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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 | 연재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관리자(2011-03-04 18:31:34)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독어권 한국영화 순회상영 2


1년 3개월 진통이 가져온 결실, 한국영화 날개 달다 - 임안자 영화평론가 


국제화 시대에 맞부딪친 프린트 확보 - 지난호에 이어 프로젝트 준비의 마지막 단계는 영화의 출처를 확인하는일이었는데, 그건 한국의 영화진흥공사 국제부에서 처리할일이었다. 진흥공사의 국제부는 내가 페사로 영화제의 한국영화 회고전을 준비하는 동안 1991년 11월 초에서부터 5주간 동안 날마다 드나들던 곳이어서 실무진을 다 알고 있었기때문에 연락은 쉽게 이뤄졌다. 


첫 모임은 1994년 2월 베를린영화제 기간에 마켓 부문에 자리 잡은 영화진흥공사의 사무실에서 코린느와 크리스틴 그리고 내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고, 그 자리에서는 프로젝트의 발전상황에 대한 전반적인정보를 주고받는 것으로 모임은 간단히 끝났다.그리고 3월 초에 나는 남편과 함께 어머니한테 가는 길에틈을 타서 진흥공사를 방문했다. 윤탁 사장과 국제부 부장이덕상 그리고 이경렬 실무자 등 몇 명이 모임을 가진 자리에서 나는 한국과 스위스 정부의 지원 사항과 프로그램에 실린 12편 영화의 명단 그리고 예비중인 책자의 출간에 대한보고를 했다. 그날 모임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12편 영화의 배급권에 대한 문제였다. 


옛날에는 해외 회고전에 초청되는 영화들에 대해서는 제작자나 배급자의 합의를 거치지 않고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려 보내면 됐었다. 그러나90년대에 들어 영화의 국제화가 한국에서도 시작되면서 영화의 소유권은 새로운 법에 따라 배급자들에게 돌려주게 됐다. 그런 과정에서 배급권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아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그러나 내가 당면한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한둘을 빼놓고는 독어권의 회고전에 대한 배급자들의 반응은 심드렁했었다. 진흥공사 실무자들의 말을 빌리면, 한국영화 해외홍보 차원에서는 다들 동의를 하면서도 비상업성의 순회상영이어서 이윤도 별로 없는데다 6개월에 걸치는 행사라서프린트의 안전성을 문제로 삼았다. 제작자들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할만 했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나도 프린트의 협상문제는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그쯤 되자 동료들은내 앞에서“그만 포기하자”며 실망에 찬 표정을 지었다. 나는그토록 애써 쌓아올린 기획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랴 싶어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동료들을 달랬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진흥공사 국제부 실무진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드디어 12편 영화의 프린트는 제작자들의 공식 허가를 받고 외무부의 검열을 거쳐 회고전 개막식의 예정일 며칠 전에 제네바의 김창호 문화담당관 앞으로 무사히 도착했다. 독어자막의열두 개 프린트와 열두 개 불어자막, 그리고 독어, 불어, 한국어로 써진“독어권 한국영화 순회상영”의 포스터 수 십 장이 같이 왔다. 60x48cm 크기의 포스터는 외무부의 위탁을받고 송순남 화가가 그린 다양한 색채의 근사한 그래픽이었다.


김창호 문화담당관으로부터 프린트 도착의 소식을 받고는 나 뿐 아니라 동료들까지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독어권에 소개된 12편의 영화들 1993년 7월 초에서부터 1994년 10월까지 1년 3개월 동안에 준비된 한국영화 회고전은 드디어 1994년 10월 20일막을 올렸다. 그날 오후 쥬리히 시장 에스터만의 영접이 시청의 홀에서 있었고 그 자리에는 영화진흥공사 윤탁 사장과이경열 실무자, 임권택 감독 부부와 장선우 감독 그리고 김창호 문화당당관과 시네리브르 팀이 참석했었다. 시장의 영접은 쥬리히 시내의 필름포디움((Filmpodium) 영화상영식으로 옮겨졌다. 1948/49년에 설립된 필름포디움은 2차 대전 후에 지어진 현대식 건축물 가운데 걸작의 하나로 1983년부터 쥬리히 시의 문화재보호를 받고 있으며, 완벽한 시청각의 첨단기술을 갖춘 270석의 아담한 상영관은 개막식 장소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한편 필름포디움은 로잔느의 세계적 명성의 <스위스 시네마테크>와 공동 작업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한국영화 일부가 로잔의 시네마테크에서도추가적으로 시사될 수 있었다.20일 저녁 8시 개막식 영화 <불의 딸>의 상영 이전에 필름포디움의 대표 마르땅 지로 의 안내로 스위스와 한국의 대표들이 간단히 소개됐다. 스위스 쪽에서는 문화부의 영화과장 렌즐링과 문화교류협회 프로 헬베치아의 대표 그리고 일간지와 라디오의 기자들이 참가했었다. 


