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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5 | 연재 [문화저널]
<제 60회 백제기행>옛집에 남아있는 그 오랜 역사의 편린들 _ 옛집기행 ③ (정읍․고창 일대)
이동희 전북대 강사 /사학과(2005-01-25 15:41:31)

문화유산은 옛 사람들이 남겨놓은 삶의 진솔한 흔적들이다. 그러기에 문화유산은 그 어떤 것이든 그 민족과 지역의 역사와 정신을 담고 있으며, 이름 없고 보잘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가 곧 존립과 보조의 가치를 지닌다. 문화유산 답사란 이런 옛 사람들의 흔적을 더듬어 나의 뿌리를 찾아보는 것이요, 현재의 나를 돌아보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번 백제 기행은 정읍&#8228;고창 일원의 김동수 고가, 무성서원, 피향정, 모양성, 신재효 고택, 선운사, 김성수선생 생가 등을 찾아가는 우리 고장의 옛집 답사로, 일정은 하루였다. 아침 8시 출발 시간에 맞추느라 조금은 부산했지만, 차창 밖의 들녘은 한가롭고 평온하였다.
윤덕향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처음 찾은 곳은 정읍군 산외면 오공리에 자리한 99칸의 대저택 김동수 고가였다. 완만하지만 듬직한 산자락을 뒤로 하고 그 앞에 큰 내와 너른 들판을 마주하고 있는 이 고가는 호남 대부호의 저택으로서 나무랄 데 없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평사낙안(平沙落雁), 지네혈(蜈蚣穴)의 대명당이라 하던데, 사람 살기 좋은 땅임이 분명하였다.
이 집은 1790년경 김동수의 6대조인 김명관(광산 김씨)이 건립하였으며, 지금까지 큰 보수 없이 원형이 보존되고 있다 한다. 현재 소유주는 김동수의 아들이라 하며, 집은 비어 있었으나 그 동네에 사는 일가친지가 관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200년이 넘게 주인이 바뀌지 않은 채, 원형이 보존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 끈질긴 생명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 집안의 고문서들이 그 궁금증을 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 모두 도둑맞았다 하니 아쉬운 일이다.
소박&#8228;검소&#8228;실용&#8228;여유, 이 집의 전체적 분위기는 그러했다. 솟을대문&#8228;행랑채&#8228;곳간&#8228;사랑채&#8228;안채&#8228;별채. 언뜻 보면 여느 저택과 다를 바 없는 99칸의 이 고가는 호남 대 부호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너무도 소박하였다. 사랑채 앞마루의 난간은 긴 목재를 기둥들 사이에 걸어 놓았을 뿐 아무런 꾸밈이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집주인의 검소함으로 다가왔다. 호남의 대부호요, 99칸의 대저택이라면 거드름을 펼 만도 한데, 그 거만함이 이 집에는 없었다. 200년을 버텨 온 저력이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고가의 토방은 여느 양반집과 달리 낮았다. 사랑채도 그랬고 안채도 그랬다. 양반집의 높은 토방은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지체 높은 양반이 아랫사람들을 부리는 데는 높은 토방과 마루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고가는 권위를 버리고 실용을 택했다. 조선말, 너도나도 양반이 되고자 아우성치고, 쓰러져 가는 권위를 붙잡느라 여념이 없던 사회에서, 권위와 격식이 아닌 실용성을 택한 이 고가는 분명 특이했다. 이 고가의 가옥구조가 풍수와 관련이 있는지는 몰라도, 어쩌면 변화하는 조선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솟을대문 옆의 행랑채는 독특하게도 대청마루가 놓여있었다. 윤교수님은 머슴들을 배려한 가옥구조라 하였다. 더운 여름 날 머슴들은 이 대청마루의 덕을 톡톡히 봤을 것이다. 머슴들에 대한 이런 배려가, 전라도의 비옥한 땅덩이가 가져다 준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여유와 나눔의 정신이 지금은 잊혀진 전라도 문화의 본질이 아닐까?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행랑채가 기층민들의 삶의 터전이고, 그래서 생활사의 한 부분을 밝혀 줄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고가를 나와, 뜻하지 않게 정읍분들이 준비한 돼지머리고기에 동동주를 걸치고, 칠보의 무성서원으로 향했다. 사찰에서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불당을 앞에 두고 강당을 뒤로 배치한 것에 반해, 서원은 강당이 앞에 오고 그 뒤에 사당이 자리했다. 불전이 화려한 것에 반해, 서원은 단순하고 장식성이 배제되었다. 건축양식도 그러했고 단청도 그랬다. 서원은 조선이 추구한 성리학적 세계가 구현된 곳이며, 그러기에 겉치레를 용납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신이 조선을 이끈 양반사대부들의 정신세계였다. 조선은 고려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바탕으로 세워졌고, 그것이 고려와 다른 검박한 문화를 낳았다.
