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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3 | 연재 [세대횡단 문화읽기]
노동은의 근대음악사역사의 어두움을 지켰던 두레풍물-근대를 대응하는 민족음악의 혼불 / 1870-80년대 음악사 전개(2)
노동은(2004-02-12 14:46:18)

두레풍물은 농민들의 조직적인 항쟁이 전개할 때마다 이들의 삶과 함께 하고 있었다.
두레풍물은 이들에게 삶 그 자체였으며, 생명과 힘의 언어였다.
더욱이 1860년대부터 동학이 농민·천민들의 신앙으로 뿌리내리면서 노래는 어김없이 반봉건과 반 외세 그리고 희망의 시대를 희구하는 신앙적인 노래와 결합하여 생명력을 더해갔다.


탐학과 항쟁의 격돌
이 시기는 왕권을 수행하는 자들과 소외층인 농민과 천민, 그리고 외세와 반 외세간에 격돌의 소용돌이로 대립하는 시기이다. 전세(田稅)제도를 이용하여 징수권을 장악한 지방수령과 이서층의 탐학이 극에 이르자 농민·천민들이 경향 각지에서 농민항쟁을 끊임없이 전개시켜 나갔다. 그 격돌은 마침내 갑오농민항쟁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말할 나위 없이 군·현 단위의 조세문제, 신분제 문제, 그리고 토지문제 등 전근대적 봉건유제의 구조적 모순에서 유발된 것이어서 70년대 중반이후부터 매년 지속적으로 농민항쟁이 일어났고, 그 영향력도 광범위하였다.
이미 1862년에 전국 70여 군데서 농민항쟁을 경험한 농민들은 이 기간에 더 조직적인 항쟁의 기치를 올렸다. 1879년 울산, 1881년 황해도 장연, 1883년 동래, 1885년 원주, 1888년 함경도 초원과 북청과 영흥, 1889년에 강원도 정선·인제·통천을 비롯한 광양과 수원, 1890년 경기도 안성과 경상도 지역, 1891년 제주도와 강원도 고성, 1892년 평안도 함종고 인천, 황해도 재령, 충청도 청풍과 황간, 경기도 개성과 양주, 황주 그리고 평안도 중화·운산, 함경도 회령과 종성, 경상도 통영 등 전국각지에서 그 항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농민항쟁 뿐만 아니었다. 1876년에 급증한 화적, 수적, 유단(떠돌이 거지 조직체), 채단(신청조직)등 소위 당도(黨盜)들의 출현과 군인항쟁(1882,임오군란), 그리고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1884) 등 사회적·정치적 변동이 안으로부터 극심하게 일어났다. 밖으로 불평등 조약 등 무수한 열강들과 체결하는 조약으로 상인들의 점포철회와 시위를 전개하는 등 민족경제 몰락과 문화적 충격이 잇달았다.
이 시기의 음악사는 수천·수백년간 공동체문화로 살아온 농민들과 기층 민중들 출신들 전문음악인들은 민족음악으로 발전시키면서 안팎을 대응한 역사를 전개하였다.

민중들의 두레풍물과 노래
두레풍물은 농민들의 조직적인 항쟁이 전개할 때마다 이들의 삶과 함께 하고 있었다. 두레풍물은 이들에게 삶 그 자체였으며, 생명과 힘의 언어였다. 더욱이 1860년부터 동학의 농민·천민들의 신앙으로 뿌리내리면서 노래는 어김없이 반봉건과 반외세 그리고 희망의 시대를 희구하는 신앙적인 노래와 결합하며 생명력을 더해갔다. 1891년 전라도 나주에서 동학도들이 모임을 가질 때마다 '북을 치고 나발을 불어' 그 위세를 드높였다. 1893년 3월 24일 서울 북산과 남산에 동학도들이 망기(望旗)를 꽂았을 때에도 동학의 노래가 산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1893년 3월 11일 충북 보은에 모인 8만여 명의 동학도들이 '깃대를 세우고 북을 쳐서'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는 반외세(척왜서양)의 기치를 높이 치켜세울 때에도 두레풍물이 함께하고 있었다. 두레풍물을 생활화한 농민들에게 그 소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신호체계이자 모두들 하나로 묶는 공동체의 소리판이었다. 더욱이 동학농민들의 주체가 신청(神廳)출신이고 보면 그 소리판은 전문적이면서 가장 대중적인 음악회와 춤판이 펼쳐지고 있었다. 좌도와 우도의 풍물뿐만이 아니라 판소리와 땅재주와 삼현육각편성의 소리와 춤판이 동시에 열린 음악 ·춤판이 공연되었으니까 말이다.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나기 전엔 이 시기 어린이 사이에 동요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격변의 이 시대를 웅변하고 있었다. 그 동요는 어린이에게만 유행하지 않았다.

상도(上道)의 참새 / 하도(下道)의 참새

전주 고부에 녹두참새
둥근박 전대 / 전대는 후예

이 노래는 어린이들이 참새를 쫓으면서 불렀던 동요이지만, 순식간에 전 계층의 유행가가 되면서 전봉준의 어렸을 때 이름인 녹두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녹두는 메시아였다. 특히, 동학농민항쟁이 1894년에 일어났을 때 전주와 고부가 성지(聖地)였다는 점에서 이 동요의 내용이 비로소 맞았다며 모두들 통쾌하게 생각했다. 이 노래는 사람다운 세상과 하나의 민족이 새 시대를 맞이하겠다는 희망가이었다.

