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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 | 연재 [문화저널]
<제 97회 백제기행>해남, 강진일대
김병훈 컨티뉴 기획실장(2005-01-25 16:13:52)

문화저널의 편집디자인을 맡고 있는 디자인 회사의 일원으로써 백제기행이 있다는 걸 여러해 전부터 알고는 있었으나 참가해본적은 없었다. 바쁘다는 등등 핑계는 많았지만 이번만은 전 직원이 다 함께 시간을 내기로 했다. 바쁜 일은 서둘러 진행하고 미룰 일은 미루기로 했다. 
토요일 오전을 바삐 정리하고 차에 올랐다 얼굴들은 모르지만 서로 친절하게 인사를 하며 버스는 움직였다. 이번 백제기행을 설명해주시고 이끌어주실 선생님은 이흥재 사진작가이자 전주대 교수님이시었다. 전에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린터라 더 반가웠다. 토요일 오전 일처리를 문제없이 해야 한다는 긴장감이 의자에 기대는 순간 풀려 스르르 눈이 감겼다. 어느 정도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 그렇게 긴 배추밭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남도의 푸릇한 배추밭을 화제로 두런거리는 우리에게 차가 멈춘 곳은 해남 우항리 공룡 화석지였다. 석유매장을 확인하기 위해 지질탐사를 하던 중 발견되어 알려진 이곳은 8천 3백만 년 전 형성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물갈퀴 달린 새 발자국1000여점과 익룡 발자국300여점 그리고 공룡발자국 500여점이 한 지역에서 발견된 세계유일한 곳이란다. 하지만 우리가 본 것은 고작 새 발자국 몇 개였다 토요일 오후5시인데도 그곳의 관리자들은 문을 다 걸어 잠그고 가고 없었다. 잘 지어진 건물 안에 갇혀있는 발자국은 구경도 못하고 우리는 벌판만 둘러보다 돌아 나왔다. 그저 그런 안일한 관리가 한심할 따름이었다. 아직도 해는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노을은 붉게 환한데 우리는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남도까지 오는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오늘은 그냥 여장을 풀기로 했다. 대흥사 초입에 유선여관은 처음 일정을 망쳐버린 우리의 표정을 환하게 해 주기에 흡족했다. 아니 나만 더 흡족했는지도 모른다. 전통한옥에 방방마다 둘러쳐진 채색병풍과 서예액자들 고가구들…. 금세 조선시대 어느 양반집으로 하룻밤 묵어가려는 선비가 된 기분이었다. 저녁식사도 좋았다. 정갈한 한정식에 가지런한 젓갈종지들과 여러 나물들을 한상 푸짐하게 얻어먹은 우리들은 포만감에 술이나 한잔하자는 누군가의 말에도 그저 눕는게 좋았다. 
다음날 일정이 빡빡한 터라 일찍 자리에 누웠다. 세상 복잡한 일상사를 뒤로하고 일주일만 틀어박혀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고단한 여행객에게는 아침도 빨리 왔다. 이른 시간에 아침밥을 얼른 해치우고 드디어 대흥사에 올랐다.
지금은 문화재청 장관이 되신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은 지 거의 10년 만에 책으로만이 아니 직접 대흥사를 둘러본다는 설레임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이 머문 곳은 옹기종기 자리 잡은 부도 밭이었다. 직접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초의선사 부도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맥이 끊어져가던 차 문화를 일으켜 (동다송)같은 명저를 남기며 평생을 대흥사에 머물며 정진하신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절 입구에 다다라 산을 둘러보니 절경이고 절을 둘러보니 아늑했다. 
설명을 하시는 이흥재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다른 절의 가람배치와는 다르게 계곡을 사이로 남원과 북원을 갈라 자연에 거스름이 없이 공간배치를 하여 아늑하면서도 호방함을 잃지 않는 빼어난 배치라고 설명해주셨다. 아는 만큼 느낀다는 말이 실감나게끔 이흥재 선생님의 설명은 자세하면서도 귀했다. 우매한 우리들이 절을 봤다면 그저 휘휘 둘러보고 나왔겠지만 꼼꼼한 설명 덕에 제대로 답사를 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다른 관람객들도 선생님의 설명을 따라 움직였다. 
대웅보전 현판을 쓴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를 비판하며 썼다는 추사의 무량수각. 나중에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나면서 자신을 낮추고 다시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을 걸게 했다는 그 옛날 조상들의 운치와 솜씨를 직접 눈으로 보니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원교의 가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글씨와 추사의 고위양반의 여유와 풍만함을 볼 수 있는 글씨를 번갈아 보며 대가의 경지를 한껏 즐겼다. 서예박물관이라는 별명처럼 대흥사는 대웅보전, 천불전, 침계루를 쓴 원교 이광사와 무량수각을 쓴 추사 김정희 외에도 가허루는 호남명필 창암 이삼만의 것이고 표충사는 정조대왕의 친필이니 그것만으로도 대흥사를 온 값어치는 충분히 한 것 같다. 
