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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3 | 연재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스위스 한국국보문화재 전시와 한국영화회고전 2
관리자(2012-03-07 16:08:08)

아름다운‘소피 장’에 마음을 빼앗겼다


한국영화 회고전의 알찬 열매


한국영화 회고전을 준비할 바에야 이왕면 한국전시의 주제에 어울리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국영화의 역사를 다 들추지 않아도 70년대 중반 이후의 작품만 가지고도 무속, 불교, 유교주제의 영화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있었다. 일본이나 중국 등 동양지역의영화에는 흔치 않는 종교주제들이 한국영화에 꾸준히 존재해왔던 점은 한국영화사의 특수성이기도 했다. 그러기에스위스 한국전시야말로 한국영화의 특색을 돋보이게 해주는데 더 없이 좋은곳이었다.2000년의 회고전은 스위스의 네 도시에서 순회상영 형식으로 진행됐다.1994년 내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이뤄진 첫 회고전‘조용한 아침의 나라’가스위스 전국에서 순회상영을 가진 6년뒤에 두 번째로 열린 회고전이었다. 프로그램을 짜는 동안에 배급사들의 반대와 프린트의 확보 문제 등으로 두세 번내용이 바뀌는 일이 있었으나 2000년초에 최종 선정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13편으로 묶어진 프로그램에는 60년대중반에서 90년대 중반까지 30여 년의작품들이 들어 있었다. 그 중에서 불교주제의 영화는 < 만다라 >(임권택,1981), <아제아제 바라아제>(임권택,1989), <꿈>(배창호, 1990), <유리>(양윤호, 1996)였다. 무속주제의 영화는 <김 약국의 딸들>(유현목, 1963), <이어도 >(김기영, 1977), < 장마 >(유현목,1979), <태>(하명중, 1987),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이장호,1987), 그리고 유교주제의 영화는 <물레야 물레야>(이두용, 1983), <씨받이>(임권택, 1986), <축>(임권택, 1996),<학생부근신위>(박철수, 1996)이었다. 사실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의 세 편은 스위스에서 이미 상영됐던 작품들이라서 2000년 회고전 프로그램에 넣고 싶지 않았으나 회고전의 주상영장인 필름포디움(Filmpodium)의 요청으로 추가된 것이다. <씨받이>는 스위스의 트리곤 배급사에서, <나그네…>는 베를린의‘키네마테크우호협회’에서, 그리고 <장마>, <김 약국의 딸>,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파리의 한국문화원에서 빌린프린트를 썼다. 여기에 한마디 덧붙이면, 불교주제의 명작인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회고전에서 빠진 이유는 <만다라> 때문이었는데, <달마가…>는 1989년 로카르노영화제서 대상을 받은 이후 트리곤 배급사를 통해 스위스에서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반면 <만다라>는 스위스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기 그만큼 신선했고 효과도 좋았다. 그 뿐 아니라 <만다라>는 아주 어렵게 찾아진 영화였다. 1999년 10월 중순쯤이었다. 나는 부산영화제의 김지석프로그래머로부터“누군가가 <만다라>의 프린트를 영상자료원에 맡겼다”는 메일을 받았다. 알다시피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불교 주제의 고전이다. 그러나 프린트가 다 없어진데다 딱 하나 남은 원판(Negative)마저 부분적으로 파손돼있어 아예 상영이 불가능했었다. 그래서 나는 김 프로그래머로부터 소식을 받자마자 바로 임권택 감독에게 영상자료원의 <만다라>에 대해 본인이 직접 파악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1999년 11월에 영진위로부터‘<만다라>를 찾아냈다는’는 전문을 받고 프로그램에 넣을 수 있었다. 수수께끼의 <만다라>는 80년대 독일의 한 배급자가갖고 있다가 그의 사망 이후 영상자료원으로 보내진 희귀의 재료로서 20년이 지났음에도 프린트 상태가 좋았던 데다 독어자막까지 들어있어 회고전 영화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었다.


