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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 | 연재 [제81회 백제기행]
낙원으로 떠난 짧은 여행 '보길도'
한상호 전주역사박물관 학예연구원(2005-01-25 15:59:55)

낙원으로 떠난 짧은 여행 ‘보길도’
여행이라는 단어에는 신기한 힘이 있다. 그 말만 들어도 설레고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들이 하나 둘 씩 머리 속에 그려진다. 비록 이야기로만 끝날지라도 마음은 이미 그곳에 가 있게 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알고 지내던 ‘H선생님’께서 금주에 보길도로 여행을 떠나신다는 말을 듣고 설레어 하던 내 모습이 영락없이 마법에 걸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동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미 일정이 계획되어 있어서 다음 기회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여행의 마법이 효험이 있었던지 2월 23일 12시, 금암광장에서 출발한 버스 안에 내가 앉아 있었다. 예상치 않았던 여행의 기회로 지각을 면치 못한 나는 일행에게 죄송한 마음을 자기소개로 대신하였다. 연로하신 어르신 부부, 선생님 내외분들, 여러 직장인들, 그리고 아이들이 우리 일생의 성원들이었다.
버스는 해남 땅끝 선착장을 향해 달린다. 이미 마음은 사진으로 보았던 보길도 풍경 안에 가 있어 주체할 수가 없다. 그리고 평소에 존경하던 ‘H선생님’과 동행하게 되어 더욱 기분이 좋았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일이 이렇게 즐거울 줄이야. 중․고등학교 때 수학여행도 즐거웠지만 사회생활 속에서 허덕이다가 해방된 듯한 느낌을 가지고 여행을 가게 되니 그 기쁨이란 마법에 걸린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광주 나주 강진 남창을 거쳐 4시간 정도를 달려 땅 끝에 도착하였다. 날씨가 화창하지는 않았지만 속도를 느끼며 달리는 기분과 보길도를 방문한다는 설렘은 사소한 것에 신경 쓸 여력을 주지 않았다. 드디어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저 바다만 건너면 보길도가 우리를 맞이하리라!

땅끝에서 4시 30분 배를 타고 보길도로 향하였다. 날씨는 흐려 큰 흥은 나지 않았지만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즐거움을 감추는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소주 한잔과 오징어 다리 하나에 취흥이 난 아저씨(보길도 주민)의 권주가와 춤사위는 시선을 끌며 웃음을 자아내기에 제격이었다. 한 시간 동안 배를 타고 갔을까 저만치 저물어 가는 저녁 그늘 속에서 보길도가 보였다. 바다에 안겨 행복해 하고 있는 보길도! 나만의 감상일지도 모르지만 나의 이런 환상들이 언제까지나 깨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버스와 사람들을 내려놓은 배는 다시 바다로 떠나갔다. 청별 선착장에 즐비하게 서있는 상점들의 불빛이 밝혀지고 있고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잠을 청할 숙소를 찾으러 움직인다. 우리 일행은 청별항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반찬이 걸지는 않았지만 진도 홍주의 안주로는 적당한 맛이 있었다.
우리 일행이 하루 밤을 청한 곳은 시인 강제윤(姜濟尹)님의 동천다려(洞天茶廬)였다. 동천(洞天)은 본래 신선이 산다는 명산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누구나 산중의 신선이 되는 것이며 신비롭고 경이로운 찻집으로 풀이해야 할 것이다. 손수 돌을 나르고, 나무를 세우고, 지붕을 얹어 지은 동천다려에서 주인장의 사려 깊은 강의가 있었다.
시인은 고인(古人)의 발자취를 비판하고 있었다. 고산(孤山)이 정계에서 쫓겨나 은둔생활을 하던 부용동(芙蓉洞)은 입신양명을 하지 못한, 어찌보자면 패배자의 한이 서려 있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을 강제로 부역을 시키고 개간을 시켜서 이런 아름다움이 배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그리스의 웅대한 신전(神殿), 남미의 마야문명처럼 미학과 환희 속에 묻혀있는 수많은 원혼들을 가엽게 여기고 있듯이 강제윤 시인 또한 보길도의 아름다움 속에 서려있는 쓰디 쓴 노고를 반추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동천다려의 대부분 건물은 당신이 직접 건축한 시설들이었다. 손톱에 때가 끼고 햇볕에 얼굴이 그을리는 노고 없이 보길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었음이리라. 나의 피와 땀이 참여되어야만 진정한 미(美)를 그려낼 수 있고 그것이야말로 진미(眞味)라는 진리를 젊은 시인은 말하고 있었다.

