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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3 | 연재 [문화저널]
<제59회 백제기행>예의와 규범’ 의 새로운 길에 대한 깨우침 (옛집기행 ② /경상도 안동일대)
장교철 순창고 교사(2005-01-25 15:29:53)

이 땅 어느 곳인들 우리 옛사람들의 숨결이 묻어 있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 ‘나’ 하나의 삶 자체도 때론 거대한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경우도 많은데 여럿이 일궈낸 삶의 흔적은 무게를 더하여 공동의 힘으로 축적되어 이것이 구체화되면 확연한 역사로 남게 된다.
우리의 이러한 역사의 특수성을 알기 위해, 역사로 빛난 족적을 만나기 위해 낯선 국토를 만나러 간다. 98년은 ‘옛집’ 기행. 쉽게 가 볼 수 없는 안동이라서 그런지 신청자가 두 배가 넘어서 거절하느라고 애를 먹었다는 주최 측의 즐거운 비명을 서두로 차 안의 이야기는 시작됐다.
피폐되어 가는 정신의 빈곤을 온고지신으로 막음하려는 몸부림일 수도 있지만 나를 느끼게 하고 돌아보게 만드는 떠남. 누구의 말대로 ‘영원한 삶을 설레게 하는 것들’임은 분명하다. 이 설렘을 안고 아직 만나지 못했던, 만나보기 위해 애태웠던 낯선 안동.
개나리도 제대로 기량을 보이기엔 날씨의 협조가 비정했던 차가운 3월 하순이 미웠지만 겨울 잠바를 준비한 1박 2일의 여정에 일행은 모두가 들떠 있다. 차 안의 사람들은 적당한 역마살을 내보이며 ‘한 번도 안 가 본 안동’을 많이 상상한다.
우리는 안동을 들먹일 때마다 ‘양반문화의 보고’라는 말로 집약한다. ‘세월의 힘 세월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 퇴색한 고가와 재실, 늠름한 서원과 운치 있는 누정이 세월의 힘을 더해주는 추로지향의 고장. 전국 시&#8228;군 중 문화재 보유 1위. 조선의 이념인 성리학의 본거지. 조선 인물의 절반은 경상도, 경상도 인물의 절반을 차지한, 가문은 있되 지역은 없는 곳. 혈연은 있되 지역사회가 없는, 현 인물의 됨됨이 보다는 조상을 더 중시하는 곳. 신라권 문화에 속하면서도 경주의 불교문화와 차별성을 갖는 별도의 독자문화가 형성된 곳. 그리고 하회탈춤과 홍건적의 난을 막기 위한 것을 놀이화한 차전놀이,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공주를 위해 부녀자들의 눈물겨운 충의를 보여준 ‘놋다리밟히기’가 아닌 놋다리밟기 등 유교와 불교 그리고 민속 문화와 함께 안동포, 제비원소주, 안동식혜 등 의례문화까지 혼용되어 있는 이곳을 하룻밤 이틀 만에 알아채기란 개미 한 마리가 코끼리 발등을 돌아다니며 코끼리의 모든 것을 알고자 함에 다름 아니다.
‘전인미답’의 땅 안동에 닿은 때는 시내 불빛이 낙동강에 어른거릴 때였다.
방향감각을 잃은 우리는 다행히 구미중학교 최순규 선생의 길라잡이로 먼저 법흥동 칠층전탑을 찾았다. 규모가 장대하고 상승감이 돋보인 이 전탑은 높이 17.2미터로 우리나라 전탑 중 가장 큰 탑답게 일행 모두를 처음부터 주눅 들게 만들었다. 모전탑은 봤지만 오리지날 전탑은 처음이다. 같은 경상도 지역임에도 이곳이 특별히 전탑이 많은 것은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지역으로 고구려 불교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안동의 지질구조의 열악성으로 인해 화강석으로 석탑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흙으로 빚어낸 벽돌을 사용했을 거라는 설이 있지만 아직도 정설이 없어서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한다.
지척으로 비켜간 중앙선 철로의 시달림으로 인해 한쪽으로 기울어진 이 탑은 국보 중 가장 많은 시달림과 수모와 푸대접을 받고 있어 안동에 대한 첫경험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일제 강점기 때 기단부를 시멘트로 처발라 버린 볼썽사나움은 마치 우리 고장 미륵사지 석탑과 동병상련이었다.
늦은 저녁을 허겁지겁 먹은 우리는 늘 그래왔듯이 음식 맛을 일갈, ‘경상도 음식치고는 먹어줄만 하네’. 시장끼에서 비롯한 공복의 편미, 바로 이어지는 안동대 임교수의 강의는 안동을 가장 안동답게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간이었다.
