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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5 | 연재 [문화저널]
<제19회 백제기행>정여립 반역의 현장과 호남편견
홍성덕/전북대학교 강사(2005-01-25 14:53:04)

용수원 확보라는 대의와 생활의 터전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는, 이주 대책의 불합리와 불확실속에서 싸워야하는 면민들에게 소중한 것은 어느쪽일까라는 궁금증을 가져본다. 그렇지만 두가지중 어느 것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로 사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혼행진곡을 듣고 난 후 두달 뒤부터 시작된 우리 부부의 백제기행은 텔레비전과 무료한 낮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그러면서도 우리지역의 곳곳에 얽힌 역사와 문화를 배우게 해주는 중요한 일요일 나들이였다. 작년 7월의 기행에서 남원에 있던 남근석을 쓰다듬었던 덕분인지 우리 집에 식구 하나가 늘었다. 아버지가 된다는 설레임은 다섯시간의 기다림의 댓가로 어떠한 삶의 모습을 보여줘야 되는가 하는 의무감으로 탈화되어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깜량에 그래도 역사를 공부하는 아비로서 역사에 대한 틀에 박힌 인식이 아닌 우리 땅냄새를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티없는 모습을 보여주고픈 소박한 마음에서 출발한 여정이었다. 5 ․ 18의 뒤끝이 채가시기도 전에 새벽 일찍 일어나 우유병 소독하랴, 물 끓이랴, 장남감 챙기랴 부산을 떨고, 남들보다 일찍 제시간에 맞추어서 나가야 된다고 잔소리를 하면서 문을 나섰다. 제시간에 맞게 나갔는데 도착순위 3위라니 괜히 잔소리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언제나 출발은 30분 늦게라는 타성이 백제기행에 자리잡지 않았나 하는 우려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번 기행은 ‘정여립 반역의 현장과 호남편견’이라는 제목으로 진안일대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2년전에 지표조사 관계로 넘나들던 모래재라 서먹하지 않았고, 그때 여러모로 도움을 받은 황안웅 선생님에게 인사도 드릴겸 해서 나선 길이었다. 이윽고 출발한 버스는 미아(?)를 찾아 시내를 몰아돈 뒤 모래재를 넘어 용담으로 향하였다. 곳곳에 아카시아가 활작 핀 5월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모내기를 하기위해 논을 돌보고 있는 농부의 모습에서 우리의 이번 기행도 저 농부의 일손만큼이나 생산적인 일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 모래재를 휘감아 오를 때 발 아래로 펼쳐지는 운치는 편견의 골만큼이나 깊은 옛날의 진안을 연상케 하고도 남았다. 마이산을 뒤로 하면서 기행에 참가한 사람들의 소개가 있었다. 한번 단골은 영원한 단골인가보다. 항시 볼 수 있는 눈에 익은 얼굴들의 소개 끝에는, 자신이 정여립의 후손이라고 소개한 아주머니도 있었다. 차창 밖으로 멀리 고개 넘어 흐르는 푸른 쪽빛 그것처럼 그 아주머니의 기대감에 찬 듯한 눈빛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으리라. 이윽고 터덜거리는 비포장도로를 지나 처음 도착한 곳은 용담이었다. 지금의 진안군은 1914년까지만 해도 용담현과 진안현의 두고을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그 중 용담현은 8개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면소재지에 들어서자 “용담댐 건설 절대반대” 라는 현수막이 먼저 눈에 띄었다. 일제시대 때부터 수없이 거론된 용담댐 건설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착수된것에 대한 이주민들의 삶의 대책을 우려하는 몸부림이었다. 댐건설의 확정 때문이라며 용담현에 들어가는 입구가 포장되다가 말았다는 황선생님의 말씀이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면소재지까지 포장되지 않았다는 것은 댐건설 이전에 전라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 가난의 상징은 아닐까? 용수원의 확보라는 대의와 생활의 터전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는, 이주 대책의 불합리와 불확실 속에서 싸워야하는 면민들에게 소중한 것은 어느 쪽일까라는 궁금증을 가져본다. 그렇지만 두가지중 어느것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로 사태를 해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삶의 구조적 모순(오늘날의 농촌)을 해결하지 않는 한 풀릴 수 없으리라고 본다. 우울한 생각을 채 떨쳐버리기도 전에 맨 처음 찾은 곳은 ‘태고정’이다. 주자천변의 조그만 구릉에 위치한 태고정은 동춘 송준길이 쓴 현판과 우암 송시열이 쓴 ‘용담현태고정기’의 편액이 걸려있는 아담한 정자이다. 