2000년 회고전의 귀빈은 60년대의 한국영화에 이탈리아의 신사실주의를 접목시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리얼리즘의 선구자 유현목 감독과 그의 아내 박근자 화백이었다. 두 분과의 접촉은 내가 1999년 부상영화제에 참가했을 때 이뤄졌다. 그때 마침 유 감독 작품의 회고전이 열려 스위스의 초청 소식을 직접 알릴수 있었고 또 같은 시기에 박근자 화백님의 미술 전시가 부산 시내에서 열리는 바람에 화랑으로 직접 찾아가 초청에대한 정보를 전했다. 박 화백은 그러나친구들과 이미 인도여행을 약속한 뒤라서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나는 포기하지 않고 두 분에게 전화 또는 팩스를 통해 회고전에 참가해달라고 졸랐다. 속담에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박 화백은 친구들이“심심한 스위스 보다는 인도가 훨씬 재밌다”며 말리는 걸 뿌리치고 스위스로방향을 바꿨다. 그리하여 유 감독 부부는 스위스 정부가 지원하는‘국제문화교류협회(Pro Helvetia)’의 귀빈으로초청되어 회고전에 참석했다.2000년 4월 3일 오후 6시, 회고전의 주상영장인 예술영화관 필름포디움의 관장 마르땅 지로 부부와 그의 공동관장 롤프 니더러는 유 감독 부부를위한 저녁식사를 마련하고는 쥬리히대학의 영화학과 블링크만과 우리 부부를 초대하여 스위스 식의 조촐한 환영식을 가졌다. 그리고 8시 반에 필름포디움(좌석 296석)에서 유현목 감독의 역작 <장마>의 스위스 초연으로 막이 열렸다. 개막식은 유 감독 부부의소개와 더불어 쥬리히 시장 장 피에르호비의 간단한 축사로 시작됐고 프로헬베치아의 담당자 로저 피셔, 리트베르크 박물관장 알베르토 롯즈 그리고한국 쪽에서는 지건길 파리의 한국문화원장, 권순대 부부, 정동일 참사관부부, 한인협회의 회장 부부 등이 그자리에 참가했었다. 그리고 <장마>의상영이 끝난 뒤에 유 감독은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로서의 무속과 한국전쟁의고난에 대해 관객과의 열린 대화시간을 가졌다. 한마디 덧붙여 말하면, 마르탕 지로 관장은 유현목 부부의 회고전 참가를 기리는 뜻에서 <김약국의딸들>을 특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개막식 다음 날부터 필름포디움에만 따로 상영했다.유 감독 부부는 스위스에서 8일간머물면서 베른과 바젤에서 <장마>가상영될 때마다 직접 참가하여 관객과만났는데“스위스 관객의 진지함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며 스위스에 온 걸후회하지 않았다. 한편 권순대 대사 부부는 베른 켈러키노(좌석 56석)의 <장마> 상영을 계기로 유현목 부부를 위한 저녁식사 자리를 자택에서 마련하여 켈러키노 책임자 암스투쯔 여사와스위스 정부의 외무부에 속해있는 해외영화 교류 담당자 드로쉬 그리고 우리 부부를 초청하여 맛있는 한식과 함께 한국영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밖에도 권순대 대사와 정동일 참사관은 외교행랑의 수송편을 이용하여 한국 정부와 파리의 한국문화원의 프린트를 받은 뒤에 네 개 상영관하나하나의 일정에 맞춰 보내는 일을도맡아 했다.바젤의 <장마> 시사회는 4월 6일스타트키노(시에서 지원하는 영화관,좌석 99석)에서 시사됐으며 다른 영화관에서처럼 유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시간을 가졌다. 그 뒤 유 감독과 박 화백은 8일 귀국하는 날까지 우리 집에서 머물렀다. 우리 집에는‘한국영화인의 방’으로 불리는 다락방이 하나 있다. 1990년 남편과 나는 스위스에 들리는 한국의 영화인들을 위해 지붕 밑의 비어있는 방을 아늑하게 꾸몄는데,여기서 쉬었다 간 손님은 임권택 감독부부, 월간지‘영화 예술’의 (고)이영일 편집장, 김동호 부산집행위원장, 안성기 배우 가족, 배용균, 박광수, 장선우, 민병훈, 이광모, 박종원 감독들과유인택, 이효승 제작자들, 유현목 감독부부들이었다.