밤은 깊어 보길도는 더욱 고요하기만 한데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술을 마신다. 온방을 가득 메운 책을 읽는다. 그렇게 첫날밤은 마무리가 되었다. 여행 온 기쁨과 설렘에 마음은 풀어져 서로가 친구 되었고, 기울인 술병에서는 나와 너의 한 자락 인생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좀더 자숙(自肅)하여 독서하는 이의 눈빛에는 내일의 희망이 보이는 듯 하였다.
방바닥이 뜨끈뜨끈하여 참을 수 없었음도 있었지만 새로운 잠자리가 설었음인지 새벽에 눈이 떠졌다. 흥분과 흥미 속에는 피곤도 그만큼 누적되는 것인지라 사람들은 여기가 보길도 인지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다. 지난밤의 왁자지껄한 소리는 간 데 없고 고요한 새벽이 나를 맞이한다. 만물이 아직 활동을 개시하기 직전의 고요한 시간이다. 피로와 수면(睡眠)의 혼돈세계에서 빠져 나오는 기쁨의 순간이다. 내 몸의 오장육부는 이제야 비로소 보길도의 신선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바다를 건넌 몸End이가 동천다려 작은방에 앉아 세상시름을 무감각하게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였다.
청별항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일행은 예송리 해수욕장으로 이동하였다. 청별 선착장에서 동쪽으로 5km 정도에 위치해 있는 예송리 해수욕장은 그야말로 한 폭의 수채화이었다. 타원으로 그어진 해안선과 해변에 매어진 작은 배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펼쳐진 양식부표들과 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산중턱의 마을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특히 다른 해수욕장과는 달리 흑명석(黑鳴石)이 펼쳐져 있는 해변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모래바람처럼 날려버렸다. 보길도 십경의 하나인 예송 흑명석을 밟는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씩 넓은 돌을 집어서 물수제비를 뜬다. 파란 수면위로 날아 오른 검은 조약돌은 세 네번 물을 때리고는 감추어진다. 해변에 매인 작은 배에 오른 두 연인은 사진을 촬영하며 즐거워하고, 아이들은 예쁜 조약돌을 탐하며 양손 가득 돌을 들고 있고, 추억을 풀어놓은 중년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해변을 거닌다. 여러 모습들이지만 우리는 모두 예송 흑명석을 밟고 있었다. 흑명석은 공감과 사랑을 만들어 주는 마법의 돌인지도 모르겠다.