무성서원은 태인군수를 지낸 신라의 최치원, 상춘곡을 지은 불우헌 정극인 등을 모신 곳으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전북에서는 유일하게 훼철되지 않은 이 지방을 대표하는 서원이었다. 무성서원은 전북지역 양반사대부의 여론이 결집되는 곳이었고, 정신적 구심점이었으며, 사회기강을 유지해가는 중심지였다. 그 뿐 아니라 최익현이 여기에서 의병을 소집하는 등, 무성서원은 조선말 의병항쟁의 중심지였다. 역사적으로 정읍은 아이러니컬하게도 500년 양반사회를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였고, 양반사회를 거부하는 동학농민전쟁의 발원지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무성서원은 그런 위엄과 역사적 비중을 잃어가고 있었다. 건물은 세월의 무게가 버거웠음인지 퇴락해있었고, 협소해진 서원 규모는 궁상맞기까지 하였다. 문화사업도 기업처럼 경쟁력 있는 주력업종을 키우는 것이 장사가 된다고들 하지만, 그 말이 이렇게 방치해두란 것은 아닐 것이다.
호남 제일의 정자라는 피향정은 태인군수를 지낸 신라의 최치원이 연못가를 거닐며 풍월을 읊었다는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 조선후기 현종대 건립된 것이라 한다. 일제를 전후해서는 면사무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 예전에는 정자 앞뒤로 상연지와 하연지가 있었다는 데, 일제 때 상연지를 메워 시장을 세웠고, 현재는 하연지만 남아있다. 그러나 그마저도 스레트 건물들로 인해 그 정취가 살아나지 않았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정자의 겉모습은 퇴색했지만, 그 옛날 선비들의 기개와 당당함은 저기 어딘가에 배어 있으리라.
피향정은 정자 자체의 배어남 뿐 아니라,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관련해서도 주목되어지는 곳이다. 조병갑은 자신의 아버지인 전 태인군수 조규순의 선정비를 세운답시고 1천여냥을 갈취해 고부군민들의 원성이 높았는데, 그 비가 바로 피향정에 있다. ‘현감 조규순 영세불망비’가 그것이다. 선정비의 뒷면에 병갑(秉甲)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으며, ‘갑’자는 누군가에 의해 뭉개져 있었다.
농민전쟁이 100여년 밖에 안되었으나, 농민전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당시의 유물들은 얼마 없다. 고부농민들의 원성이 사무쳤을 고부관아도, 만석보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황토현 기념관에도, 전봉준의 고가에도 농민군들이 직접 썼던 유물은 거의 없으며, 전봉준의 고가 그 자체도 미심쩍다. 그런 점에서 조규순 선정비는 당시 농민들의 분노를 말해 줄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산 증거 중의 하나이다. 자그마한 비에 불과했지만, 100년 전의 농민전쟁이 보다 가깝고 생생하게 다가왔다.
피향정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고창 모양성과 신재효 고택을 찾았다. 모양성(고창읍성)은 다른 군현의 읍성과는 달리 산성과 읍성을 겸한 성으로, 성의 모습을 완연히 갖추고 있는 몇 안되는 성 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지금의 고창이 고창&#8228;무장&#8228;흥덕현 등 3개현으로 나뉘어 있었을 때, 고창현의 자란이 모양성이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곳보다는 훨씬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양성에는 원래 총안(銃眼 : 총 활등을 쏘기 위해 성벽에 뚫려 있는 구멍)이 없었는데, 졸속하게 복원되는 과정에서 마치 수원성처럼 총안이 있는 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행정편의주의의 졸속한 문화재 복원 보수과정에서 빚어진 획일화 양상이 여기서도 벌어졌던 것이다. 이는 곧 모양성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같은 성이라도 무언가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사람들도 찾아오고 지역적 특색도 드러난다. 명승지의 특산품처럼 동네마다 다 같으면, 그 가치는 반감된다.
성 안 관리실 앞에는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도 있었으나, 이를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대원군이 아무리 국제정세를 잘못 읽었다 해도, 그 기개만은 높이 살만한 것이 아닐까?
모양성 앞에 신재효 고택은 현재 초가 한 채만 남아있다. 이 고택은 향리이며 재력가였던 신재효가 판소리 여섯마당을 정리하고 진채선 등 명창을 길러낸, 판소리사에 있어서 성지와 같은 곳이다. 전북이 국내만이 아니라 세계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문화상품이라고들 하는 판소리. 분명 판소리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두 사람의 명창이 아니라 전북의 풍토가 빚어놓은 산물이다. 흔히들 판소리를 한의 소리라 하다. 하지만 전(前)근대 사회에서 기층민들이 고통 받기는 여기나 저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 지방의 경제적 여유가 그 한을 판소리로 승화시킨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
고창의 또 하나 자랑거리는 선운사다. 추사 김정희가 쓴 백파율사비, 빼어난 두 분의 보살상, 검단대사의 비기와 관련된 마애불, 봄이면 붉음을 토하는 동백꽃, 그것들을 다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선운사는 거찰로서 그 위용을 뽐내기에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들른 인촌 김성수 생가는 그의 부와 명성보다는 작은집과 큰집이 낮은 담을 경계로 한 집처럼 살았던 가옥구조가 더 마음을 끌었다. 아마도 이제는 볼 수 없는 정경이라서 그런가 보다. 하루 종일 찌푸리던 날씨가 그제야 비를 뿌렸다.
전북지역은 오랫동안 승자의 편에 서있지 못했다. 백제가 멸망한 이래 전근대사회가 그랬고, 너무도 길었던 군사정권이 그러했다. 이로 인해 전북의 역사와 정신은 상당부분 왜곡되고 과거 속에 묻혀 버렸다. 그러나 그 뿌리는 그렇게 쉽게 잊혀지고 변질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저 옛집에, 숨겨진 역사의 한 편린이 남아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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