이 시기를 주도한 신청과 예인집단들의 민족예술
이 시기의 동학농민항쟁에 두레풍물과 동학노래 그 밖의 동요만 함께 한 것은 아니다. 이들 맨 앞에는 어김없이 신청예술인들과 예인집단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동학도 핵심부에 신청출신과 예인 집단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법은 귀천이나 노소가 없이 모두 같은 상대로 절하고 읍한다. 종과 주인이 모두 입도 하면 또한 서로 접장이라고 불러 친구와 같이 한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노, 역인, 무부, 수척 등 모두 천인들이 가장 즐겨 여기에 따랐다. (황현, 《동비기략 초고》)

동학도로 무부와 재인 그리고 창우들이 앞다투어 입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용맹스러울 정도로 앞장서고 있었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만들었을까? 먼저, '무부·재인·창우'라는 그 용어들을 구분해야겠다. 무부(巫夫)란 무당의 남편으로 이들이 전국적인 조직체가 신청(神廳) 또는 재인청(才人廳)이었다. 세습적인 신청출신들은 말할 나위 없이 조선사회에서 가장 소외받고 천대받은 천민들로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사회는 왕권을 수행하는 양반관헌→수령과 토호세력→중인이서층을 이어 내려오면서 농민과 천민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신청출신들이 기층민중들의 삶과 죽음의 모든 과정에 선생으로 함께 하고, 또 중앙과 지방의 악공과 군영의 악수(세악수와 취고수)는 물론 여기(女妓)를 공급하여 국가 최고 덕목인 예악의 실행을 주도하였건만, 모든 국가의무(전정·군정·환곡 등의 三政의 의무)는 물론 국가이념인 유교에 배치된다하여 조선시대 내내 싹쓸이의 대상이었으며, 여기에다 무업세(巫稅)를 내야했기 때문에 이 모두를 ‘감당할 수가 없어 떠도는 자가 열에 팔·구’가 될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 신청출신들은 예술적인 감수성이 뛰어난 기층민중들이나 왕권수행자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참으로 치열한 학습을 하고 있었다. 기(氣)학습-구음과 장단학습-일가학습(一家, 성악과 기악, 춤, 그림, 재주 등의 통합학습)을 통하여 굿판에서 완성하는 국내 최대 최고의 민간 예술종합학교를 역사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소리로 특출나게 부각된 성악가가 창우(倡優)였으며, 악기연주자가 악공(또는 공인)이나 세악수·취고수였고, 온갖 땅재주 등 덤블링 선수로 부각된 사람이 재인(才人)이었으며, 악기와 춤에 능한 여인들이 정부의 침선비나 의녀 또는 여기(女妓)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지역의 굿판을 지키거나 광대패 등 떠돌이 예인집단이 되어 시장이나 조창(정부미를 보관하던 곳) 또는 마을의 행사판에 찾아드는 것은 이 곳에서 먹거리를 그나마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60년대부터 20세기 벽두까지 판소리 명창이 2백여명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이들이 끊임없는 신분상승을 꾀한 증거이다. 또, 이들의 예술이 전국민에게 대중화되었음을 말한다. 모홍갑은 종2품 동지벼슬, 송홍록은 정3품 통정대부, 박만순과 이날치 그리고 박기홍은 무과선달 직계로, 장판개는 참봉벼슬, 이동백은 정3품 벼슬을 받아 면천(免賤)하므로서 천민계급에서 그나마 탈출할 수가 있었다. 한편, 명창 이날치는 줄타기 명인이었으며, 장판개는 땅재주 명인으로, 한성준은 줄타기와 땅재주 명인으로 한때 부각된 것은 신청교육이 종합적인 예술교육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청(재인청) 출신들은 어린이들에게도 하대받을 정도로 사회적 신분이 낮았고, 경제적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유일하게 신분해방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동학이었다. 동학에 입문하면 귀천이 없었고, 누구나 평등할 수 있었으므로 동학은 죽을 판이 아니라 살판이었다. 살맛이 나므로 평소 땅재주로 단련된 민첩한 기계체조부대의 용맹스러움을 떨칠 수가 있었으며 온갖 소리판을 풍미하게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상설시장이 들어서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떠돌이 예인집단과 붙박이 예인집단들이 공연판을 펼쳤다. 대광대패·사당패·중매구패·초란이패·남사당패·비나리패(걸립패)·솟대쟁이패·풍각쟁이패·광대패 등 떠돌이 예인집단들은 5일장 상설시장, 조창과 마을행사판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또 일정지역에 붙박혀 살면서 연행판을 펼치는 붙박이예인집단들도 예외 없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경기도 광주군 송파에 상인들이 상설화하면서 송파산대놀이패를 육성한 것도 시장활성화를 꾀한 조치였다. 그 밖의 양주별산대, 애오개산대, 사직골 딱딱이패, 구파발산대, 노량진산대, 퇴계원산대 등 서울과 경기지역 중심으로 붙박이 예외집단들이 당시의 사회 내부적 모순을 풍자하며 판을 벌리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피리2, 젓대(대금)1, 해금1, 장구와 좌고 각각 하나씩으로 편성한 삼현육각을 거의 예외없이 편성하고 있었다. 예인집단들은 그 편성에 의한 소리판, 춤판, 연주판, 곡예판, 인형판 들을 펼치면서 각종 연회 때의 거상악, 각 종 춤의 반주음악, 각 종 믿음치레의 제례악, 행진음악과 시나위 등으로 국가의 나례행사나 기회(耆會, 보통 예순살 이상의 노인들 계회나 모임), 관아의 연향, 관료들의 행차, 산신제, 향교의 제향, 마을의 제사, 개인적인 연회 등에 악공이나 세악수들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주도했다. 자연이 기층민중에서 국왕과 양반관헌에 이르기까지 그 음악적 감수성을 민악(민속악)으로 주도하였으며, 그 바탕을 건강한 기층민중들의 바탕에서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 완성은 민족기악양식으로 ‘산조’의 창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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