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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5 | 연재 [문화기고 ]
전북의 민속놀이 2
민중적 촛불 축제의 미학
김익두 전북대 국문학 강사(2003-09-08 17:41:02)

1. 출발-민족공동체적 연행의 원형을 찾아서
지난번에 우리는 민속놀이의 개념, 범위와 성격, 그리고 한국 민속놀이 전반에 있어서의 전북 민속놀이의 특징 등을 간략하게나마 검토해 보았으므로, 이번부터는 가벼운 마음으로 실제 전북 민속놀이 세계에로의 '신비한'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놀이란 일상생활을 떠나 실제적인 목적을 추구하지 않고, 어떤 일정한 규칙에 따라, 그 자체의 즐거움으로부터 행위의 동기가 유발되는 정신적 ·육체적 활동인 바에야 구태여 특별한 준비는 필요 없는 것, 그저 일상생활의 수고로운 짐을 잠시 내려놓을 때 우리는 곧 놀이 세계에로의 여행을 떠날 준비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을 떠난다는 점에서 신비한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전북지역의 민속놀이들이 살고 있는 마을의 동구에 도달해 있다.
옛날에는 걷거나 혹은 우마(牛馬)를 타고, 지금은 차를 타고, 전주에서 완주군 소양면을 지나 '곰팃재'-지금은 '모랫재'를 넘으면, 우리는 전북의 동부 산간지역인 '진안고원'의 신선한 선경으로 올라서게 된다. 거기서 다시 장수군 장계를 향해서 가다 보면 장계와 장수읍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 길-장수읍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어서 한 오리쯤 가면 오른쪽 길옆으로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 삼장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나는 이 마을을 l987년 양력 1월 1일 날과 이 마을 '마을굿'이 있던 그 해 음력 정월 초사흗날, 두 차례 방문하였다. 당시 이 마을의 이장이었던 한용석씨(당시 45세)의 안내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마을에 관한 이야기들과 이 마을에 옛부터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는 마을굿에 접하게 되는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2. 마을과 마을굿 
"이 마을은경관이 수려해서 지세께나 본다하는 사람이면 지나가다가 세 번은 되돌아보게 된다고 '삼고리(三顧里)', 큰 정승 부자가 여기서 셋이나 나왔다고 해서 '삼장(三壯)'마을이라 한다. 마을 형국은 소(牛)형국인데, 일제 때 '일본놈'이 와서 소꼬리 부분의 혈을 자르니 붉은 피가 흘러 나왔으며, 그 뒤부터는 장자나 정승이 안나오고 마을이 잘 안된다. 「흥부전」에 나오는 흥부 형제가 살던 곳도 이곳이라는 말이 옛부터 전하여 온다." 이렇게 이 마을의 태화섭씨(당시 67세)는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흥부전」에서 흥부 형제가 산다고 되어 있는 '삼도(三道)어름'은 바로 이곳이라는 얘기다. 전라 ·충청 ·정상도 사람들이 함께 만나 장을 보던 곳도 장이 바로 이곳에서 얼마 아니 되는 곳 장계 장터였던 것을 보면 이 얘기도 일리는 없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을을 들어서면 동구 왼편에 돌들을 둥그스름하게 쌓아올려서 만든 누석탑이 있는데, 이것은 마을 입구가 너무 많이 열려 있어서 마을의 기(氣)가 마을 밖으로 다 빠져나가 '마을이 헝게(쇠약하므로)' 이것을 막기 위해서 쌓은 탑이라고 당시 63세였던 김정임씨(여)는 말씀하셨다. "원래는 탑이 둘이었다. 하나는 마을 안쪽에 할아버지 당산탑, 마을 입구에 할머니 당산탑이 있었다. 그런데 '새마을사업'을 할 때 이 탑을 모두 없었다가 그 후 해마다 마을에 우환이 떠나지 않고 불의의 사고가 자주 발생하여 다시 옛날에 있던 당산을 새로 만들게 되었다. 이 때 예전에 따로 있었던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을 하나로 합쳐서 마을 앞 동구에다가 누석탑을 쌓고, 예전에 하던 대로 굿을 치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이 행사의 이름을 '탑제(搭票)'라고 한다. 옛날에는 정월 초엿샛날에 탑제를 행했으나 지금은 음력 정월 초사흗날 한다. 그러나 이날 마을에 부정한 일이 발생하면 다른 길일(吉日)을 다시 잡아서한다." (태화섭씨 말씀) 이 '탑제' 행사를 보고 들은 대로간략하게 기술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정월초의 길일(吉日)-예전에는 초엿새, 지금은 초사흘-의 오전 깨끗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마을의 여성풍물패가 풍물소리를 울리며 마을 집집을 돌며 부정한 일이 없는 집만을 골라 제물감-쌀·팔 등-을 걸립(乞粒)하여다가 이날 오후에는 미리 정해진 유사(有司)네 집에서 제물-팥죽 ·돼지머리 ·먹 ·과일 등-을 장만한다.
