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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2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세상에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위하여
<미스틱 리버>
송경원 영화평론가(2013-02-05 10:37:18)

지나간 세월은 되돌릴 수 없기에 아름답다. 아니 안타깝다. 사실 매순간이 일생에 단 한번 뿐인 소중한 순간이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뒤로 돌린 채 마치 소중한 보석이라도 되는 양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과거에 살고픈 강렬한 욕망은 유장한 세월의 흐름 앞에 결국 무릎을 꿇는다. 세월이 잔인한 까닭은 아무리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도 어느새 우리를 점점 더 먼 곳으로 데려다 놓기 때문이다. 이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은 모든 것을 덮어주는 강물의 흐름을 닮았다. 그렇다면 과거에 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과거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사람은 어떨까? <미스틱 리버>는 과거에 살 수밖에 없었던 세 남자, 어른이 되지 못한 상처받은 세 소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연출한 작품 중 드물게도 본인이 직접 출연하지 않는 영화 <미스틱 리버>는 데니안 르헤인의 동명소설을 원작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아동 성폭행범에 의해 상처 받은 사람들에 관한 이 소설은 노장의 날카로운 연출력에 주연배우인 숀 펜, 팀 로빈스, 케빈 베이컨의 호연이 더해져 실로 깊이 있는 영화로 다시 태어났다. 많지 않은 쇼트 수와 절제된 배경음악은 얼핏 이 영화를 지루하고 심심한 듯 보이게 하지만, 일단 영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나면 깊고 조용히 흐르는 미스틱 강물처럼 어느새 풍성한 의미 속으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어두운 장막이 드리워진 보스턴 외곽에 살고 있는 지미(숀 펜)와 데이브(케빈 베이컨), 숀(팀 로빈스)은 변하지 않는 우정을 약속하며 마르지 않은 시멘트 바닥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긴다. 그러나 데이브가 미처 자신의 이름을 다 써넣지 못했을 때 형사를 가장한 남자가 소년들을 혼내며 데이브를 차에 태워 데려간다. 그 순간 소년들의 시계는 멈춘다. 형사를 가장한 두 남자는 데이브를 납치해 며칠 간 번갈아 가며 성폭행을 했기에 겨우 탈출한 데이브도, 그런 데이브를 잡아주지 못한 남겨진 두 소년에게도 순수의 시절은 그렇게 끝나버린다. 문제는 그 시절의 끝이 너무 잔인하게 찾아왔다는, 그래서 결국 소년의 시절을 보내고 어른의 시절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상처의 시간으로 멈춰버렸다는 데 있다.

우리를 과거에 묶어두는 가장 강력한 힘은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아니라 상처와 후회다. 상처는 우리를 과거에 머물게 한다.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상처는 데이브를 그 시절로부터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고, 성폭행의 대상이 데이브가 아닌 자신들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죄책감 앞에서 지미와 숀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서로를 마주한다는 것이 이제는 상처를 응시하는 것이 되어버린 세 사람은 이후 각자의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의 껍데기는 시간에 떠밀려 어른이 되었을지언정 그들은 여전히 겁에 질려 갇힌 11살 소년들이었다. 그로부터 25년 후 지미의 딸이 살해당하면서 세 사람의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숀은 가출한 아내에 대한 미련에 가득찬 형사로, 강도사건으로 2년간 복역하고 나온 지미는 식료품 가게의 주인으로, 성폭행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데이브는 지미의 딸을 살해한 용의자가 되어 마침내 다시 서로 관계하는 것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지미의 딸을 살해한 자를 밝혀나가는 추리극의 틀을 유지한 채 범인이 점차 윤곽이 점차 드러내는 과정에서의 장르적 쾌감을 자아낸다. 그러나 영화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세밀한 서스펜스일지언정 정작 눈이 가는 것은 주변부 상처 입은 사람들의 선택과 절망이다. 세 남자는 서로 닮은꼴이며 마주하기 괴로운 상처를 공유하는 자들이다. 아문 줄 알았던 상처는 단지 시간의 억지에 떠밀려 깊게 가라앉아 있었을 뿐, 얇고 딱지를 두르고 위험하게 유지되던 거짓 평온은 쉽게 깨어져 지미와 데이브의 운명을 결국 파국으로 이끈다. 지미가 데이브를 살인범으로 오해하고 살해하고 온 다음날, 지미에게 진범을 잡았음을 전하는 숀의 말은 운명의 꼭짓점에서 그들 모두에게 무력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운명이 잔인한 까닭은 인간의 힘으로는 그 필연성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데이브를 본 것이 언제냐는 숀의 질문에 지미는 25년전 이 거리에서 성폭행범의 차를 타고 떠나가는 뒷모습이 마지막이라고 답한다. 그것은 잊혀지지 않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데이브의 마음은 실제로 여전히 그 차 뒷자리에, 쥐떼가 들끓은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있다. 몸은 커버렸지만 마음은 이미 그 시절에 두고 와버린 것이다. 그것은 지미도, 숀도 다르지 않다. ‘만약에’의 가정법을 허용하지 않는 운명은 그만큼 잔인하며 숀의 말처럼 그들 모두를 여전히 어린 시절 그 차 뒷자리에 묶어둔다.

어둠이 깔린 미스틱 강기슭으로 데이브를 끌고 온 지미는 범행을 자백하는 데이브의 배에 칼을 꽂은 채 말한다. “우린 죄를 이 강에 묻는 거야.” 보스턴 외곽 삭막한 이스트버킹엄의 무거운 공기를 적시며 미스틱 강은 그저 흘러간다. 도도하고 유유히. 그러나 쉼 없이. 영화의 엔딩에서 보스턴을 감싸고 도도히 흘러가는 미스틱 강 위를 낮고 천천히 훑듯이 비행하는 트래킹샷으로 담아내는 장면은 영화의 이러한 본질을 인상적으로 이미지화시켰다. 결국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사실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며, 그러지 못했을 때 비로소 비극이 태어난다. 세월에 흐름에 따라 변해야 했을 소년들은 상처의 시절에 붙박였기 때문에 운명에 조롱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강렬하게 삶을 갈망했다. 데이브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지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짐승이 되어 데이브를 살해한다. 그에게 복수는 가족을 보호하는 수단의 연장이며 그것이 지미가 사는 이유이다. 데이브 역시 마찬가지다. 칼에 찔린 데이브의 마지막 순간 아직 준비가 안됐다는 그의 말은 제대로 젊음의 꿈을 가져보지 못한 데이브의 회한인 동시에 죽음의 순간 발견하는 삶을 향한 의지다. 이스트우드 감독 영화에 거의 반드시 라고 할 만큼 등장하는 이 역설적인 상황이야말로 운명에 바스라질 수밖에 없는 상처 입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마지막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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