예수의 산상수훈이나 호랑이 산천경개를 찾아 학문을 연마한 것은 ‘현장학문’의 중요성을 터득한 것이었음을 강조하며 우리의 교육도 이제부터 폐쇄적인 공간이 아닌 현장감있고 사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답사성 교육이 효과적이란다.
임교수는 안동지방의 억양을 적절하게 구사하면서 방언의 존속이 절대 필요함을 역설했다. 언어의 중앙화나 획일화는 민족문화를 엄청나게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고장의 언어를 적소에 사용하여 의미를 살려갈 때 지역문화가 살고 어휘도 풍부해진다는 주장이다.
바로 이어지는 편해문 선생의 ‘예천모내기만도리 퍼포먼스’는 소리 고장사람임을 자부한 우리들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잊혀져간 우리 것을 찾아 다시 복원하고자 하는 열정이 정말로 진지했다.
지역문화는 그 지역사람과 함께 할 때 가장 리얼할 수 있는 법. 그래서 어느 곳에 가든 그 고장을 대가 없이 지켜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눈물이 난다. 우리가 격달로 떠나는 이 행사도 이런 소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를 개치고 발견하기 위함이다.
1박 2일의 ‘노잣돈’이 아깝지 않게 하기 우해 새벽잠도 밀쳐두고 강행하는 팀은 ‘저널’뿐. 동틀 무렵 봉정사와 제비원을 해결했다.
의상이 영주 부석사에 있을 대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도력으로 날려 보내니 이 종이 봉황이 이 곳에 내려앉은 곳이라서 봉정사라는 설화를 갖고 있는 이 절은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극락전을 비롯 우리나라 목조건물의 계보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건축박물관이다. 남한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고구려식 건축양식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정한 맞배 지붕으로 된 간결하면서도 강건한 인상을 준다. 이는 고려 초 삼국시대 문화에 대한 복고풍조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기둥의 유려한 배흘림과 높지 않은 지붕이 안정감과 야무진 맛을 주면서도 간결하고 소박한 맛을 풍긴다. 여느 법당과는 다르게 가운데만 문을 내고 양쪽은 통풍과 채광이 되는 살창을 단 것이 특이하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내부를 직접 살펴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오는 길에 “제비원 마애석불이냐?” “아침밥이냐?”로 설왕설래. 안동을 대표할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 미륵불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일종의 간이역인 이 역원옆 태화산 기슭에 조성된 미륵불은 12.38미터의 바위에 괴체화 된 불상의 미련스러움이 없는 파격적이고 도전적인 지방적 성격의 전형적인 고려불상이다. 몸은 바위에 선각으로 새긴데 비해 머리는 다른 돌로 조각하여 얹어 놓았는데 몸체의 선은 비바람에 씻겨서 그런지 뚜렷하지 않았지만 얼굴의 윤곽은 뚜렷하고 힘있어 보인다.
바람결은 자꾸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봄날씨. 늦은 아침을 먹고 우리는 안동역전 전탑을 안타깝게 답사하고 35번 구불구불한 국도를 따라 한국 유학사의 큰 별인 퇴계 이황 선생의 훈김을 맡으로 도산서원으로 갔다 새로 막은 안동댐의 찰랑거린 봄 물결을 우로하고 도착하니 매화꽃도 벙긋하고 사당 앞에 서 있는 댓잎의 푸른 윤기가 봄 햇볕에 더욱 청정하다.
이 서원은 원래 퇴계가 60세 때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부엌까지 합쳐 소박한 세칸으로 만든 ‘도산서당’이었는데 1570년 퇴계가 세상을 뜨자 뒤쪽에 위패를 모시고 서원으로 승격시켰다. 뒤쪽으론 아담한 산등성이와 앞쪽엔 푸른 평원과 모래사장이 아름다웠다는데 지금은 만수된 낙동강의 푸른 물결이 넘실되는 상전벽해다.
퇴계 이황을 정점으로 영남학파가 진주 밀양까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저 검푸른 낙동강의 물줄기가 시원이지 않았을까.
10년간 제자를 길러내며 지방 사립학교로서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던 이곳은 한국 성리학의 요람이요 서원의 종주다운 위엄보다는 관공지로 윤색해놓은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조선 유림의 계파를 참고서보다 더 쉽게 풀이한 ‘저널’의 ‘국보’ 윤선생의 설명이 끝나자 우리는 ‘문화저널 백제기행’깃발을 기준으로 뒤편 노오란 산수유 꽃을 가미하여 합동 기념 촬영을 했다. 흔적을 남겨야 하는 의무를 다하며 숨가쁘게 다음 코스로 직행.
안동문화의 터를 일궈낸 5백만 평의 풍산벌 가장자리를 위회하여 비포장으로 들어서니 꽃산 허리를 S자로 휘돌아 나가는 낙동강을 왼쪽으로 기고 오르내리며 닿은 곳이 병산서원.