해가 지면 마을의 남자들이 제물의 일부를 지게에 짊어지고 풍물을 울리며 마올 뒷산의 산신당-집은 원래 없고 터만 정해진 장소-으로 올라가서 풍물 소리를 그치고 제물을 진설한 다음 약식으로 산신제를 지낸다.
남자들이 산신제를 지내러 뒷산으로 올라가 있는 동안, 여자들은 마을 앞 동구의 누석탑 당산으로 제물을 가지고나가 양산 옆 공터에 모닥불을 피우고 산신제를 모시러간 남자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산신제를 마친 남자들은 다시 풍물을 울리며 마을 뒷산을 빙돌아 여자들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기다리고 있는 마을 앞의 당산으로 내려와 계속 풍물을 울리면서 당산 주위를 돈다.
남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여자들은 이 때 누석탑 당산에다가 집집마다 가져온 횃불을 제각기 정성껏 밝혀 놓고, 공동으로 결립하여 유사집에서 장만한 제물들-팥죽 ·돼지머리 ·먹 ·과일 등-을 누석탑 밑에 차려 놓은 다음 남자들은 풍물소리를 그치고 무당이나 '점쟁이'가 간단한 '비손(기원을 하며 손을 비는 행위)'을 하고 여자들은 각자 자기 자신이나 집안의 소원을 빌면서 역시 집집마다 가지고온 백지를 불살라 소지(燒紙)를 올린다.
이렇게 해서 제사 행위가 끝나면, 이 제사에 참여한 마을남녀들이 함께 모닥불 주위에 둘러 앉아-이 때는 마을의 남녀노소가 모두 참여한다-제물을 나누어 먹고 다시 풍물을 울리면서 한 바탕 흥청거리고 논다.
이 놀음판이 어지간히 무르녹으면 마을 사람들은 풍물패를 앞세우고 마을 안으로 들어와 제물을 장만한 유사집으로 몰려가 춤추고 노래하며 밤새워 논다.

3. 삼장마을 마을굿의 의미 혹은 의의
이 연행이 지금도 이렇게 계속 행해지고 있는지는 확인해보지 않았으나 3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아도 그 생생한 감동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마을 전체 공간이 폭넓게 두루 연행의 장으로 활용되면서, 풍물굿의 흥겹고 충동적인 가락이 마을 전체를 술렁이게 하면서 이윽고 밤이 오고, 마을의 남녀가 모두 대등하게 동참하여 서로 패를 이루어 산신제와 '탑제'를 지낸 다음, 탑에서는 휘황찬란하게 촛불들이 타오르는 가운데, 광장의 모닥불 주위에 남녀노소가 함께 모여 제사음식들을 나누어 먹고, 함께 어울려 춤을 추고 노는 판에 끼어들어 나는 우리 민족사의 태초부터 타오르던 한민족공동체의 굿과 놀이의 심부, 그 원형적 불꽃 속에 동참해있다는 감동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이 마을굿은 일종의 마을공동체 단위의 축제 festival로 서제의 ritual와 놀이 play가 결합된 문화복합체임을 알 수 있다. 제의도 놀이처럼 일상생활을 떠나 일정한 전승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놀이와 유사하지만, 어떤 실제적인 목적이나 이익-예를 들면 마을의 평안 등-을 추구하며 그 동기가 그 자체의 즐거움보다는 인간에 대한 '해악'을 물리치고자하는 어떤 실용적 목적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놀이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마을공동체의 축제는 제의적 측면과 놀이적 측면이 결합 융화된 일종의 거대한 문화적 연행형식인 셈이다.
