯하여 민간인 400여명을 학살하였다.

이리역 폭격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상
이리역 폭격 사건의 경위를 살펴보자.
▶1950년 7월10일 - 한국전쟁의 발발에도 불구하고 이리(현재는 익산시)는 평온하였음.
▶7월11일 오후 2시경 - 평화동 변전소부근에서는 우(牛)시장이 열려 민간인들이 몰려 있었고, 이리역에는 군 입대를 위해서 젊은이들이 철길을 따라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리역 소속 철도 공무원들은 전쟁 물자수송을 위해 비상대기하고 있었다. 이리시내의 남성중학교, 이리여중 학생들은 이리극장에 모여 모 국회의원의 시국강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7월11일 오후2시 40분경 - 이리역 상공에 미군기 2대가 출현하였고, 이리역 기관사들은 비행기에 성조기가 그려진 것을 확인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아군임을 알렸다. 그러나 미공군 폭격기 B29 2대가 전주 쪽에서 군산 쪽으로 두 바퀴 돌다가 이리역과 주변민가에 수십 발의 폭격을 가하였고, 이리역 소속 철도공무원들과 민간인 약 150여명이 사망하였다. 폭격에 놀란 사람들과 시국강연회에 참석한 학생들이 변전소와 '목천포' 쪽으로 향하여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7월11일 오후2시 50분경 - 이리역에 폭격을 가한 폭격기들이 다시 변전소(현 평화동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와 전라선 철길 주변, 그리고 이리역 폭격에 놀라 피신하던 민간인들을 향해 수십 발의 폭격을 가해 수백명의 민간인이 그 자리에서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7월15일 - 일명 '호주기'라고 불리는 미공군 소속 전투기 4대가 이리 상공을 선회하던 중 이리시내와 민간인들을 향해 기총소사(機銃掃射)를 가하였고, 수십명의 민간인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7월20일 - 북한군이 이리에 진주하였다.
이로 인한 피해 규모는 실로 엄청나다. 익산시가 1999년 12월까지 피해자 신고접수와 유족회가 자체적으로 조사한 피해 인원은 사망자 78명 부상자 10명이다. 그러나 당시 피해자들의 증언, 정부와 철도청의 공식문서에 기록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사망자는 신원미상을 포함해 약 400여명에 이르고, 부상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민간인 집단 학살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민간인 학살을 포함한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는 인간성에 반하는 죄, 집단 학살죄, 전쟁범죄를 구성하여 국제형사책임을 지게 한다. 이러한 행위에는 개인 책임뿐만 아니라 국가책임도 뒤따르게 된다. 때문에 다음과 같은 해결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첫째, 정부는 일차적으로 국민의 알권리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국가의 정보를 국민에게 낱낱이 공개하고, 특히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비밀문건 등은 각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구하도록 방치하지 말고 정부가 나서서 일괄적으로 수집하여야 한다.
둘째, 국가의 공식적인 사과와 더불어 피해자 명예회복, 그리고 피해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당시의 군사작전권이 미군에게 있다고 오로지 미국에게 책임전가를 해서는 안된다. 미국이 일차적인 책임을 갖고 있지만 한국정부와 국회 그리고 한국인들의 집합적인 의지로 미국의 사죄를 받아내고, 피해자들에 대해 명예회복과 그에 따른 피해보상을 정부가 앞장서서 진행해야 한다. 따라서 국회차원의 특위를 구성하여 엄중 조사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민간인의 생명, 재산상의 피해를 끼친 악질적 관련자의 엄중한 처단과 피해자에 대한 피해제도를 설정하기 위하여 기존 법률에 의한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나 공소시효의 저촉규정에 관계없이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하루빨리 제정하여야 한다.

'원혼굿'이라는게 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 원한을 품고 죽어 그 혼이 땅속에 편히 쉴 수 없어 구천을 돌아다니면서 지금도 억울함을 산 사람에게 호소하고 있는, 죽은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굿이다. 단순히 '원혼굿'을 한다고 억울하게 학살당하여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이 자취를 감추고 떠나지는 않는다. 적어도 진상규명이 되고 누가 왜 누구를 얼마만큼 학살하였는가, 밝혀진 학살자들이 진심으로 사죄하고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보상이 이루어지는 등 조치가 있고,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 있어야한다. 적어도 그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오늘 우리들이 그 일들을 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yulsa@hanmail.net

전준형/1967년 출생.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집행위원장과 민주화운동정신계승전북연대집행위원장 천주교정의구현전주교구사제단 사무국장을 맡아 사회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전력하고 있다. 1989년 민주화운동 시위주동과 관련 옥고를 치렀으며, 지난 2002년 1월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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