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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3 | 연재
한시(漢詩)로 보는 역사 여행
관리자(2012-03-07 16:06:26)

세상이 어지럽다 해도 천리(天理)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홍성덕 전주대학교 교수


사람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적당한 때가 되면 잊어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문득 잊었던 기억이 떠오르면 시간을 거슬러 보듯이 장면들을 구성한다. 기억할 수 없거나 경험하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들, 그저 교과서에서 외우는 삶의 행위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 기억의 끝을 놓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한다. 역사의 흔적을 보존하고, 삶을 기념하는 조형물을 세우는 것,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도록 찾아가 설명하는 것 등, 우리들이‘답사’와‘관광’이라는 것들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기억의 전승”이다. 그렇지만 때로는 기억의 전승을 위한 일련의 노력이 또 다른 중첩된 이미지들에 의해 희석되거나 망각 속으로 들어가 버리곤 한다. 발산(鉢山), 중바위 산 자락이 북서쪽으로 흘러내려 간납대(현 카톨릭 전주교구청), 오목대, 이모대로 갈라지는 산 봉우리는 전주 역사의 산 증거이다. 900년 견훤이 전주성을 쌓았을 때 그 백성들의 바람을 막아주던 곳이고, 조선시대 조선왕실의 혼이 깃든 곳이며, 일제강점기 세상을 한탄했던 통곡의 공간이고, 그 자락은 누대에 걸친 전주 유림의 정신이 잉태된 모태이기도 하다.

어지러이 달리는 짐승 떼, 마을에 달려들어 / 나의 곡식 쪼아 먹고 나의 살점 씹어댄다

누가 짐승 떼를 저 바다 밖으로 몰아내어 / 천지를 정돈하여 해묵은 때를 씻어낼까

산과 들에 도깨비, 어둠의 거리 활보하니 / 온갖 변괴에 나라를 잃었어라

어떡하면 새 천지 다시 만들 인물 얻어 / 오늘 세계 말끔하게 요괴를 없애 줄지

-「 상시(傷時)」『금재집』박완식역,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해 조선의 국권을 강탈당했던 날, 날을 꼬박 새운 금재 최병심(1874~1957)이 발산에 올라 통곡하면서 읊은 시로 알려져 있다. 금재는 그에 앞서 이미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을사오적의 목을 먼저 베라는 격문』을 작성했으나 배포 도중 압수당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은 멸망했고 남겨진 망국의 백성은 무엇을 할 것인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당시 조선의 유림들이 망국의 상황에 대하여 갔던 길은 첫째, 자결로서 신념을 굽히지 않은 길이다. 을사늑약 체결 후 절명(絶命)하거나(민영환, 심상훈, 홍만식, 이한응, 김봉학, 송병준 등),경술국치 이후 자결한 경우(홍범식, 박세화, 오강표, 조장하, 박병하, 황현 등)들이 있다. 이들의 길은‘인의정신(仁義精神)’과‘의리정신(義理精神)’을 수호하려는 행동이었다. 둘째 을사오적(박제순,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처단과 조약파기를 주장한 경우로 호남의 전우, 영남의 곽종석,충청도의 김복한, 경북의 김창숙,13도 유생 대표 이건석 등 전국유림의 오적 참형 상소, 독립 청원운동인 파리장서사건과 같은 행동이다. 마지막으로, 은둔하여 강학과 교육에 힘쓰는 것이다. 교육은 의병과 자결과 상보적인 의미를 갖는 반일의 행동 양식 중 하나이다. 창의(倡義)를 거절하였다고 하여 유학자들로부터‘나라에 무익한 물건’‘불충불의(不忠不義)한 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 간재 전우가 대표적이다.금재 최병심은 간재 전우의 큰 제자로 그가 선택한 길은 조선의 멸망을 보고 시를 읊은 뒤 7일 동안 단식하고 한편으로는이석용이 조직한 비밀결사대 임자동밀맹단의 전주지역 책임자로 활동하고, 조희제가 쓴 항일ㆍ순국 선현의 행적을 기록에 대해서는 서문을 써 자신의 뜻을 표현하였으며, 만동묘의 철폐에대해서는 유학자로서의 본분을 감추지 않았다.그의 항일행적 중에 가장 으뜸은 시에서 읊은 대로‘새로운세상을 다시 만들 인물’을 양성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치는‘교육’이었다. 1901년 이미 옥류동에‘옥산정사’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한 금재는“강토를 빼앗겨서는 안 되고 동족을 외면해서도 안 되며 우리의 도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세 가지야말로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책임”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난리 속에 어느덧 백발의 나이 되었구나 / 몇 번이고 죽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네

오늘 참으로 어쩌지 못할 상황 되니 / 바람 앞 촛불만 밝게 하늘을 비추네

요기(妖?, 매국노)가 자욱하여 황제의 별 옮겨 가니 / 침침한 궁궐에는 낮이 더디 흐르네

조칙(詔勅)은 앞으로 더 이상 없으리니 / 종이 한 장 채우는 데 천 줄기 눈물이라

금수도 슬피 울고 산하도 찡그리니 / 무궁화 세상은 이미 망해 버렸다네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회고해 보니 /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짧은 서까래만큼도 지탱한 공 없었으니 / 살신성인 그뿐이지 충성은 아니라네

결국 겨우 윤곡(尹穀)이나 따르고 마는 것을 / 부끄럽네, 왜 그때 진동(陳東)처럼 못했던고

- 절명시(絶命詩)『 국역매천집』

너무나도 유명한 매천 황현(1855~1910)의 절명시이다. 강점조약 체결 일주일 후 구례 자신의 집에서 음독 자결하면서 남겨놓은 시이다. 장지연이 경남일보에 실어 필화사건이 일어나 세상에 알려졌다. 매천은 송(宋)나라 때 몽고 군대가 쳐들어오자 처자에게 함께 죽을 것을 명한 뒤 자결했던 윤곡을 따른다 하면서, 왜 진동처럼 하지 못했던가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진동은 중국 북송(北宋) 사람으로 사마광(司馬光) 등을 몰아내고 왕안석의 신법을 다시 시행하려는 움직임에 육적(六賊)으로 지목하여 규탄하는 상소를 올린 강직한 사람이다. 나라는 멸망하였는데, 죽음을 선택한 유림과 살아남아 치욕을 견디면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던 유림, 그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이 보여주고자 했던 뜻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비록 나라가 망할지언정 인륜(人倫)을 끊어서는 안 되고, 세상이 어지럽다 해도 천리(天理)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생명의 가치와 정의 실현의 혼돈 속에서 한번 금재의 이 말을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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