2000년 회고전은 쥬리히의 필름포디움, 베른시의 켈러키노, 바젤시의 스타트키노, 로잔느시의 시네마테크에서 두 달 동안 상영됐다. 1994년 첫 회고전 때는 16곳에서 상영됐었는데 그에 비하면 훨씬 작은 규모였으나 관객의 모집 면에서는 오히려 2~3배 정도로 더 커졌다. 6년 사이에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달라진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아는 스위스의 한 영화기자는‘한국영화의 국제적 성공이 미친 영향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 반면 리트베르크 박물관장 룻즈는“한국전시와 영화 회고전의상승작용이 만든 성과”라는 해석을 붙여 흥미로웠다. 한마디로 회고전의 관객이 박물관에 들리고 박물관의 방문자가 영화를 볼 확률이 높다는 소리였는데,실지로 내가 알기로도 그런 사람이 적지않았던 것으로 봐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생각이 들었다.무속, 불교, 유교의 주제를 바탕으로짜진 한국영화 회고전은 예상했던 대로주제의 특수성 때문에 매체의 호기심을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예를 들어 노이에 쥬리히 자이퉁, 타게스 안짜이거,바즐러 자이퉁 등의 스위스의 주요 일간지들 그리고 영화전문 월간지‘필름 줌’은 상당히 넓은 지면을 할애할 정도로 높은 관심을 보였고 텔레바젤(지역의 텔레비전 방송)은 나와의 30분 인터뷰를 방영했다. 지면상 여러 기사를 고려하기가어려워서‘타게스 안짜이거’의 여기자나콜 헤쓰가 쓴 글을 짧게 옮겨 쓴다.“한국영화는아직도 스위스에 정착하지못했다. 90년대 초의 <달마가 동쪽으로간 까닭은>과 몇 년 전의‘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회고전 그리고 프리부룩영화제서 수상한 <아름다운 시절>(이광모)등이 겨우 지나갔을 정도다. 그러나 경제적 기적의 나라(Wonderland) 한국에서현재 만들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개방적인 새로운 영화는 스위스에서 보기 힘들다. 그런데 다행히 그 빈틈을 메우는 회고전이 쥬리히 필름포디움과 몇몇 다른 도시에서 열린다. 1963년에서 1996년까지의 작품으로 짜진프로그램은 여러 종교적 테마를 조명함과 동시에 리트베르그 박물관에서 같은 시기에 열리는‘한국-고대 왕국들’의 전시에 보충 역할을 하고 있다 … ”.(TagesAnzeiger 51장, 2000년 4월 10일)


여기에 본문의 글과 뗄 수 없는 성격의 짧은 글 하나를 덧붙인다. 2002년 나는 새로 부임된 문동석 대사의 위탁을 받고 조그만 회고전을 다시 열었다. 문 대사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요즘 한국 자동차가 스위스에서 잘 팔리는데 그보다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게 더 중요하다”며“근래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영화를 중심으로 회고전을 한 번더 하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전 회고전의 울림이 아직 생생한데다 몸도 피곤하여 몇 번 거절을 했지만 문 대사는 뜻을거두지 않았다. 나는 결국 그의 한국영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에 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2002년은 한국 영화시장의50%를 한국영화가 차지하는 그야말로한국영화의 전성기였다. 그뿐 아니라 한국영화는 국제영화마다 환영을 받았고수상자도 많아졌다. 그만큼 한국영화는성숙해가고 있어 밖으로 자랑을 할만도했다. 그래서 나는 국내외에서 인기가 높은 작가영화를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즉 <팔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 <해피엔드>(정지우), <박하사탕>(이창동), <시월애>(이현성), <공동경비구역 JSA>(박찬욱), <반칙왕>(김지운), <섬>(김기덕), <오! 수정>(홍상수), <소름>(윤종찬), <꽃섬>(송일곤)이 회고전의영화로 선정됐다. 이들 10편의 영화는 2천 년의 회고전 때의 주상연관이었던 필름포디움에서 한 달 간 상영됐는데 나는한국출신의 스위스 여 소령이 핵심인물로 나오는 <공동경비구역 JSA>를 개막식 영화로 정했다. 그리고 2002년 4월3일에 열린 개막식의 귀빈은 쥬리히 시장 에스터만과 <공동경비구역JSA>의필름포디움에서 초청한 심재명 제작자였다. 심재명 제작자는 바쁜 일정 때문에오기가 힘들었음에도 개막식에 참가하여개인적으로 고마웠다. 개막식에 참가한에스터만 시장은 인사말에서“섭섭하게도 스위스 군대에는 아직까지 여 소령이있어본 적이 없는데 JSA를 보면서 부러웠고 아름다운 소피 장 소령(이영애 역)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큰 소리로 칭찬을 하여 객석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개막식이 끝난 뒤 영화관에서 준비한 만찬에는 심재명 제작자와 문동석 대사를 비롯한 대사관의 실무자들 그리고 한인회 회장 부부 등 이 참석했었다. 한편 현지의 매체들은 그 당시 국제무대에서‘떠오르는 별들’로 불리는 인기 감독들의 작품이 쥬리히에서 상영된다는 데 대해‘드디어’라며 반가워했다. 그리고2002년의 회고전에는 영진위와 대한항공 쥬리히 지점에서 협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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