승원 작가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불의 딸>은 기독교인 아내와 무당의 아들인 남편 사이에 일어나는 종교적 갈등의 근원을 한국사회의 종교·문화사적 차원에서 파헤친 작품이며,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는 관객들의 한국사회에서 기독교는 어떻게 뿌리를 박고 있는지와 무속의 전통에 대한 질문이 한동안 잇따랐다.지면 때문에 회고전 영화의 제목만 소개하자면, <족보>와<불의 딸> (임권택, 1979, 1983), <바람 불어 좋은 날>(이장호, 1980), <황진이>(배창호, 1986년), <성공시대>(장선우,1987), <남부군>(정지영, 1990), <청송으로 가는 길>(이두용, 1990), <그들도 우리처럼>(박광수, 1990), <결혼이야기>(김의석, 1992), <김의 전쟁>(김영빈, 1992), <첫사랑>(이명세, 1993), <그섬에 가고 싶다>(박광수, 1993)였다. 그리고 당시 영화계의 주목을 받던 단편 2편을 추가 상영했다.이들은 변혁 그리고 이재용 감독의 공동작품 <호모 비디쿠스 >(16mm, 15mm. 1992)와 김윤태 감독의(16mm, 19mm, 1992)이었다. 


회고전의 영화들은1993년 프리부룩영화제의 이장호 회고전에서 소개된 <바람불어 좋은 날>과 1993년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의 경쟁부문에 국제 초연을 했던 <그섬에 가고 싶다>를 빼고는 모두 스위스에서 처음 상영됐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영화 회고전의 성격이 독어권의 순회상영으로 바뀌면서 나는독어권 지역에 한국영화에 대한 책자가 하나도 없음을 깨달았다. 출판비가 비싸긴 하지만 회고전이 단한번의 행사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독어 책자가 필요하다는 걸 동료들에게말했더니 누구도 책의 필요성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는 듯동의를 했다. 그 대신 편집에 관한 모든 책임을 나에게 넘겨주는 바람에 걱정거리가 하나 더 생겼으나 그걸 계기로 나는첫 독어 책자를 내놓게 됐다.책의 제목을 뭣으로 할까 생각했다. <한국의 새로운 물결>? 아니면 <젊은 세대 감독들의 걸작>? 그러나 둘 다 마음에들지 않아서 평소 한국을 표현할 때 자주 쓰는“조용한 아침의 나라”에다“한국영화”(LAND DER MORGENSTILLEFILME AUS SUDKOREA> 그리고 한국어의 <한국영화>는 내 조카사위 추원호가 써준 붓글씨를 사용했다. 