야트막한 언덕위에 자리잡은 태고정앞에는 잘자란 소나무가 몇그루 있었고, 반대쪽 아래로는 돌들이 환하게 들여다 보일정도로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정자 역시 댐이 건설되면 물속에 잠기는 위치에 놓여있다. 대저 대규모으 댐건설이나 도로포장 또는 건축공사 이전에 그 지역에 대한 유물유적의 조사가 선행되고 그에 대한 대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새마을 운동과 함께 조국의 근대화 건설이라는 미명아래 60~70년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우리의 문화유산들이 사장되어 버린 점을 생각할 때, 수몰민에 대한 근본적 대책과 아울러 용담댐 수몰지구에 대한 학술적 조사와 주요 유물․유적의 이전에 관한 조그마한 그러나 주요한 움직임을 누군가가 시작해야 할 때는 아닌가...착잡한 생각이 든다. 순박하고 간결한 화단이 가꾸어진 주택가를 지나 용강산 어귀에 자리잡고 있는 용담향교에 들어섰다. 문화재 자료 17호로 지정되어 있는 용담향교는 고려 초에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현재에 남아있는 건물은 인조11(1633)년에 현령 오전에 의해 중건된 것으로 그 뒤 몇차례의 보수가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용담향교에는 대성전을 비롯하여 명륜당 그리고 양사제와 시습제, 제기고 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고 규모는 그리 큰 편에 속하지 않는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교육기관의 일종으로 현재에도 일요한문교실을 여는 등 활발한 활동들을 보이고 있다한다. 오전내 버스를 타고와서 인지 다섯살박이 보의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때문에 먼저 나서야 하는 아쉬움을 지닌채 부지런히 내려와 준비해온 우유를 물리고 더위를 쫒기위해 부채질을 해댔다. 네게 뭘가르치겠다고 이렇게 자청해서 보부노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가슴 속 한 구석에서 차오르느 열정은 놓치고 싶지 않구나. 에어콘 바람을 아이스크림의 찬맛으로 대신하는 동안 버스는 서서히 용담의 비포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앞으로 몇 년 후엔 우리들이 이곳을 배타고 지나게 될 것’이라는 왠지 다시는 밟지 못할 당이라는 생각에 눈앞에 펼쳐지는 땅을 머리에 새겼지만, 왠지 허기가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심리인가? 수동천을 지나 죽도를 지척에 둔 천변식당에서 매운탕으로 후다닥 배고픔을 물리고 일행은 하나 둘 짝지어 천천(天川)의 물가로 나갔다. 천반산 자락을 마주하고 앉은 하늘 물 천천의 가닥에 타고 앉아 기행에 참가한 일행은 죽도에 얽힌 정여립의 소위 모반사건과 호남편견에 대한 선생님들의 강의와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예전의 기행이 시간에 쫒기었던 데에 비하여, 모처럼의 기행에서 보는 여유와 진지함을 토해내는 시간이었다. 죽도는 남쪽 장수방면에서 흘러오는 천천과 동족 안성면의 덕유산에서 발원한 안성천이 합류하여 천반산을 끼고 돌아 흐르는 곳으로 천반산의 산세가 우후죽순의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붙여진 진안의 명승지이다. 한여름의 더위를 말끔하게 씻어주는 죽도의 역사적 의미느느 소위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알려진 “기축옥사”에 있다. 정여립은 희중의 아들로 전주 남문 밖에 살았다고 한다. 두뇌가 명석해서 경서와ㅏ 제자백가에 통달하고 1570년에 급제하여 이이와 성GMS의 문하에서 스승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본래 서인이었으나 1585년 수찬이 된 뒤 집권중인 동인에 아부하여 죽은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성흔 등을 비판.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후 그는 진안 죽도에서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에 제한 없이 사람들을 모아 보름마다 한번씩 무술훈련을 시켰다. 1587년에는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변경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해주, 운봉 등지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정감록>의 참설을 이용하여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인심을 흉흉하게 하였다. 이때 안악군수 이축이 ‘한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서울로 들어가 정권을 잡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히자 정여립은 금구를 떠나 아들 옥남과 함께 진안 죽도로 도망하여 숨었다가 관군의 포위 속에서 자살, 모반사건은 끝이 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이후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지목되고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는 차별을 받기에 이르렀다. 