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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 | 연재 [문화저널]
<제23회 백제기행>운주사의 천불천탑과 조선시대 풍속화
최지윤/대성고교사(2005-01-25 14:55:31)

남들이 부러워하는 방학을 했다고는 하지만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연말이 정신없이 가고, 보충수업이 시작되어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방학은 방학이다. 새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 준비없이 시작되는 학기가 얼마나 팍팍한지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우선 아이들이 졸 때 잠깨워줄 밑천이라도 마련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기행을 결심했다.
유래없이 많은 인원이 참가하기 때문에 선착순 40명만을 접수시킨다는, 또는 정각 2시에 출발한다는 소문들을 듣고 아침부터 서둘러댔다. 시간표를 옮겨서 수업을 마치고 아슬아슬하게 전주행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도착하는 시간과, 택시를 타고 시청앞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해 보느라 차를 탔어도 마음 편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인원쯤이야 어떻게 되겠지 설마 멀리서 오는 사람을 쫓아내겠는가 라는 배짱으로 2시를 조금 넘겨 시청앞에 도착하니 허름한 버스가 보였다. 출발 전이었다. 그것도 두 대의 버스였다.
곧 기린로를 달리면서 주간 선생님의 인사말이 시작되었다. 4년째 이어지는 백제기행이 곧 마감될지도 모른다는 말씀에 갑자기 참가하지 못했던 그 기행들이 아쉬워졌다. 사람마음은 거의 비슷한 모양이다. 참가자들은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백제기행에 대한 애정을 고백했고 계속되기를 바란다는 말들이 이어져 마음 변한 연인에게 하소연을 늘어놓는 듯 했다. 참가자들의 순진한 애정을 확인하고 더 열심히 해보겠다는 말로 마무리 하시는 주간 선생님은 다분히 만족스러운 표정이었고 방금 전의 말은 다소 정치성(?)을 띤 발언이었던 듯 싶어 마음은 다시 가벼워졌다.
겨울 햇살이 조용히 내려앉는 들판을 가로질러 남원, 곡성을 지나고 주암 휴게소를 거쳐 승주선암사 갈림길로 접어 들었다. 어느새, 의좋게 이마를 맞댄 지붕들 사이로 저녁 굴뚝 연기가 솟아 오른다.
버스 창가로 조계산자락이 다가왔다. 안내문을 읽으며 지도를 짚어나가던 진지한 얼굴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입구에서 내려 경내로 이어지는 숲길을 걸었다. 아직은 춥지 않은 산공기가 상쾌했고 당당하게 솟은 겨울나무가 보기 좋았다. 선암사는 구석진 곳일수록 옛모습이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발자국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 한 스님의 도움으로 신라때의 약사불을 보고 돌아설 때쯤 법고가 울리기 시작했다. 우주의 모든 가죽가진 생명을 위해 법고 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메울 때까지 선자리에서 움직이질 못했다. 뒤이어 범종이 울린다. 가까이서 들은 탓인지 부딪쳐오는 여운이 발끝까지 스며든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졌고, 서둘러 절을 내려왔다. 종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달려와 발목을 붙잡는다. 찬 하늘에 걸린 초생달이 그린 듯이 고왔다.
버스는 이미 시동을 걸고 갈길을 재촉했다. 갑자기 밀려드는 추위와 허기를 누르고 밤길을 달려 송광여관에 도착한 것은 저녁 7시가 넘어서였다. 서로 낯설었던 것은 잠깐이었고,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여관 넓은 방은 따뜻한 자리를 서로 내 주고 아이들을 챙겨주는 흐뭇한 모습들로 채워졌다.
저녁식사후 8시 30분. 이태호 교수님의 ‘조선시대 풍속화’에 대한 강의가 시작되었다. 슬라이드 때문에 다소 비좁고 불편했으나 감칠맛나는 강의는 그런 것을 모두 잊게 해주었다. 나주의 어떤 농가의 모습으로 시작된 160여장의 필름들은 흥미 진진했었고 거의 ‘영화’라는 찬사가 들렸다. 기행후 술자리에서 ‘영화감독을 해도 잘할 것 같다’픈 평이 나올정도였다.
