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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3 | 연재 [문화저널]
우리문화연구판소리란 무엇인가 5
최동현 판소리 연구가(2003-09-08 17:12:11)

판소리는 우리 민족의 삶과 문화의 심층에 뿌리박고 오랜 세월에 걸친 자기변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해 내려온 전승예술이기 때문에, 발생의 근원을 따진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의 근원에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정 노식같은 이는 판소리의 근원을 신라시대의 화랑의 음악에까지 소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판소리로 인식하고 있는 형태로까지 변모·발전된 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시기가 어느 때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문헌을 통해서 판소리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최초의 시점은, 지금까지로는 영조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 때 사람인 만화제 유진한(華濟 柳廠漢)의 문집『華集』 가운데〈歌詞 春告歌 200句〉가 실려 있는 것이 현재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판소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작자인 유진한은『於于野談』의 작자인 어우당 유몽연(於于堂 柳夢寅)의 6대종손으로, 영조 때에 충청남도 천안지방을 중심으로 인근에 알려진 문인이었다. 그의 아들 금이 쓴 묘갈명서(墓喝銘序)에 의하면 숙종 38년(1711)에 나서 정조 15년(1791)에 죽은 사실을 알 수 있고, 또 역시 금이 쓴〈家庭見聞綠> 가운데, 〈先老發西南遊湖南 歷觀其山川文物 其年·春還歌일篇 而亦被時精識 (부친께서 계유년(1753년)에 남쪽으로 호남을 돌아다니시며 삼천문물을 살펴보시고, 그 이듬해 봄에 집에 오셔서 춘향가 1편올 지으셨는데, 이 또한 당시 선비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고 되어 있어, 그가 지은 소위 〈晩華本 春香歌〉는 호남의 문물을 구경한 후인 1754년에 지었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이 〈춘향가〉의 끝에 〈觸翁打鈴執(늙은 시인이 타령의 가사를 썼다)〉라는 구절이었다. 이로보아 〈晩華本 春香歌〉는 지은이인 유진한이 호남의 산천문물을 구경하는 가운데 들은 바 있었던 타령(춘향가)의 가사를 한시로 옮겨 놓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국 이 시기에는 호남지방에 이미 〈춘향가〉가 존재했으며, 노래로 불리워지고 있었고, 그리고 또 충청도 선비가 감동을 받아 한시로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세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특별히 호남을 돌아본 후에 지은 것으로 봐서 충청도 지방에서는 이 시기에 판소리가 없었거나, 있었다고 해도 보편화되지 못해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晩華本 春香歌>의 내용은 현재의 춘향가와 매우 흡사하다. 긴 사설을 짧은 한시로 번역했기 때문에 자세한 세부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보아〈결연-사랑-이별-수난-재회〉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줄거리와 등장인물에 있어서는 현대의 것과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 때에는 〈타령〉 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는 사실, 호남지방에는 최소한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널리 퍼져 보편화되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양반들이 관심을 갖고 한시로 옮길 만큼의 수준으로 성장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때에 이미 현재의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 등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실제 〈춘향가〉의 발생시기는 이때보다 상당 기간을 소급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 생존했으리라고 생각되는 가객은 하한담(혹 하은담이라고도함), 최선달, 우춘대 등이다. 최선달과 하한담은 r조선창극사』에서 전도성이라는 명창이 그보다 선배인 박만순 ·이날치 등이 역대 명창을 순서대로 호명할 때 맨 앞에 들던 사람이었다는 중언을 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또 1824년의 〈甲申完文〉이라는 광대들의 집단 민원을 적은 글의 인명을 적은 난의 맨 끝에 〈等 河段置〉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한담과 하은담은 동일인인 것으로 생각되며, 또 제일 연장자인 것이 분명하므로, 대개 18세기에 활동했던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우춘대는 1801년 무렵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는 송만재(宋曉載)의 〈觀優敵〉라는 총50수로 된 7언절구에 등장한다.

長安盛說禹春大
當世誰能善繼聲
一曲뿜前千段鎬
權三우甲少年名
(장안에선 많이들 우춘대를 말하지만, 오늘날 누가 능히 그 소리 이어갈까. 한곡이 끝나면 술동이 앞에는 천 필의 비단이 (보수로) 쌓이는데 ,권삼득과 모흥갑이 소년으로 이름 있구나.)

이 시의 내용으로 보면, 당시(1810년경)에 우춘대는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명창이었으며, 이제는 후계자가 누가 될 수 있을 것인가가 관심사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춘대는 18세기에 왕성한 활동을 한사람으로 보여지고, 권삼득과 모홍갑은 19세기에 들어서서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우춘대는 어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으나, 하한담과 최선달은 전주 신청에서 각각 大房과 都山主였다는 사실을 보면, 판소리의 초기에 전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 결정적인 공헌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觀優敵〉에서 주목되는 점은, 송만재가 이 시를 쓰게 된 이유를 〈우리나라에는 과거에 급제하면 광대 제인들을 불러 노래와 재주를 구경하는 풍속이 있는데, 금년 봄 우리아이가 과거에 급제하고도 집안이 가난하여 한 바탕의 놀이를 베풀 수 없으므로 시를 짓는다〉고 밝히고 있는 점이다. 이를 보면, 초기의 판소리는 과거급제와 같은 잔치에 초대되어 가는 형태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인생의 중요한 계기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축제(잔치)와 함께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판소리는 현재의 것보다는 음악성에 있어서나 사설 내용에 있어 훨씬 단순하고 빈약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과 같은 다양한 장단과 음악은 훨씬 이후에 뛰어난 광대들에 의해 창조되고 발전되어 판소리를 더욱 훌륭한 예술로 발전시켜나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전북 지역의 소리관들은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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