전망대에 올라 예송리 해안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촬영하였다. 어깨를 마주하고 앞에 앉고 뒤에 서고 옹기종기 둘러서서 찰칵! 인물들이 좋으니 배경이 중요치 않고, 배경이 좋으니 인물은 더욱 살아나는 이치라 사진이야 보지 않아도 명경임이 틀림없다.
환한 햇살이 차창을 투과하여 눈꺼풀을 매만진다. 뒤로 뒤로 멀어지면서 산굽이를 돌아서서니 이젠 보이지 않는 예송리 해수욕장,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동천다려 부근에 있는 세연정을 향해 이동했다.
세연정(洗然亭)은 고산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를 창작하고 읊었던 낭만의 공간이다. 넓은 돌로 개울을 막아 물을 가두고, 작은 산을 만들어 동백을 심고, 너럭바위 사이에는 듬직한 정자를 앉혔으니 사시사철 언제든지 계절의 풍미를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세연지 연못의 물로 마음을 정갈하게 씻어내고 자연의 너그러움과 의연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세연정은 그 옛날 고산이 남겨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정치 세계에서 배척받고 쫓겨나 그 설움과 외로움을 이겨냈던 고산은 세연정과 아름다운 보길도가 벗이 되어 주었기에 괴로움을 견디어 냈던 지도 모른다. 은둔생활을 위해 따뜻한 남쪽을 택했던 그는 보길도에 반하여 온 마음을 줘버렸고 남은 여생을 보길도를 위해 살아갔다고 한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던 사내 대장부, 더욱 아름답게 꾸며주고 보살펴주고 아껴주었던 정열의 사나이, 간절한 마음을 한 자락 시조에 표현하여 노래하였던 멋진 남자, 미수(米壽)의 나이에도 그 마음변치 않았으니 고산이 보길도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알 수 있다.
시조 문학의 대가이자 멋진 남자 윤선도의 대표적인 작품 [산중신곡(山中新曲)]에는 자연에 대한 동경이 농후하게 나타나 있다. 그의 [산중신곡] 중의 오우가(五友歌)를 보면,

내 버디 몃치나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밧긔 또 더 하야 무엇하리

라 하여 물,돌,소나무,,대나무,달의 다섯 친구를 벗삼아 인생의 고요한 즐거움을 맛보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보길도를 배경으로 지은 40수의 단가(短歌)인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는 출범에서 귀선까지의 과정을 조리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생산자로서의 어부가 아니라 가어옹(假漁翁)으로서 강호자연을 즐기고 유람하는 입장에서 지은 작품이지만 인생의 고락(苦樂)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지은 시조라고 생각된다.
소요음영(逍遙吟詠)하며 세연정을 걷노라니 고산이 바라보았을 바위와 연못의 수련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시간은 흘러 고인은 이제 없지만 자연과 예술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그분의 감정을 이곳 세연정에서 느껴보는 것이 참다운 보길도 여행이라고 생각되었다.
현재는 부항리라 불리우는 이곳을 고산은 부용동(芙蓉洞)으로 명명하고 격자봉 아래 집을 지었다고 한다. 흔적만 남아있는 낙서재(樂書齋)는 초목만 무성하고 지금은 세연정과 동천석실(洞天石室)이 당시 윤선도의 풍류를 말해주고 있다. 동처넉실은 낙서재로부터 정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1km 지점 해발 120m 에 위치하고 있다. 고산은 이곳을 부용동에서 제일의 절승(絶勝)이라 하여 정자를 짓고 차를 흠향하며 시가를 읊었다고 한다.