민화를 포괄한 풍속화 전반에 대해 경제적, 역사적인 분석과 재치있는 설명이 이어졌고 우리 생활에서 반영되는 미의식의 변화된 모습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강의중 빼 놓을 수 없었던 부분은 역시 춘화감상이었다. 세심한 배려 속에 아이들은 옆방에 모아두고 어른들끼리 둘러 앉았다. 적나라한 표현들이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서양의 도색잡지와는 달리 퇴폐적이지 않고, 삶이 느껴진다는 강의 덕분이었는지, 인간적인 표정으로 와 닿는다. 이 밖에 민화 풍속화 속에서 빼어난 미의식, 건강한 정서와 증폭되는 저항의 몸짓들을 읽어내리고 감탄하는 사이 11시가 넘어섰다. 교수님과 더불어 조촐한 술자리가 이어졌다. 이렇게 밤이 깊어 가는데 송광사의 새벽예불이 장관이라는 소문이 은밀히 떠돌았다. 새벽 3시, 결국 잠깐 눈을 붙인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일정에도 없이 송광사를 올랐다. 산능선에 삼태성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고 밤하늘은 쏟아질듯한 별밭이었다. 캄캄한 길을 더듬어 경내에 도착하자 목어 법고 범종이 차례로 울리고 대응전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분들이 합장하고 계셨다. 처음 올리는 예불이었다. 기둥 뒤 구석진 자리에서 곁눈질을 해가며 앉고 일어서고 엎드리기를 몇번, 어색하기도 했지만 기분이 그럴 듯 했다.
맑은 독경소리, 은은한 향냄새, 무엇보다도 법당안의 청정한 공기가 몸에 밴 나태함을 씻어주는 듯 했고, 짧은 명상시간은 추위마저 잊게 해주었다. 눈을 떠 보니 한없이 자애로운 부처님의 눈매가 나를 향한다. 예불을 마치고 새벽 추위에 굳은 몸을 풀며 아직도 별빛이 한창인 길을 내려와 늦은 잠을 청했다.
아침, 간밤의 피곤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예정된 시간에 출발할 수 있었다. 10분쯤 달려서 주암댐 고인돌 공원에 들렀다. 수몰되기 전 보성강 주변에 산재해 있던 BC 2500년쯤의 신석기 유적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세계적으로 드문 유적지가 물에 잠겨 안타깝다는 설명을 끝으로 고인돌 사이에 있는 움집에 들어가 보았다.
화순고개를 넘어 능주로 향하는 들판앞에서도 잠시 멈추었다. 높이 4미터 정도의 사각형 돌미륵이 들가운데 느티나무 숲아래 서 있었다. 18, 19세기 자주적 근대화로의 움직임이 시작되던 이 시기에 종교적 기원의 대상으로 장승이 많이 세워지는데, 대부분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나 벽나리 돌미륵은 두손에 연꽃을 든 관세음보살형태의 동자상이다. 소년같은 해맑은 표정에서 미래에 대한 열망과 진취적인 의식을 느낄 수 있으며, 민중들의 삶터에 내려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해주고 병치레와 액막이를 하는 생활속의 종교로 탄생한 불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는 느티나무가 있어 옛날에는 돌미륵과 짝을 이루어 제사가 이루어졌으나 이제는 당산나무터가 전라선 철길로 가로 막혔고, 근처 사람들에게는 잊혀진지 오래라고 한다. 그 건강한 공동체문화를 되살리는 일은 설명을 듣는 성실한 눈빛들, 사진기를 눌러대는 부지런한 손끝들의 몫일 것이다.
버스는 다시 넓은 능주벌판을 달려 기행의 목적지인 화순 도암면 대초리 운주사 입구에 닿았다. 버스에서 간단히 점심을 마치는 동안, 얼마전 새로운 감동으로 읽어내린 ‘마당그림 장길산’이 떠올라 마음이 급해진다. 일행들이 손수 끓인 따뜻한 물을 한잔 얻어들고 서둘러 진흙길을 따라올랐다. 출입구가 따로 없이 온 산과 온 계곡이 탑과 불상으로 어우러진 절이라던 안내문 그대로였다.
운주사는 풍수지리학의 비조로 알려진 신라말 승려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전설만을 간직한채 그 역사가 뚜렷하게 밝혀지지 못하고 많은 설화들만을 남겨오고 있으며 천불천탑의 집단성, 파격적이면서 동시에 편안하고 친근감 넘치는 조형미, 그 민중적 감성등으로 신비로움을 더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석탑 석불이 각 1천구씩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는 석불 70구와 석탑 18기만이 남아 있고 불상들은 대개 비슷한 양식으로 평면적이고 토속적인 얼굴 모양, 돌기둥 모양의 균형이 잡히지 않는 팔과 손, 어색하면서도 규칙적인 옷주름, 둔중한 조각기법 등이 특징이다. 여기저기 즐비하게 늘어선 석탑은 3층, 5층, 7층 등의 다양한 층수이고, 그 모양도 둥근원형탑, 연화탑, 일반적인 4각형탑들로 다양하며, 이중에는 그 형상이 자연석을 그대로 얹어 놓은 듯 투박스러운 것도 있다.
