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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4 | 연재
한시(漢詩)로 보는 역사 여행
관리자(2012-04-04 17:53:48)


 청산은 말이 없고 새만 높이 나는구나 홍성덕 전주대학교 교수 전주 동남쪽 10여리 떨어진 곳에 고덕산(高德山)을 뒤로하고 전주를 향해 중바위와 자웅을 겨루면서 서쪽 유연대 자락으로 흘러내리는 산이 남고산(南固山)이다. 전주천 건너 중바위 윗자락에 위치한 동고산성에 견주어 이곳에는 남고산성이 있다. 남고산성을『완산지』에 고덕산성이라 칭하고 있다. 혹은 견훤성이라 하였다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다. 남고산성이 유명한 것은 포은 정몽주와 관련된 이야기 때문이다. 1380년 500여척의 선단을 이끌고 진포로 쳐들어온 왜구를 최무선이 화통, 화포로 격파하자 퇴로를 잃은 왜구들이 내륙으로 도망쳐 운봉 황산에 이르렀고, 이때 이성계가 퉁두란과 함께 왜적장 아지발도를 죽이는 이야기는 이미 전설이 되어있다.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둔 이성계가 전주에 도착하여 오목대에서 일족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벌이면서 대풍가(大風歌)를 불렀다고 한다. 당시 서장관으로 이성계와 함께 한 포은 정몽주가 그 노래를 듣고 말을 달려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읊은 시가 바로 만경대 암벽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숙적이었던 항우(項羽)를 타도하고 고향으로 금의환향한 유방이 스스로 악기를 연주하면서 읊었던 3구 23자의 이 짧은 시를 120명의 젊은이들에게 합창을 시킨 것은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성계의 대풍가를 듣고 쓰러져 가는 고려의 망운(亡運)을 그저 쓸쓸히 노래할 수밖에 없었던 정몽주와 목은 이색과는 달리 많은 후대 사람들은 이 정몽주의 시에 답하면서 견훤과 풍패, 조선의 창업을 노래하고 있다. 천 길이나 높은 대가 창공에 솟아 있어 / 위아래 천지 사이에 만 리가 탁 트였네 견훤의 흥망에 관한 일을 말하지 마소 / 청산은 말이 없고 새만 높이 나는구나. (서거정,「 만경대」『국역사가시집』)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서거정은 풍패(豊沛) 10영(詠)이라는 시 중에서 만경대를 이렇게 노래했다. 조선의 신하로 포은과 목은의 생각을 어떻게 보았을까? 정몽주의 시에 화답하면서, 견랑(甄郞, 견훤)의 종횡무진한 의기가 아직 생각난다. / 분분했던 성패가 은연중 맘을 상하게 하네 어느 날 스스로 가문의 재앙을 일으키니 / 백 번 싸운 게 끝내는 철옹성이 아니었네 천명받은 진인(眞人)이 백수(白水)에서 일어났거늘 / 어느 늙은 간물이 창생을 그르친단 말인가 용이 일어났던 풍패의 땅에 올라 임하니 / 더욱 간절한 님 생각에 옥경을 바라보노라 (서거정,「 전주에서 포은선생의 만경대 시운에 차하다」『국역 사가시집』) 서거정은 견훤과 용이 일어난 풍패의 땅을 연결시키고 있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처럼 견훤의 후백제를 물리치고 천명을 받은 왕건이 세운 고려와 용이 일어난 땅 전주를 중첩시키면서 포은의 생각에 개성(옥경)을 바라본다고 노래한 것이다. 여기에서 견훤의 땅과 조선의 창업은 다른 이미지로 드러난다. 조선의 신하들은 용이 일어난 땅 전주에 옛 국가를 세운 견훤과 조선의 건국에 반대했던 포은과 목은에 대한 생각에 간극을 두었다.명재 윤증은 목인 이색의 시에 답하기를 견훤이 한 사업은 천 년의 추문이요 / 목은이 남긴 시편 백세의 청풍(淸風)이지 이 모두가 나그네의 속세 생각 끊게 하여 / 가을볕 아래 서성이며 마음을 못 잡겠네 (윤증,「 또이목은의시게차운하다」『국역명재유고』)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 것은 추문이고, 목은 이색의 생각은 청풍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견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서거정에게서도 나타난다. 교활한 적은 당시에 음험을 일삼았는데 / 뜻밖의 집안 재앙은 가소롭기 그지없네 가련도 하여라 사십 년 동안 벌인 사업이 / 성곽마저 희미해 학의 말대로는 아니로세 (서거정,「 견훤도(甄萱都)」『국역사가시집』) 조선 성종대의 문신으로 생육신의 한사람인 남효온의 견훤에 대한 평가는 더 극단적이다. 후백제의 도읍지를“신라 말기 완산 땅은 도적의 소굴 되니 / 견훤이 칼 어루만지며 간계를 부렸었네”라 하여 도적의 소굴로 바뀌어 버렸다고 하였다. 남효온에게 있어 견훤은 한갓 도적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패망의 원인은 집안 재앙으로 보았다. “안녹산처럼 만년에 저아(猪兒)의 액운 만났으니 / 북쪽 고려로 옮겨가서 왕건에게 의탁했네”하여 안녹산이 스스로 연(燕)의 황제가 된 뒤에 후계 문제로 아들과 사이가 벌어지고, 아들의 사주를 받은 이저아(李猪兒)에게 살해당한 것을 빗대었던 것이다. 새로운 이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유교적 도덕관념이 강했던 세상,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멸망과정에서 견훤과 그 아들 신검 사이의 갈등은 오히려 고려의 왕건을‘천명을 받은 진인’으로 노래할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은 아닐까? 아울러 비록 조선의 건국에 반대했지만, 고려의 신하로 충신의 길을 택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그저 비판만 할 수 없는 유학자들의 강직함에 만경대는 그 역사적 간극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포은 정몽주의 시가 새겨진 만경대 암벽 그 시 아래에 새겨 놓은 화답시들은 쓸쓸함만을 노래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높은 누대에 기대어 저녁 노을을 보며 / 슬픈 신하는 망국을 그리워하네 겹겹이 청산은 넓은 광야가 둘러싸고 / 집집마다 서리 맞은 나무 겹겹이 성을 둘렀네 서풍이 비를 뿌리니 가을이 이르고 / 수평선에 해가 지니, 바다기운 돋아나네 여기는 포은이 시를 읊던 곳 / 하늘가에서 홀로 서울을 바라보네 관찰사(觀察使) 이서구(李書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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