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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2 | 연재 [제 35회 백제기행]
천년의 시간여행 _ 선종불교의 중심지 실상사를 찾아서
(남원실상사, 백장암, 약수암 일대)
정진훈(2005-01-25 15:06:27)

옛것과 인심은 여전하더이다
 

 자신의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는 말도 있지만 다시 얻기 위해서 떠난다는 말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한곳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감만을 뜻함이 아니라 체험의 세계가 생겨남을 뜻하는 듯이 누구나 삶의 길을 걷고 있으면서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의 방향과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 소리도 흔적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한 발짝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것이 다가오고 그 의미를 깨닫는 자에게만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며 옛것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 때 인간의 참뜻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바쁜 생활만을 탓하다 지각생이 되어 백제기행 버스에 오르니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함께 나들이 가는 가족이 있어 흐뭇했다. 미륵사지 발굴관계로 인연을 맺은 윤덕향 교수님(그는 백제 기행을 주관하는 책임을 맡고 계셔서 처음 참가하는 낯설음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있었다. 93년 계유년을 마무리하는 백제기행 목적지가 실상사를 중심으로 유적을 답사하고 공부할 수 있는 여정이어서 일단은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더욱 이 직업상 실상사에 남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감회가 새롭고 한편으로는 마음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 씁쓸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인들의 지혜와 멋과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되어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창시절의 기분으로 기행길에 올랐다. 남원을 거쳐 지리산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먼저 백장암 답사길에 오르니 10여년전 문화재 도굴사건이 떠올랐다. 눈이 무릎까지 차던 한 겨울, 도굴꾼이 석탑과 석등을 무너뜨려 산산조각이 나 행정당국에는 초비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는 지금처럼 길이 잘 닦여있는 상태가 아니라 사람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소리길로 장비며 숙식도구 등을 인력으로 운반하고 야영을 해가면서 많은 기간을 정형외과 의사가 교통사고 환자를 수술하듯. 조각난 석재를 원형대로 꿰매고 접착하여 보이지 않는 부분은 부식되지 않는 철재로 고정하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여 성형한 후에야 원위치에 현재의 모습대로 세워놓을 수 있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이끼와 먼지옷을 입고 있는 형상만이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긴 날을 야영해가면서 보수했던 어려움과 문화재관리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열심히 메모하고 정리하는 모습에 현장학습의 연속인 백제기행의 위력을 실감했다. 세월의 무상함이야 어떻게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우리들은 문화유산에 대하 깊은 관심과 애착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현존의 가치만을 인정할 것이 아니라 영원히 후손에게 물려줄 소중한 문화유산 관리에 필요한 예산 지원과 그 분야에서 연구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노고를 위로하여 후원하는 정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된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비록 생명력은 없을지라도 유적의 숨결이 깊이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애정과 관심을 가져야 되겠다고 반성했다.
뱀사골로 가기 전에 인월에서 산내면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다보니 「백장암」이라 써진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일행은 차에서 내려 첫 기행목적지로 발길을 돌렸다. 백장휴게소에서 큰길을 버리고 산길을 따라서 3Km남짓 가다 보니 백장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보였다. 이 암자에 미처 들어서기 직전에 3층 석탑과 석등이 자리하고 있는 작은 구역이 담으로 돌려져 있었다. 국보 10호로 지정되어 있고 통일신라 하대인 9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백장암 석탑은 그리 크지 않은 석탑인데 그 조형의 아름다움은 우리나라 장식석탑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손꼽힌다. 이 석탑은 일반적인 탑들과 달리 기단이 없어 넓은 판석위에 탑신이 놓여있었고 탑의 옥신부분(탑을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 할 경우 방에 해당되는 부분)에는 각종 장식이 도드라지게 조각되어 있었다. 3층탑 중 1층 옥신의 4면에는 보살상과 신정상을 좌우에 2구씩 마치 방문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장식하였다. 그리고 2층 옥신에는 앉아 있는 천인상을 1구씩 장식하였다. 또 옥신위의 옥개석(지붕)의 아래에는 계단형태의 층급받침이 자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석탑의 경우에는 층급받침에 대신하여 연꽃을 배치하였다. 또 각층 옥신의 아래에는 난간이 돌려져있는데 난간기둥과 난간의 무늬까지가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탑의 본래적인 의미인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집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예술품으로 인식할 정도로 장식성이 강하다. 또 전형적인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계획된 구도와 난간의 장식이나 천인들의 다양한 모습에서 종교와 예술의 완성된 결합을 대표하는 것으로 뽑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탑 전체를 보살, 천인, 신장 등으로 장식하고 있는 이 이형석탑이면서 장식석탑이라는 점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 신라의 불교는 지나치게 호국적인 성격과 통일전쟁 과정에서의 기여도를 바탕으로 변질되어 이 같은 불교의 변질을 극복하기 위하여 원효 등을 중심으로 평민 대중을 위한 불교,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불교와 선종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박장암 석탑의 장식은 그 안에 모셔져있는 것으로 상징되는 부처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 같은 장식은 탑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법의 깊은 뜻을 깨우칠 수 있게 마련된 것이다. 즉 불교의 교리를 민중에게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장식이 사용된 것이 석탑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석탑의 아름다움을 눈과 마음에 담아 백장암으로 올라가 지리산 자락의 시원한 약수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시고 구름사이로 보이는 천왕봉을 바라보며 백장암을 내려왔다.