하기야20세기말의 한국 대부분은 조용한 아침은커녕 소음의 지옥이 돼버렸지만, 그러나 이왕이면 시적 표현이 더 좋을 것 같아 책자와 포스터, 프로그램 그리고 기자들의 홍보의 표제로썼다.1994년에 시네리브르의 이름으로 출간된 책자는 123장에다 이명세 감독의 <첫 사랑>에 나오는 여주인공 김혜수의모습을 표지로 하고 태어났다. 나는 책 내용의 평형성을 위해 국내외의 여러 평론가들에게 글을 부탁했다. 책에 실린기고가는 한국의 안병섭 교수, 박평식 평론가, 김지석 평론가(현 부산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와 유럽의 베를린 영포럼대표 울리히 그레고, 이탈리아의 페사로영화제 집행위원장아드리아노 아푸라, 한국영화 전문가인 영국평론가 토니 레인즈이다. 그리고 내가 프로그램을 짜면서 12편 영화의 감독들과 한 인터뷰들이 그들의 영화 소개와 함께 실렸다.쥬리히의 필름포디움 다음으로 순화상영의 주요 영화관을들자면 바젤의 스타드영화관 / 베른의 예술박문관의 영화관/프라운휄드 영화친구/ 누체른의 스타드키노/ 상 갈렌의 키노k/ 노잔느의 시네마테크 (불어)/ 제네바 시네마 스프트니크(불어)/ 샤불레시앙 시네클럽 (불어)/ 벨리조나 시콜로 델 시네마 (이탈리아어)/ 로카르노 시콜로 델 시네마/ 투시스 키노래티아(래틴로마어) 들이었고 나머지 극장들은 지면상 생략한다. 그리고 18개 극장의 상영회수는 188번이었고 3581명의 관객이 회고전을 통해 한국영화를 처음으로 봤다(시네리브의 통계에서). 그리고 독일에서는 14개의 콤뮤날레스 키노에서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는 3개의 아트하우스와 비엔나의 영화박물관에서 한국영화 회고전이 각각 두 달간씩 진행됐으나 이에 대한 통계는 받아볼 수 없었다.스위스의 일간지들은 한국영화 회고전에 대해 기대 이상으로 많은 지면을 내주었고 임권택, 장선우 감독들과의 인터뷰 주문이 가는 곳마다 쇄도했다. 


예를 들어 스위스의 독어권 지역의 일간지 13개와 두세 주간지에서 한국영화 회고전에 대해 다양한 기사를 발표했다. 내가 살고 있는 바즐러차이퉁만 세번에 걸쳐 전면에 글을 썼을 뿐 아니라 프로그램을따로 발표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리고 쥬리히의 일급 일간지노이에쥬리히차이퉁도 지면 반쪽에 해당하는 글을 실었고,공업도시 빈터투어 일간지는 전면을 한국영화에 대해 썼다.또 주로지식층이 읽는 타게스안짜이거도 반면을 한국영화에대한 기사로 채웠다. 그 뿐 아니라 불어권 지역에서는 르 누보 쿼티디안과 이탈리아어 지역의 벨리조나와 로카르노의일간지 조날레 그리고 코리에라 델 티치노 등에서도 중간 크기의 글을 실었다. 그 밖에 영화전문지 필름뷸탕과 한-서 경제협회지 그리고 다른 대규모의 상업지(COOP)등에서도 크고 작은 기사가 실었다. 한편 독일의 콤뮤날레스 키노는 자체의 잡지에 긴 글을 여러 번 발표했다.그런 가운데 나는 10월 27일 스위스의 국영 라디오3의카스파 기자로부터 인터뷰 초청을 받고 오전 11시 방송시간을 통해 회고전의 동기에서부터 90년대 한국영화의 현주소에 대해 한 시간 동안 대담을 했고, 수잔느 시즐러 여기자는내 프로젝트와 스위스 생활에 대해 긴 인터뷰 기사를 스위스의 문화주간지 (독일어“서있는 자리”라는 뜻)에 썼다. 발표했다. (Stehplatz, Oktober 1994, Seite 19).나는 임권택, 장선우 감독의 인터뷰 통역을 맡았었는데,기자들의 질문은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대개 90년대의 한국영화의 생산제도와 생산량, 검열제도의 문제, 주류와 비주류영화의 시장성, 헐리우드의 영향력, 여성문제, 남북 사이의긴장문제 등이었으며 대부분은 회고전을 통해 한국사회의문제점을 많이 이해하게 됐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이들의 개별적인 글을 여기에 다 소개하기는 어렵고 밑의 글을인용하는 것으로 그칠까 한다.“오늘날 아시아 영화는 세계적으로 대환영을 받고 있다.그런데 한국영화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통해서야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됐다. 그런데 지금 큼직한‘아침의 나라 한국영화 회고전’이 스위스의 전국을 돌고 있으며 선후배관계인 임권택과 장선우 감독이 스위스에 초청되어 그들의영화와 그들의 나라에 대해서 직접 설명을 하고 있다.”(타게스안짜이거, 안드레아스 풀러, 10.25.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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