일단 이 마을굿 축제가 시작되면 한 마을 전체가 일상적인 삶의 차원을 벗어나, 일상과는 다른 규칙이 지배하는 어떤 새로운 세계에로 전이 transformation되어 간다. 그러한 전이는 전통적인 관습에 의해 마을 사람들의 심성 속에 전승되고 있다.
전이를 위해 가장 큰 역할을 직접 담당하게 되는 것은 풍물패이다. 풍물굿은 마을굿이 시작되는 단계인 제물의 걸립에서부터 그 집단적이고 반복적 ·충동적인 가락을 마을 전체에 두루 울려 퍼지게 함으로써,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일상과는 다른 어떤 자유로운 세계의 리듬과 느낌에 젖어들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을 사람들은 이 풍물패의 유감주술적인 마력에 이끌리어 일상의 차원에서 축제의 차원으로 이동해 가는 것이다.
이 마을굿에서는 풍물굿과 함께 무당굿도 '개인굿'이 아닌 마을 공동체의 '대동굿'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점도 돋보인다. 일반적으로 근래에 오면서는 무당굿이 공동체적세계의 해악 제거 보다는 어떤 사적이고 개인적인 해악의 제거를 위한 굿으로 변질되게 되었는데, 이 마을의 마을굿 속에서는 전자의 목적에 부용하면서 마을굿의 제의적 핵심부인 '탑제'의 절정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을굿은 그 구조적인 변에서도 탁월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즉 그것은 일종의 양성 조화적 ·적충적 상승구조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여성들에 의한 걸립 및 제물장만 남성들에 의한 산신제 여성들의 주관과 남성 풍물패의 도움에 의한 탑제 마을의 남녀노소가 함께하는 뒷풀이 축제〉의 과정 자체가 남녀의 양성이 서로 대등한 위상에서 상호 조화하면서 계기적 ·동시적으로 서로 관련된다는 점에서는 양성 조화적이며, 이러한 일련의과정이 반복되고 연쇄되어 마을공동체 전체가 삶의 공동체적 의미를 확인하고 갱신해간다는 점에서는 적층적이다.
이러한 양성적 ·적층적 구조는 남성이나 여성 혹은 아동들만이 행하는 축제나 놀이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좀더 근본적인 화해와 통일의 세계에로 열려 있는 구조인 것이다. 호남지방-특히 전북지역의 축제는 이처럼 남성위주의 대립 ·갈등 구조의 축제보다는 남녀노소나 친소에 관계없이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는 놀라운 통일적 민족연행의 틀을 형성해 내고 있다.
또한 이 축제는 '촛불의 미학'이 얼마나 민중적일 수 있는가를 실천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없다. 마을의 수호신인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이 결합된 암수한몸형의 누석탑에다 싸늘히 검푸른 정월 초사흘의 밤을 배경으로 해서 촛불을 휘황찬란하게 밝혀놓고, 남녀가 어울려 굿을 치고 비나리를 하는 이 축제의제의적 절정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 무자비한 파괴의 시대상황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민족 연행문화의 원형적 실체에 대한 참으로 눈물겨운 감동에 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불란서의 바슐라트가 촛불의·미학을 현학적으로 얘기할 때도, 김소월이나 신석정이 촛불 켜는 밤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때도 신동엽이 초래청에 타오르는 순결한 민족적 젊음의 촛불을 노래할 때에도, 이애주가 훨훨 타오르는 횃불 춤을 보여줄 때에도, 내 마음 한 구석에 밝혀지지 못하고 남아있던 슬픈 어둠이 민중적 촛불의 미학 앞에서는 봄눈이 녹듯이 심화요탑이 되어 불살라져 버리고는 나는 민족적 법열의 심연 속으로 끝 간 데를 모르게 빠져들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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