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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4 | 연재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체코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 1
관리자(2012-04-04 17:54:52)


 동유럽 영화제의 칸, 그 문을 두드리다 동유럽에서 열린 첫 한국영화 회고전 ● 2001년 7월초,“ 새로운한국영화”주제의 회고전이 아름다운 보헤미안의 도시 카를로비바리의 국제영화제서 아주크게 열렸었다. 내가 이 영화제와 처음인연을 맺은 건 1992년에 박광수 감독의 <베를린 리포트>가 경쟁부문에 초청되면서였다. 그 때부터 나는 이곳을 자주 드나들면서 냉전종식 이후 빠르게 발전해가는 영화제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내가 처음 갔을 때만 해도 입국수속은 지겹게 느리고 복잡했다.공항에서 카를로비바리로 떠나는 버스도 없어 프라하 시내버스 종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그러나 오륙 년지나는 동안 여권검열은 몇 분 만에 끝나고 새로 지은 공항 출구에는 영화제방문객을 위한 안내소와 직행 셔틀버스가 따로 마련돼 있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빨리 변해가고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 영화제도 눈에 띄게 많이 바뀌었다.과거 수 십 년간 모스코바 영화제와 격년제로 행사를 치러야 했던 불리한 제도는 소련 체제가 무너짐과 동시에 사라지고 90년대 초부터 연례행사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자율권을 되찾은 지 2년이 못되어 다시 정치적 변동을 맞았다.1993년에 슬로바키아가 독립국이 되는바람에 영화제가 반쪽으로 줄어든 것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1차 대전이 끝나던 1918년부터 75년 동안을 한 국가로 공존해왔으나 1993년에 두 나라로갈라졌다. 그런 와중에도 카를로비바리영화제는 짧은 기간에“동유럽 영화제의칸”으로 불릴 만큼 커지면서 동유럽에하나 밖에 없는 A급 영화제로 떠올랐다. 이 영화제의 역사에 관해서는 문화저널 2010년의 5월호를 통해 자세히 쓴바 있어 이번에는 이 정도로 그친다. 2001년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의 한국영화 회고전은 내 머리 속에 오랫동안 들어 있던 구상이 실현된 것이었다. 1994년 내 첫 프로젝트였던 스위스의 한국영화 회고전“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끝난뒤에 나는 바로 또 하나의 새로운 것에마음이 쏠렸다. 이왕이면 A급 영화제와함께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고 싶었다. 과거 내가 참여했던 낭트, 페사로, 아미앙, 뮌헨, 로카르노, 프리부룩 등의 중소규모 영화제에서는 이미 90년대 초부터 숱한 한국영화들이 여러 형태로 보인터라 그런 데서 회고전을 한들 그다지 새로울 게 없었다. 그렇다고 칸, 베를린, 베니스, 상 세바스찬 등의 A급 영화제들이조만간 한국영화 회고전을 할 것 같지도않았다. 그 시절에는 동양영화의 회고전하면 으레 일본 아니면 중국 계통의 영화들이었고 그 때까지 한국영화는 이들의관심을 받을 만큼 시대적 유행을 타지 못해 뒤로 밀려나있었다.그래서 생각한 곳이 바로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였다. 이곳은 A급 영화제 가운데 내가 가장 많이 다녔던 곳이어서 영화제 내부구조와 상황을 잘 꿰고 있었던 데다가 인적 연락망도 꽤 넓었기 때문에 작업조건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다른 대형영화제에 비해 좀 허술한 편이어서 내 프로젝트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있을 성싶었다. 그런데다가 영화제가 전 동구권 지역의 영화계와 연결돼 있다는 점도 한국영화의 홍보차원에서 새로운 도전으로 비쳤다. 하지만 일을 성사시키려면 무엇보다 먼저 에바 자오라로바 집행위원장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1994년에 집행위원장이 된 에바 자오라로바는 체코의 문화계에 널리 알려진 영화평론가 출신으로서 국제적 존경을 받는 실력가였다. 하지만 성격이 아주 깐깐한데다 내성적이어서 생각했던 것보다 접근이 훨씬 더 어려워 내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나대로 이런저런 일로 바쁜세월을 보내다 보니 몇 년이 그냥 훌쩍 지나버렸다. 그러다가 1999년 11월 나는 그리스의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에 갔다. 목적은 이 영화제의 조직위원장 테오 안겔로풀로스 감독을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런던에서 살던 80년 초에 나는안겔로풀로스 감독의 영화 <방랑 연극배우들>을 본 뒤부터 그의 영화라면빠트리지 않고 다 보았을 정도로 그의작품세계에 빠져버렸다. 1990년 바젤에서 그의 영화 <안개 속의 풍경>이시사될 때 드디어 감독을 직접 만날 수있었다. 그는 내가 인사를 하면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언뜻 하는 말이“일본에 만난 한 한국여인을 통해 일본의식민주의가 남긴 비극을 자세히 알게됐다”며“우리는 모두 한국인이다”(Nous sommes tous les Coreens)라는 말로 한국인에 대한 연대감을 표시했다. 9년 뒤 나는 그를 테살로니키에서 다시 만나 오랜 인터뷰를 했는데,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그는 놀라울 정도로 한국영화와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관심을 보이면서 많은걸 물었다. 안겔로풀로스 감독은 그 무렵 다음작품을 위해 이탈리아의 시나리오 작가 토니노 구에로와 같이 작업을 하고있었다. 구에로는 내가 인터뷰를 하는동안 옆에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시나리오를 손질하고 있었는데, 그는 안겔로풀로스의 숱한 작품뿐 아니라 오랫동안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작품에도 동참했던 거장 시나리오 작가다. 