골짜기를 따라 오르며, 산등성이마다 무리지어 쓰러질듯한 몸들이 서로 기대고 서 있는 불상들을 볼때마다, 코가 떨어져 나간채 해죽 웃기도 하고 찡그리기도 하는 모습이 정겹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햇다. 글자 그대로 천불천탑이 남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적은 수여서 그런 느낌이 더 진했는지도 모른다. 코가 없어진 사연은 아들을 낳기 위해, 바람난 남편을 되잡기 위해 갈아 먹었다는 것이어서 그렇다 치고, 나머지 석탑 석불이 없어진 내력은 듣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조선초까지 그대로 남아있던 천불천탑은 일제시대에 지금의 2배정도로 줄어들었고 그 후 탑은 주춧돌, 디딤돌로, 불상은 설거지 통이나 구유통으로 더러는 논두렁을 쌓는 석축돌로 쓰였다는 내용이었다.
계곡이 끝나는 곳에는 대웅전이 있었다. 2억을 들여서 새로 지었다는 대웅전이 개밥의 도토리처럼-아니다. 이러면 나머지 석불이 개밥이라는 말이다. 이것도 간밤의 강의 덕분에 알게 된 재담이다-어쨌든 어울리지 않는다. 물색모르고 차려입은 푼수없는 여자보듯 모두들 대웅전을 곁눈질로 흘려보내고 그 뒷길을 따라 공사바위에 올랐다. 계곡에서 우리를 보았다면 또 한무리 비슷한 불상들이 서고 앉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공사를 지휘하는 장소였다는 그 바위에 앉고 보니 골짜기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계곡 한가운데로 선을 그어 탑이 솟아 있고 불상들이 그 양편에 규칙적으로 늘어선 모습이었다.
천불산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세우고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민중해방의 용화세계가 열린다는 설화로 대미를 장식한 소설 ‘장길산’의 한 장면 - 골짜기 전체에 둥둥 북이 울리고, 이 바위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탑, 불의 위치를 알리면 사방에서 굴러온 바윗돌이 부처가 되고 석탑이 되어 일어서는-이 눈에는 보이는 듯 싶었다.
마지막 일행까지 바위에 올라 숨을 돌리자, 이태호 교수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운주사의 창립시기는 11세기, 고려초이며 지방호족세력이 중앙지배세력과 결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치적인 세력을 이루고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이상적인 예술세계와는 다른 도전적이고 파격적인 문화양식이 성립될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결국 운주사는 나주평야의 생산력을 지배하던 호족세력이 그당시 교통의 중심지였던 이곳에 창건한 사찰이고 천불천탑의 특이한 조형미는 도전적인 지방호족의 의식세계가 반영된 것이며 그속에 다른 지역보다 뛰어난 생산력을 바탕으로, 생산을 직접 담당했던 농민들의 체취도 많이 배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신앙의 성지, 또는 천민과 노비들의 해방구로 알려진 운주사는 주로 80년대 민족문학진영내의 진보적인 작가들이 만들어낸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그 전설로만 가슴설레던 나에게는 불만스럽기조차한 진실이었다.
공사바위 왼편으로는 돌을 날라왔다는 전설을 간직한 천태산의 날카로운 봉우리가 보이고 오른편 능선너머에 나주댐, 나주평야가 있으며 교통의 중심지였음을 증명하듯, 주위를 둘러 화순, 장흥, 나주의 산봉우리들이 겹쳐 솟아 운주사 아래의 중장터로 이어진다. 그곳은 운주사 절터가 그곳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 규모를 눈 짐작해보며 오른편에 보이는 널찍한 산봉우리로 향했다. 와불을 보기 위해서였다.
