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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 | 연재
얘기보따리의 소리로 엮는 전주이야기 완산아이가
관리자(2011-01-06 14:34:52)

얘기보따리의 소리로 엮는 전주이야기 


완산아이가 가엽구나! 

완산아이, 애비 잃고 눈물짓네 이때가 어느 땐고, 신라 말이었던가 보더라. 

백제부흥을 외치며 전주 땅에 입성하는 사내가 있었으 니. 
훗날, 전주고을 백성들이 완산의 아들이라 이르던 견 훤이라. 
청년 견훤, 전주지세 산자수명 살핀 연 후, 호기롭게 노 래를 허는디. 

 창끝인가 칼끝인가 천장만장 방패인가 번뜩이는 흑운편모 까마득히 치솟고나 젊은산맥 단단하게 발돋움을 하였으니 뉘라할손 천년도읍 품어안지 않을손가 견훤의 노랫소리 고덕산 기린봉 남고산 승암산 중바우 온고을에 메아리치니, 전주부성 백성들이 간절한 소망으 로 반겨 맞아 화답하기를 빼앗기고 능멸당한 백제문명 되찾으소 서럽고도 찬란했던 백제의꿈 이루소서 백제같이 강성하며 백제같이 태평성국 찬연하게 융성했던 천년고도 완산이여 고덕산성 남고산성 동고산성 전주완산 산몰랭이마다 성 첩들은 첩첩이 싸여갔건만, 가련완산아 실부비련주. 

가엽 구나 완산아이 애비 잃고 눈물짓네. 하늘이 편들지 않는 역사를 어이 할거나. 반만년의 한반도서 반백년의 짧은 역사, 꽃잎처럼 피었 다진 수도지만, 어찌 성세의 백제를 우리의 자랑이라 말하 지 않겠는가. 전주완산 후백제는 다함없는 꿈을안고 백제고을 하늘가에 순결한넋 되었지만 큰비바람 불더라도 결코죽지 않더이다 호기롭게 툭툭털며 푸른넋이 되더이다 동고남고 억센등척 시린성벽 무너지고 천년세월 푸른이끼 서런역사 묻어놓고 일어서다 부러진꿈 분하고도 서러워라 쌀꽃처럼 일어섰던 천년영웅 견훤이여 쌀꽃처럼 일어섰던 천년영웅 견훤이여 

*가련완산아 실부비련주(可憐完山兒. 失父沸連酒). 삼국유사 권 제2, 후백제 견훤 [창작배경] 황간견씨(黃磵甄氏)의 시조가 된 견훤은 아자개(阿慈介)의아들로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현재 문경시 가은읍)에서태어났다. 
『삼국유사』에는 견훤의 출생에 관한 설화(구인생(蚓生)설화)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옛날 광주(光州) 북촌(北村)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에게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이 아버지에게 아뢰기를 밤마다 자색(紫色)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자고 간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그 남자의 옷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아 두라고일러서 딸이 그 말대로 했는데, 이튿날 아침 실을 따라가 보니, 북쪽 담 밑에서 실 끄트머리가 발견되었는데, 바늘은 큰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얼마 후부터 그녀에게 태기가있어서 아들을 낳았는데,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이름했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견훤이 아직아기였던 시절, 아자개가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어머니는 아자개에게 식사를 갖다 주려고 어린 견훤을 나무 아래 잠시두었다. 그랬더니 그 사이 호랑이가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먹였다고 한다. 타고난 용맹과 지략으로 승승장구하던 견훤은 929년 고창(古昌지금의 안동)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크게패한 뒤 기울어갔다. 게다가 왕위계승 문제로 맏아들 신검(神劒)에 의해 금산사(金山寺)에 유폐 당하는 수모를 겪은 견훤은 결국 왕건에게 투항하였고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하게 된다. 그러나 왕건이 자기보다는 신검을우대하는 것을 보고 분을 못 이겨 앓다가 황산(黃山충남 논산군 연산면) 불사(佛舍)에서 등창이 나서 죽었으니 견훤의삶이 얼마나 아이러닉한가.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왕궁터로 알려진 동고산성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44호로, 1980년도에 처음 그 규모가 파악되었다. 그곳에서 전주성 명련화문와당(銘蓮花紋瓦當)이 발견됨으로써 성의 명칭을 알게 되었으며, 그 연화문 형식을 토대로 이 성이 신라 말 고려 초에 축성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시축 연대가 후백제 견훤왕의 완산입도(完山立導)의 시기와맞아 떨어짐으로써 견훤왕궁지에 대한 오랜 구전이 허구가아님을 알게 되었다. 

산성은 능선을 내성곽으로 하고 그 바깥쪽으로 회랑도를 설치하였으며 그 외변에 석축을 쌓은 수법으로 성벽의 높이는 대략 4m 내외가 된다. 성곽의 크기는외곽성의 주위가 1,588.3m, 동서축의 길이가 314m, 남북측256m, 북쪽 날개성 길이가 112m, 남쪽 날개성 길이가123m에 이른다. 건물대지는 성내 동쪽 경사면을 3단으로 깎아 반월형의 대지를 만들었는데 그 중앙에 주건물이 있었다.

서기 900년에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한 후백제 왕궁터의 모습은 그러나 역사의 퇴적층이 두껍게 쌓여 그 실체를온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후백제 도읍으로 버텨낸 37년의세월은 그렇게 천년의 세월 앞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지만산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군데군데 당시 성벽의 모습을 볼수 있다. 

여기저기 박혀 있거나 굴러 떨어진 돌들이 모두 동고산성의 든든한 버팀목들이 아니었을까?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문득 천 년 전 어느 이름 없는 백제 병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지금은 등산로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는 능선이 당시 후백제 파수꾼들의 이동로였을 것이다. 성곽에 서서 전주땅을 내려다보던 병사들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거기에는두고 온 처자식들이 있었을 테고, 거동이 불편한 병든 노모의 굽은 잔등이 있었을 것이다. 

하여 아침저녁으로 내 집 굴뚝에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를 보면서 식구들의 안부를 확인하였겠지. 하지만 돌아서서 슬그머니 눈시울을 붉혔을 늙은 병사를 생각하면 천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견훤왕궁지에 무성하게 돋은 풀들을 손바닥으로 쓸어보면문득 역사의 무상함을 깨닫기도 한다. 해마다 때가 되면 풀과 나무들은 잎을 피우고 꽃을 매달지만, 그때 산성을 쌓고밤낮으로 파수를 서던 전주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패자에 대해 가혹하리만치 인색한 우리 역사의 페이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름 없는 백제 사람들. 그 순정한 정신과 영혼이 무성한 풀잎으로 태어나는 건 아닐까.시퍼렇게 물오른 풀잎 하나를 입에 물고 잠시 눈을 감으면,천 년의 세월을 가슴에 묻고 잠들어 있는 동고산성의 견고한모습이 환영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바람이 숲을 스쳐가는 소리가 그때 백제 군사들의 함성처럼 골짜기에 오래 메아리친다. 그 함성 소리에 천 년 전 백제 사람들이 역사의 퇴적을훌훌 걷고 벌떡 일어설 것만 같다. 얘기보따리 : 문신, 신귀백, 이병천, 최기우 지난주 소개된‘전주한지가’의 작가는 우석대 곽병창 교수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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