부용동에서 이동하여 우리는 동천석실 아래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려 일행은 등산을 시작하였다. 높은 위치는 아니었지만 올라가는 산길이 평이하지 만은 않았다. 손을 잡고 나뭇가지를 잡고 바위를 기어오르니 어느덧 정자가 보인다. 당시에 지은 건물은 아니고 복원해 놓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운치는 여전하였다. 큰 바위에 앉아있는 정자에 앉아 격자봉(格紫峰)을 바라본다. 둥근 능선은 논밭을 감싸고 있고 아늑한 대지는 봄기운을 머금고서 싹을 틔울 준비가 한창이다. 선선한 산바람이 분다.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받으며 향이 좋은 차를 마셔도 좋을 것 같다. 일행이 모두 올라오고 단체 사진을 촬영했다. 바위에 올라앉은 연인들도 카메라에 사랑을 담는다. 모두가 즐거운 모습이다.
산을 내려와 골짜기에 물에서 가볍게 세수를 하였다. 겨울이라 물의 양이 적었지만 땀을 씻어내기에는 충분하였다. 손을 씻고 다시 한번 동천석실을 바라보았다. 이후 언제야 다시 올 수 있을지 가늠해 본다.
버스는 망끝 전망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였다. 청별항을 거쳐 바다를 바라보며 달렸다. 오른쪽에는 바다가 보이고 왼편에는 산자락이 드리워져 있다. 바다에는 양식장에서 일하는 어부들의 모습이 보이고 산자락에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들의 조상묘가 안치되어 있다. 섬과 바다에서 일평생을 살다가 바다를 보고 누운 사람들, 풍수를 따지고 묘혈을 따져서 안장하기보다는 내가 일했던 터전과 내 일생이 담겨 있는 바다를 보고 있기를 바랬던 사람들…. 마늘밭과 보리밭이 펼쳐져 있고 돌담과 대숲이 간간이 보인다. 페인트를 칠해 울긋불긋한 지붕들도 바다를 향해 열려있고 그 바다 위에는 조상의 후손들이 오늘도 생계를 위해 일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승과 저승, 생과 사의 공간이 어우러진 보길도, 작은 섬 하나에 이리도 가깝게 철학이 있으니 절로 사색에 잠겨든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무념에 젖어든다. 차안이 조용해진다. 다른 분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일까.
20여분을 달려 망끝 전망대에 도착하였다. 절벽 아래에는 낚시하는 아저씨가 보인다. 망망한 바다와 그 위에 빛나는 태양, 무엇을 바라보는 전망대란 말인가. 어느 곳을 보아도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대, 바다라는 깊은 존재를 바라보는 전망대, 그 깊이에 내 모습을 담그어 보는 전망대, 사색과 감상의전망대로 느껴졌다. 보길도 기행의 마지막 경유지라는 생각 때문일까 좀더 차분해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쉬운 보길도 여행, 1박 2일의 짧은 시간 속에서 내가 보았던 것들과 내가 느꼈던 것들이 하나씩 바다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아쉬움 들은 바다 저 멀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변하여 희망으로 다가온다. 언제나 여행의 마지막은 아쉽고 서운하지만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희망과 이제는 다른 곳으로 가보리라는 야망이 있어서 아쉬움을 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희망과 야망 속에서 보길도 기행은 마무리가 되었다.

12시 40분 배를 타고 뭍으로 나가기로 하였다. 어제 들어올 때 타고 왔던 같은 배였다. 실제적으로 여행한 시간과 경유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여행을 한다는 기분만은 최고였다. 아스라이 멀어지는 보길도, 강제윤 시인의 ‘보길도’에서 말하고 있는 한 구절이 생각난다.

“배가 떠난 뒤 물길이 닫히고
물밑으로 가라앉는 보길도
기억하라
천 번을 헤어진 뒤 천 번을 다시 만나리“

이제 조금 있으면 동백꽃이 만발하여 보길도가 울긋불긋해질 것이다. 그리고 큼직한 눈망울처럼 맑은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면서 가는 봄을 아쉬워 할 것이다. 동백나무야 사철을 반기고 있지만 붉은 꽃잎은 해마다 이맘때가 아니면 볼 날이 없으니 우리가 여행을 제대로 온 것이 틀림없다. 이제 나는 보길도 동백꽃에게 약속을 한가지 해본다. 지금은 너와 헤어져 다음을 기약하지만 이후 너의 모습이 붉게 떠올라 보길도를 물들일 때면 내 다시금 이 배를 타고 와 너를 아끼고 사랑해 주리라. 그리고 나의 약조가 천년이 아니라 만년이라도 네가 있고 내가 있다면 영원하리라.
여행의 끝은 귀가로 이어진다. 다시 돌아갈 돌아올 곳이 있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는 집이 그리웁다.


한상호 / 1977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오는 5월 개관을 앞두고 있는 전주역사박물관 학예연구원으로 근무하며 공부와 현장실습을 병행하느라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이번 백제기행에는 처음 참가, 벼르고 벼르던 여행이라 그 감동이 남달랐다는 감성을 함께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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