황안웅 선생님은 이 기축옥사는 ‘당쟁의 심화로 일어난 정치적 사건이며, 뒷날까지 이 옥사가 끝내 모반으로 몰릴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정여립의 대동계를 서인측의 외침설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정치적 명분 때문이다. 이같은 역사흐름의 편견은 호남기피의 분위기로 몰아져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 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후세 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서인들의 동인 세력을 약화시키고 정권을 잡으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계획한 날조된 사건으로 보아야한다는 주장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하튼 당시에는 모반으로 보는 견해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윤덕향 선생님은 호남편견의 역사적 맥락은 그보다 더 훨씬 오래되었다며 ‘삼국통일 이후부터 백제인에대한 정치적 차별성이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신라의 입장에서 백제인에 대한 정치적 보복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를 세운 왕건 역시 후백제의 견훤에게 크게 패한적이 있었고, 그러한 쓰린 경험은 훈요십조로 이어져 호남편견은 그터전을 마련하게 된다. 즉 “차령이남과 금강 밖의 지역은 지세와 산의 형세가 모두 순리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뻗어 있으니 인심도 또한 그러하다. 그 남쪽 주군의 사람들이 조정에 나와 고관이 되고 또는 왕실과 혼인을 하여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 국가를 어지럽히거나 정복당한 원한을 품고 임금을 없애고자 난을 일으킬 것이다. ... 다라서 비록 양반이라 할 지라도 그 지역 출신들은 관직에 임용하지 말라”는 것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이씨왕조의 본향이라는 이유로 눈에 듸는 차별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위 ‘정여립의 모반사건’ 이후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고 ‘전라도 인심은 오로지 교활함과 음험함을 숭상하여 옳지 않은 일에 쉽게 움직인다’ 는 등의 풍조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정여립이 칼을 땅에 꽂고 칼끝에 엎드려 자살했다는 죽도에는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어느것도 보이지 않고, 그 억울함과 원통함을 이어 받고 이어 받은 먼 후예들이 역사의 질곡을 아는지 모르는지 곳곳에 모여 있었다. 보의를 앞에 메고 한발 한발 건너는 이 돌마다에 정여립의 숨결이 스며있는 것일까? 죽도를 한바퀴 돌아내려오는 머릿속에 지난 4월에 있었던 연세대 어학당 교재사건이 맴도는 가운데, 호남편견이 우리 대에서 그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죽도를 돌아 곰티재의 임진왜란 전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가슴 한 구석에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곰티재! 유식하게는 웅치라고도 하는 곰티재는 옛날 전주에서 진안으로 넘어들어가는 고개이다. 곰티재에 대한 지역 향토사가들의 노력은 대단한 열정을 발하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천인의 총은 조국에 대한 선인들의 거룩함을 왜인조차도 숭앙한 역사적 증거이다. 새로이 뚫린 모래재를 내려오면서 우리의 기억속에 역사의 곰티재가 사라지고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가는 현대인의 숨가뿐 모습을 본다. 삶에 대한 흔적을 몸으로 느낀다는 것은 올바른 삶을 위한 디딤돌이다. 전라도! 그 반역의 고향, 척박한 땅은 근 현대로 넘어오는 역사의 수레바퀴속에서 그 땅 냄새만큼이나 커다란 분기점을 제공해 왔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의 말발굽에 짓밟히지 않은 전라도로 인해 그나마 전쟁을 종결지을 수 있었고, 동학농민전쟁의 반봉건 반외세의 불길, 광주학생운동에서 보여준 독립운동의 횃불 그리고 반독재의 5․18 민주화투쟁 등 일련의 역사적 사실들은 편견의 골이 잘못 패여있음을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묵묵히 말하고 있지 않은가? ‘왜’ 우리는 지역감정, 차별, 편견 따위를 토로하면서도 결국은 극복해 내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면 ‘과연 그렇다’라는 망상에 물들어 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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