그를 거기서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글이 갑자기 안겔로푸로스로 감독에게기울어졌는데, 실은 내가 테살로니키영화제서 그와 만난 이야기를 쓰고 있는 중에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그러기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그와 함께 보낸 귀중한 시간을 몇 줄의글에 담아 여기에 덧붙였다.이야기를 다시 테살로니키로 돌리자면, 어느 날 영화제의 저녁 파티에서뜻밖에 에바 자오라로바 집행위원장을만났다. 평소 만나면 간단히 인사만 하던 것과는 달리 그날 그는 나를 보자마치 오랜 친구처럼 반가워하고는 같이 식사까지 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저녁을 먹으면서 말을주고받았고, 나중에는 테크노 음악에따라 젊은이들 틈에 끼어 같이 춤도 추면서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 후에도에바 자오라로바(이하 에바)는 호텔 로비에서 밤늦도록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술 때문에 요절한 남편이야기로부터 문학비평가로서 소련 체제하에 겪었던 정신적 시달림, 또는 카를로비바리 영화제가 당면하고 있는경제적 어려움 등을 솔직히 들려줬는데, 에바는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마음이 여리고 따뜻한 면이 있었다.테살로니키에서의 만남 이후 우리둘 사이는 빨리 가까워졌다. 내가2000년 7월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갔을 때 나보다 10살 위인 에바는 좋은 선배처럼 나를 잘 보살펴줬고, 그덕분에 체코의 감독들과 평론가들을많이 알게 됐다. 내가 이리 멘젤과 비라 히틸로바 같은 좀처럼 만나기 쉽지않은 감독들과 단독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에바가 뒤에서 잘 도와줬기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에바에게 한국영화 회고전에 대한 내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틈이 생겼다. 하지만 에바는“실은 <초록 물고기>(이창동)와 <모텔 선인장>(박기홍)을 1998년에 초대했었다. 그러나 워낙 한국영화가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지 관객의 반응이 아주미미했었다.”라며 회고전을 할 생각이없음을 밝혔다. 그의 단호한 거절을 듣고는 이제 다 끝났구나! 싶어 더 이상 말을꺼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20여 일이 지나자 에바가 메일을 보냈다.“ 2000년경쟁에들었던이창동감독의 <박하사탕>과 독립영화부문의 홍상수 감독의 오마주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가 며칠 전에 발표됐는데 아주 긍정적이다. 그래서 집행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2001년에 한국영화 회고전을 열기로 결정을 했으니 로카르노 영화제서 만나서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너무 기뻐서 메일을 읽고또 읽었다. 그리고 좋은 작품으로 에바와그의 동료들을 설득시킨 이창동, 홍상수감독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그리하여 2000년 8월초에 나는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에바를 만나 회고전에대한 전반적인 토의를 했다. 그 해 11월에는 에바가 프로그램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 위해 독일의 만하임-하이델베르그영화제에서 만나자 하여 그리로 갔다. 만하임-하이델베르그 영화제는 1996년에작은 규모의 한국영화 프로그램을 소개한 바 있었는데 나는 그 시기에 제1회 부산영화제가 열리는 바람에 카탈로그에들어가는 한국영화에 대한 입문만 써서보내고 직접 참가하지는 못했다. 그래서에바를 만날 겸 영화제에 참석했는데, 마침 영화아카데미 학생들의 졸업 작품들이 특별 프로그램으로 초청되어 이들의영화를 볼 수 있었고 더불어 행사에 참석한 아카데미 원장 황규덕 감독과 몇몇 학생 감독들을 만났다. 2001년 2월에 베를린 영화제에서 에바를 만나 프로그램에 대한 최종 검토를 했으며, 베를린의모임에는 영진위 해외진흥부 박두호씨(현 해외진흥부 국제교류팀장)가 참석하여 회고전 행사에 관련된 협조문제와 절차에 대한 공식적인 대화시간을 가졌다. 장편과 단편의 공동출현 2001년 회고전은 세 가지 면에서 새로웠다. 첫째는 A급 영화제에서 열린 최초의 회고전이었다. 둘째는 내 개인의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A급 영화제와 영진위가 참가하여 공동으로 행사를 치른 점이다. 그리고 셋째는 14편의 장편과 14편의 단편이 한자리에서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됐던 점인데 프로그램의 생성 배경이 좀 특이했다. 나는 1999년과2001년에 클레르몽-페랑 영화제에 참가하면서 한국에서 온 단편영화 감독들을 많이 만났다. 이들을 통해 단편영화들이 장편에 비해 해외에 소개될 기회가 아주 적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클레르몽-페랑의 맥주 파티 자리에서 나는 젊은 감독들을 향해‘만일 내가 앞으로 해외에서 회고전을 만든다면 단편영화를꼭 프로그램에 넣겠다.’는 약속을 했다.그 약속을 카를로비바리의 회고전을 통해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만하임-하이델베르그 영화제서 에바를 만났을 때 단편 회고전에 대한 내 의도를 내비쳤다.에바는“장편 회고전도 힘겨운 데 단편까지 합친다면 부담이 너무 크다”며 아주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나역시 장·단편이 함께하는 회고전을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터라 에바가 못마땅해 하는 걸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그러나 약속을 저버릴 수가 없어 나는 에바에게 클레르몽-페랑에서 단편영화 감독들에게 약속을 한 배경에 대해 설명을하면서 단편영화의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득시켰다. 그러자 에바는 마음이 좀 풀어진 듯“실패하면 네 책임이다”고 경고를 하면서도 결국 제의를 받아들였고 장·단편 공동출현이라는 새로운시도에 파란 불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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