임란의 치욕을 헤쳐낸 서애 유성룡을 주배향자로 모신 이 서원은 절제 된 꾸밈과 단순하지만 전체 구성을 자연과 같이 하려는 조심스런 배려의 공간이 최적화 된 건물이다. 뿐만아니라 이 서원이 누리는 공간은 주변의 모든 풍광을 끌어안고도 남았다. 자연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자연을 가두거나 소유하지 않고 같이 누리려는 자연관을 각인시켜 준 기막힌 미학이다. 특히 존덕사 삼문앞에서 내려다보면 건물 지붕들 너머로 강이 보이고 강당 마루에 서면 만대루가 길게 펼쳐진 지붕 위쪽으로 위엄이 서려 있는 병풍같은 병산과 하늘이 보인다. 강물은 만대루 누각의 기둥사이로 찰랑거리고.
안동의 여유와 힘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곳.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끄덕없었던 조선시대 5대 서원중의 하나인 병산서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건축으로 한국 건축사의 백미로 꼽고 있다. 금방 다녀온 도산 서원의 학생들은 지극히 전형적인 아폴론적 사고의 학생들의 정서라면 이 곳 학생들은 자유분방한 디오니소스적 감성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세월의 아쉬움만 존재한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의 체취가 풍기게끔 관리하는 류시석 후손의 겸손한 안내를 듣고 있노라니 ‘씨’의 바탕을 알 것 같다.
사람과 자연이 같은 눈높이로 합치될 수 있음을 보여준 성리학의 건축물임을 재확인하며 다시 짬을 내어 백일홍이 질 무렵 이곳에 와서 ‘절제된 낭만의 미학’을 조용히 배워 가리라.
하회마을에서 안동의 향토식인 ‘헛제삿밥’을 먹고 나니 엊저녁 늦게 잔 피로가 기분 좋게 파고든다. 본래는 제사를 지낸 다음 음복하던 제삿밥을 그대로 밤참으로 먹던 것인데 제사를 지내지 않고 먹는 밥이라서 ‘헛제삿밥’이라 부른다. 이 음식의 키포인트는 성냥갑만한 간고등어. 밥을 다 먹고 난 어느 회원 왈 제삿밥이 주는 뉘앙스가 묘했던지 ‘제삿밥을 먹은게 어찌 맘이 껄쩍지근하네“.
답사의 즐거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지방의 향토음식의 별미를 챙겨먹을 수 있는 여유도 빼놓을 수 없다. 먹거리에 여유가 있었던 우리 지방 사람들은 타도에 가면 늘 음식타박을 많이 하는데 어찌 되었건 우리 음식 맛에 그네들 음식 맛을 강요하기 전에 그네들의 음식 맛에 동참하려는 배려도 필요하다.
촉박한 시간 때문에 부랴부랴 하회탈 공연장으로 직행.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탈춤굿으로 꼽힌 이 하회별신굿은 3, 5, 10년 마다 또는 서낭신의 신탁이 있을 때 치러지는 마을 안녕을 비는 마을제로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양반과 선비를 희롱하는 또 다른 기층민중의 변혁적 문화의 성격을 갖게 됐다. 상반으로 구분된 봉건사회의 허구를 뒤집어버린 물돌이 마을의 별신굿. 양반촌에서의 민중들의 흐벅진 해방감을 맛보았으리라. 마침 오늘 공연이 올 들어 처음이란다. 이미 놀이판은 인산인해. 말로만 듣던, 책에서만 보던 ‘하회별신굿’을 직접 볼 수 있는 행운이 고마웠다. 안동에 와서 이 굿을 다 보지 못하면 죽어서 좋은데 갈 수 없다고 엄포를 놓은 임교수의 말을 믿고 끝가지 보고 싶었지만 백정마당, 파계승 마당 등 4 마당만 보고 시간관계상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부지런히 가속기를 밟아도 전주에 가면 깊은 밤이 된다며 걱정이다.
워메 아쉬운 것.
백제기행의 두 번째 ‘옛집’기행.
종정사 극락적의 튼실함. 도산서원의 경제적이고 논리적인 배치. 자연과 함께 하는 앙상블이 치밀한 낭만적 구조를 마감한 병산서원. 오늘날 ‘집’을 그저 투자나 투기의 수단으로만 생각한 물신주의 사고방식에 굳어진 우리들에게 무언의 교훈으로 다가온다.
중심에 있든, 변방에서 서성이든 지나간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의연함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던 이 ‘안동의 역사’를 체득하기 위해 낯선 곳에서의 조용한 앎에 대한 기쁨이 함께 한 탁월한 선택의 시간이었다.
우리가 찾던 안동의 ‘집’은 비어 있었다. 그러나 이 ‘집’들은 지금도 예의와 규범의 새로운 길을 열어 보이며 정신의 역사를 계속해서 마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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