도선이 천불천탑을 하룻밤사이에 세울적에 마지막에 와불을 일으켜 세우려는데 공사에 싫증이 난 행자승이 거짓으로 닭이 울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와, 이 와불은 미륵불인데 이것이 일어서야 새 세상이 열린다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와불은 머리부분이 낮은 쪽을 향하고 있는데, 일어서지 못하고 거꾸로 누운 형상이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상상할 거리들을 제공하는 듯 하다. 그러나 설화와는 달리, 엄밀히 말하자면 와불도 미륵불도 아니라고 한다. 와불은 열반에 든 석가여래의 모습인데, 입상과 좌상으로 된 그 부처상은 석가여래와 비로자나불이고 밀교와 민간신앙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이라고 하였다. ‘미륵불’은 미륵신앙이 널리 유포되는 조선후기에 전쟁과 양반들의 횡포에 지친 민중들이 덧붙인 이름이며, 이 시기에 운주사의 이름도 구름이 머문다는 雲住寺에서 배를 운항한다는 運舟寺로 바뀌어 변혁적인 이미지를 가진 미륵신앙의 성지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과학적인 설명을 듣고 나서도 마음은 다시 ‘장길산’한 모퉁이에 머물고 있었다.
“절이름이 어째서 운주사요”
배를 부린다는 뜻이란다. 새로운 우리 세상이 바로 배가 되는게야. 미륵님 세상에 배가 된다. 배는 물이 없으면 뜰 수가 없지 않느냐? 물은 우리 같은 천 것들이고 만백성이란다. 우리 중생이 물이 되어 고이면 배가 떠서 나아가게 되는 게야… 미륵님의 형상이 이루어졌다. 자, 미륵님만 일으켜 세워드리면 세상이 바뀐다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다가 미륵은 다시 넘어졌다. 사람들은 지칠 줄 모르고 미륵님을 밀어 올렸다. 그때에 도저히 이 캄캄한 밤의 노고를 참지 못한 사람 하나가 있어, 손을 떼고 혼자 떨어져 나가며 거짓말을 외쳐 버렸다.
닭이 울었다.
고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북채를 내던졌다. 미륵을 밀어 올리던 사람들이 힘을 잃고 주저앉아 버렸다. 미륵상은 비탑 저 밑에 처박혀서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순간 운주사 석불의 미술사적 가치보다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시대의 비원이 만들어낸 전설들이고 그 속에 밴 사람들의 절절한 소망들이었다. 그래서 ‘장길산’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닌채로 이곳 운주사에 많은 순례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려오는 길에 칠성바위를 보았다. 칠성신앙의 뿌리를 보여주는 바위로 별자리가 산허리에 반사되는 형상이며 밝기에 따라 크기가 다른 일곱 개의 바윗돌이 놓여 있었다. 운주의 석탑 석불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토속신앙과 결합되어 나타나는 민중신앙적인 면모라는 설명이었다.
버스가 덜컹거리며 운주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너른 들판으로 닻을 거두고 출항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우리의 비원을 그 골짜기 어느 구석엔가 보이지 않는 불상으로 새겨두고, 절망도 묻어두고, 새 다짐의 배를 띄운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차안에서 운주사 주변이 도곡온천, 나주댐과 더불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앞서 보았던 대웅전, 경상도 신도가 시주했다는 멀쑥한 석조물도 그때문인 것 같다. 주차장 주변에 가게가 들어서고 건물들이 올라가면 더 주눅들어 보일 불상들이 떠오른다.
겨울해는 짧다. 어느새 기우는 햇살을 아끼며 나주댐을 끼고 산길로 접어들어 덕룡산 중턱에 자리잡은 불회사에 들렀다. 입구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돌장승이 유명하다. 이빨이 빠진 채, 웃음을 머금은 할머니, 왕방울 눈에 주먹코, 심통난 듯 입을 다문 할아버지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비자나무 숲을 따라 대웅전에 오르니 삼베와 옻칠을 이겨 만든 비로자나불이 보였다. 구부정한 모습에 겸손하고 따뜻한 표정이 산지사찰의 민중적 감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제 여정은 끝났다. 스러져가는 햇빛 사이로 서둘러 숲길을 빠져나오니 좁은 길로 버스가 올라와 대기중이었다. 운전기사 아저씨의 넉넉한 마음씀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돌아오는 차안은 다소 지친 표정들이었지만 관광차로 여기저기 끌려다닌 행락객들의 피곤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기행을 약속할 무렵 전주가 가까워졌다.
꼼꼼하게 더듬어 본 실속있는 기행이었다. 원래의 목적 - 잠깨워 줄 밑천을 마련한다는 -이 달성된 것은 물론이다. 전날 떠난 곳인데도 시청앞 불빛이 몹시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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