서산대사의 금란가사와 발우가 이곳에 봉안되어있으며 사찰 안에서 보는 유교사당인 표충사까지 대흥사는 그 자체가 보물인성 싶었다. 더 머물고 싶어도 다음일정 때문에 돌아 나오면서 이번에는 배움의 대흥사를 보았고 다음에 올 때는 마음으로 느끼러 꼭 다시 오리라 마음먹었다. 그때도 꼭 유선여관에 머물고 싶은 건 당연했다.
다시 차에 올라 백련사를 보러갔다 그러나 절은 온통 공사 중이었다. 원묘스님께서 백련결사를 조직하여 천태종의 법맥을 이어간 내력을 설명하시는 이흥재 선생님의 이야기도 어수선한 분위기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백련사 대웅전 왼쪽 뜰에서 본 바다 풍경만은 일품이었다. 점점이 섬들이 바다와 함께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는 걸어서 갈수 있었다. 다산초당 가는 길에 동백꽃 숲은 내륙에서는 보기 힘든 또 다른 볼거리였다. 그 동백꽃 숲속에 몇 개의 단정이 자리한 사리탑은 붉은 꽃과 함께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여기저기 떨어진 붉은 동백을 하나씩 주워들고 오솔길을 여유롭게 거닐다 다다른 다산초당은 초가집은 아니었다. 원래 정약용 선생 시절에는 짚을 엮은 초당이었으나 50년대 그 후손들이 지금의 번듯한 집들을 지었다고 한다. 
다산초당안의 초상화는 여러 책에서 본 그 초상화였다. 그분이 새기셨다는 정석이란 글씨와 뜰 앞에서 차를 달이셨다는 넓적한 돌은 목민심서 등 여러 저서를 지으시던 그분을 간접으로나마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거기서도 추사가 썼다는 보정산방과 다산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현판을 볼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옛 선인들도 학식과 경륜이 쌓이면 서로 알아보고 교류하며 더 높은 경지를 서로 배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추사만 해도 남도의 여러 곳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대흥사를 시작으로 많은 것을 보고 나니 무척 배가 고픈 우리들은 버스기사님이 추천해주신 한정식집에서 푸짐한 대접을 받았다. 전주의 한정식이 전국최고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남도의 한끼 한끼도 기대를 낮게 해서인지 생각보다는 훨씬 좋았다. 겨울이지만 남도의 12월 중순의 그 일요일은 봄 같았다. 너무도 푸근했다. 자판기 앞에서 커피를 한잔씩 나눠 마시고 비싼 입장료를 내고 간 청자 박물관은 그저 그랬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구태의연한 전시관이었다. 강진의 그 유명한 고려청자를 느끼기에는 와닿는게 별로 없었다. 좀더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기획과 전시효과를 극대화할 방안이 아쉬웠다. 오후가 되고 갈 길이 먼 우리의 마음이 다급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가본 무위사는 마음이 다급하던 우리에게도 만족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다른 절에 비해 화려하지 않고 기교를 부리지 않아 더 좋았다. 너른 뜰에 맞배지붕을 단아하게 하고 자리 잡은 극락보전 하나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우선 선생님의 해설에 따라 조심조심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천에 그림을 그리는 탱화가 아닌 고려불화의 전통을 이어받은 무위사 법당안의 후불벽화는 불상 뒤를 꽉 채우며 아미타여래와 양옆에 협시보살 그 위로 6인의 나한상을 배치하였다. 후불벽화 뒤쪽에도 관음보살께 물음을 구하는 동자를 그린 벽화가 있었다. 이흥재 선생님의 설명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벽화가 있는 법당안의 분위기는 아늑하고 사람의 마음을 차분케 하는 신비감이 있었다. 그것만으로 족했다. 
밖으로 나온 우리에게 이흥재 선생님은 극락보전 측면은 꼭 보아야한다고 하셨다. 몬드리안의 면 분할 그림만이 친숙한 우리에게 조화로우면서도 그 큰 절을 단정하게 보이게 하는 분할의 매력은 현대의 디자인을 업으로 하는 나에게는 다른 깨달음을 주었다. 가까이서 보고 멀리서 보고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는데 우리의 마지막 답사장소이니만큼 전체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모두들 모여서 손짓들이다. 환하게들 웃으며 마지막인 아쉬움을 담아 사진 한 장 찍고 전주로 향했다. 모두들 피곤한지 전주까지 오는 동안 잠 속에 빠져 들었다. 
아쉬움도 많은 기행이었다. 짧기도 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남도 땅을 두발로 답사를 하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우리 땅을 그렇게 자세한 해설을 들어가며 둘러보는 자리에 참석할 수 있어 좋았다. 석굴암보다 돈황 석굴이 크지 않느냐. 경복궁보다 자금성이 크지 않느냐. 이러한 무식한 마음으로 살아온 나를 반성하며 우리의 아름다움을 많이도 배웠다. 우리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우리가 더 아끼고 사랑할 때 다른 이들도 우리를 더 평가해 줄거라 는 말이 세삼 와 닿는 답사였다. 며칠간은 새록새록 남도 땅이 생각나리라 절집의 추녀 끝 풍경, 약수물 소리, 한적한 오솔길 그리고 좋은 일행들도….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 서두에서 조선시대 한 문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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