백장암 답사를 마치고 산내 소재지에서 모처럼 먹어보는 도토리묵 안주에 막걸리 한사발의 맛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잠시 정담을 나누고 실상사 입구에 서있는 중요민속자료 석장승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들었다. 사찰의 연혁과 여러 문화재에 대한 자세한 윤교수님의 특강을 들으면서 경내를 모두 돌아보았다. 고건축에 대한 기법과 용어와 상식 등을 설명해 주고 싶은 윤교수님과 한가지라도 더 알고 싶어하는 백제기행 가족의 진지한 태도에서 백제기행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실상사 일원은 사적104호로 지정되어있다. 도내에서 두 번째로 국보와 보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이 사찰은 서기 828년(신라 흥덕왕 3년)에 홍천국사(증각대사)에 의해 창간됐다. 신라시대 고승 홍척은 당나라에 유학을 가게되어 선종(宣宗)의 오묘한 진리와 법도를 이어받아 크게 도를 깨닫고 흥덕왕때 귀국했다. 흥덕왕은 그를 국승으로 초빙하고 왕 스스로 설법을 터득하게 되어 선종의 속뜻이 뛰어남을 인정하고 탄복했으며 마침내는 신라에서도 선종의 법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선종구산(禪宗九山)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것이 지리산에 자리잡고 있는 실상산문이다. 실상사는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화로 두 번에 걸쳐 화를 입었고 많은 승려들이 백장암자로 옮겨 숨어 지내게 되므로 규모가 축소되고 이후 중건으로 인하여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형되었지만 국보 1점과 보물 9점 기타 유형문화재와 약수암자에 목각탱화(보물 412호)가 있어 전국에서도 으뜸가는 문화재의 보고인 사찰이다. 선물보수로 인하여 잠시 옮긴 줄도 모르고 유명한 목조탱화를 보기 위해 약수암자를 찾는 등정(?)을 하게 된 것도 보람 있는 여정이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참가자는 힘든 등반이 헛수고로 그친데 서운함이 큰 듯했다. 산을 오르는 길에 즐겁고 정겨웠던 이야기를 떠올린다면 그 서운함을 충분히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실상사를 꼼꼼히 들러본 일행은 오는 길에 참가자 등이 나누었던 김을생 목기공장에서 뜻밖의 열띤 강의를 들었다. 바루(스님들의 식사그릇)와 제기 등 목기 만드는 방법을 좀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재래공법인 전통옻칠을 하게되면 방부제 역할을 하여 음식이 상하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상식과 옻칠그릇이 다른 그릇과 비교할 수 없이 우수한 그릇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김을생씨는 목기 만드는 장인만이 아니라 한학을 가르치는 해박한 지식과 판소리 한마디를 즉석에서 들려주시는 멋도 겸비한 타고난 장인이자 꾼이었다. 후손들에게 우리 얼을 심어주고 슬기로운 전통을 이어가는 달변의 강의로 참가자들을 매료시켰던 그는 몇 대에 걸쳐 전승되어 가는 이웃일본의 장인 정신을 칭찬할 줄도 아는 여우와 고집을 넉넉하게 안고있는 장인이다. 김선생의 주장대로 마음을 비울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 학문도 예술도 과학도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리를 터득한 것만으로도 그 시간은 소중한 체험이었다.
“목기의 본고장에서 목공예를 전공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며 사람이 태어나서 자기분야에 정성을 다하여 사는 것도 즐거운 일이거늘 이후에 자손들은 가업이 빛나도록 갈고 닦을 지어다”
해가 저물 무렵 즐거운 기행을 마치고 차안에서 기행소감과 뜻하지 않은 노래자랑이 이어지게 되었다. 마음이 마음을 찾아가는 곳에는 사랑과 정이 열리듯이 부담 없는 천년의 시간여행을 짧은 하루로 만족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전라도 땅을 밟으면 어디를 가도 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다음번 백제기행이 더욱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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