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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 | 연재 [클래식 뒷담화]
빈필 신년음악회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문윤걸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2013-01-04 15:05:30)

언제부턴지 새해가 되면 통과의례처럼 만나게 되는 음악회가 있지요. 바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Neujahrskonzert der Wiener Philharmoniker)입니다. 한 때는 자국의 음악가가 남긴 작품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을 보며 역시 빈은 음악의 도시답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뭔가 다르구나 하며 부러워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특히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을 들으면서는 마치 애국가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졌고, 앵콜곡으로 연주되는 ‘라데츠키 행진곡’을 들으면서는 나도 오스트리아 사람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빈필의 신년음악회는 매년 새해 첫날에 빈의 오래된 극장인 무지크헤라인 홀에서 열립니다. 입장권이 아주 비싸지만 세계 각국에서 찾아 온 사람들로 일찍 매진되곤 하지요. 그래서 실제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빈 시청 앞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나 TV 실황중계를 통해서 신년음악회를 만나게 됩니다.

빈의 시민들이 빈필 신년음악회로 새해를 시작하는 전통은 1941년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빈필의 상임지휘자였던 클레멘스 크라우스가 12월 31일 요한 스트라우스 2세와 그 동생 요제프 스트라우스의 작품들로 프로그램을 짜서 공연을 하였고, 다음 날인 1월 1일에 그 프로그램 그대로 다시 한번 공연을 하였습니다. 이 공연에 대한 반응은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1938년 오스트리아 정부를 장악한 나치 총수가 독일에 나치 군대를 요청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되었습니다. 1800년 초 까지만 하더라도 세계 최강이던 오스트리아가 100여년 만에 식민지 국가로 전락해버린 것이었습니다(사운드 오브 뮤직이 생각나지 않으세요?). 더욱이 오스트리아는 지배국인 독일이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원하지 않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왈츠와 폴카만으로 구성된 너무나도 오스트리아적인 신년음악회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음악회가 오스트리아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빈필은 독일 아리아계 연주자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었고(독일 나치는 오스트리아와 합병한 후 바로 빈필에 유대계 단원들이 많다며 강제 해산하려 했고, 독일의 위대한 지휘자 푸르트벵글러 등이 반대하고 나서자 유태계 단원들을 골라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아리아계 단원으로 채워 넣었답니다) 단장 역시 나치 당원이자 친위대원인 빌헬름 예르거라는 사람이어서 이 음악회는 오스트리아 국민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당시 오스트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나치당원들을 위한 위안잔치 같은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음악회는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던 나치들은 흥겨운 왈츠와 폴카 리듬에 더욱 흥겨워했고,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사람들대로 자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 요한 스트라우스 일가의 음악으로 채워진 음악회에 만족해 했습니다. 그 후 이 음악회는 매년 같은 날 반복하게 되었고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전통있고 유명한 신년음악회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왈츠가 빈에 등장한 것은 1,800년대 초입니다, 1,800년대 초는 유럽에 근대사회와 제국주의의 토대가 형성되던 시기로 수시로 전쟁과 정변이 일어나던 격변의 시기입니다. 전쟁과 정변이 잦으면 결국 가장 힘든 사람들은 일반 국민입니다. 전쟁과 격변에 시달리던 빈 시민들은 뭔가 달콤한 위안거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왈츠로 빈은 삽시간에 춤바람에 휩싸였습니다. 심지어는 한창 전쟁 중인데도 빈 곳곳에 무도회장이 생겼고 수많은 왈츠곡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빈을 왈츠의 도시, 춤바람의 도시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당시 왈츠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왈츠는 사람들에게 전쟁이나 정치, 사회문제 등 골치 아픈 문제를 잊게 하는 일종의 환각제 같은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회의에 참석한 유럽 각국의 지도자들이 달콤한 선율의 왈츠에 빠져 회의는 제껴두고 와인과 왈츠 파티에 몰두하다 돌아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회의는 춤춘다’라는 풍자가 나돌 정도였습니다. 사실은 이러한 이유로 왈츠는 아주 오랫 동안 정통 클래식 음악의 범주에 들지 못했습니다. 인간에 대해 아무런 고민없는 음악, 그래서 이발소 그림같은 싸구려 클래식 음악으로 취급받았답니다. 오늘날 왈츠를 클래식 음악의 한 장르로 올려 놓은 데는 빈필의 신년음악회 공이 큽니다.

특히 지휘계의 카리스마, 카라얀의 공이 가장 큽니다. 카라얀은 3일간 계속된 1987년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는데 그동안 가벼운 오락 음악정도로 취급되던 왈츠와 폴카를 아주 우아하고 기품있는 곡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특히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흑인 소프라노 캐슬린 배틀의 <봄의 소리 왈츠>였습니다. 캐슬린 배틀의 맑고 아름답고 기품있는 소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플루트와 주고 받는 노래는 종달새의 지저귐 그 자체였습니다. 그동안 신년음악회는 지휘자들이 왈츠와 폴카 등 부담없는 곡을 연주하기 때문에 잠시 쉬는 기분으로 임했는데 카라얀은 다른 연주일정을 취소하면서까지 신중하게 준비해서 신년음악회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내가 하면 뭔가 달라 그런 마음이었던가 봅니다. 어쨌든 신년음악회의 새로운 전기가 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신년음악회의 레파토리는 물론 빈 출신 작곡가들의 춤곡이 중심입니다. 하지만 지휘자의 재량에 따라 간혹 빈 작곡가들의 춤곡이 아닌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이 연주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이 때는 지휘자가 큰 각오를 해야 합니다. 선곡에 타당한 이유가 없을 경우에는 빈필 단원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아야 하니까요. 그동안 작곡가의 탄생이나 사망 몇 주년 이런 식의 이유 없이 곡을 선정했다가 단원들과 갈등을 빚은 지휘자들이 몇 있었습니다.

신년음악회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해도 오스트리아의 비공식국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연주되는 순간입니다. 어쩌면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이 순간을 위해 신년음악회를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이 연주되기 직전에는 지휘자와 단원들이 반드시 청중들에게 새해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신년음악회 첫 해 부터 레파토리에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작품이 고정 레파토리로 자리잡은 것은 1967년 부터로 이 작품을 레파토리에 집어넣은 것은 당시 빈 필의 라이벌이었던 베를린 필의 지휘자였던 카라얀(잘츠부르크 태생이니까 오스트리아 사람이네요)이었습니다. 그는 1967년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작곡된 지 딱 100주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이 작품을 레파토리에 포함시켰고 대단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카라얀은 이벤트에도 능했나 봅니다.

신년음악회를 연주하는 빈필은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완고한 교향악단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모든 신입단원들은 선배로부터 일정 기간 엄격한 도제식 훈련을 받은 후 오디션을 통과해야 합니다. 또 최근까지 여성단원이나 지휘자를 거부해 여성인권단체들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또 혼혈이 아닌 완전한 비유럽권 혈통의 단원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년음악회를 지휘한 아시아계 지휘자는 딱 두 사람입니다. 한 명은 인도 출신의 주빈 메타(1993, 1997, 2000, 2004, 4회)이고 또 다른 한명은 일본인 지휘자 세이지 오자와(2002, 1회) 뿐입니다. 정명훈은 2007년에 빈필과 연주회를 갖기는 했지만 아직 신년음악회에 초청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더라도 한 해를 자기들이 가장 사랑하는 음악가의 작품으로 시작하는 빈의 전통은 사랑스럽고 존경받을 만한 전통인 것은 분명한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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