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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2 | 연재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저항의 알레고리, 금지된 위대한 영화
전주국제영화제 5 - 소비에트 연방의 금지된 영화들 ①
임안자(2013-02-05 10:37:30)

2006년 전주영화제는 문화관광부로부터 ‘2005년의 우수영화제’로 평가를 받았을 만큼 안정된 성장기를 맞이하면서 전망은 어느 때보다도 밝아보였다. 7회를 맞던 그 해에 나는 전에 비하여 프로그램 쪽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겨우 인디비전 부문에 러시아 감독 알렉세이 페드로첸코의 <달에 처음 간 사나이>와 시네마스케이프 부문에 튀니지 나세르 케미르 감독의 <밥아지즈>를 추천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의 하나로 꼽히는 하룬 파로키 감독을 ‘디지털 스펙트럼’ 부문의 심사위원으로 초청함으로 시쳇말로 돌 하나로 세 마리의 새를 잡는 효과를 봤다. 파로키 감독은 다큐멘터리, 영화, 텔레비전뿐 아니라 뉴미디어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는 미디어예술가이며 이론가인데 그가 심사위원을 맡는 것을 계기로 그의 2006년의 신작 <인 포메이션>과 <그리피스 영화의 구조에 관하여> 두 편이 전주영화제의 ‘마스터즈’ 프로그램을 통하여 아시아 초연을 할 수 있었고 또 2007년에는 3인3색의 감독으로 뽑혀 2차대전시 유대인들의 임시 수용소로 썼던 홀랜드의 베스트보르크에 대한 작품을 만들어 전주영화제의 재산으로 남겼다.

2006년에 내가 전주영화제에 만든 프로그램은 ‘저항의 알레고리-소비에트 연방의 금지된 영화들’을 주제로 한 특별전으로 내용은 소비에트 연방시대에 금지됐던 영화 열편에 대해서였다. 한마디로 2004년의 쿠바 그리고 2005년의 마그렙 영화와는 또다른 차원에서 모아진 일련의 발굴영화 프로그램이었는데, 특별전의 특이성을 말하면 20세기의 60년대 초부터 1987년에까지 이런저런 정치적 이유로 소비에트 연방에서 상영금지 처벌을 받은 뒤 수십 년 동안 지하에 묻혀있던 영화들로 프로그램이 짜여진 점이며 동양에서 최초로 열린 행사였다. 참고로, 소비에트 연방은 1922년 15개국이 합쳐 이뤄진 사회주의 연합국이었으며 1991년에 해체됐다.

나는 소비에트 영화를 1980년부터 일년간 런던에서 살면서 처음으로 봤다. 그 시절에는 두 애들이 유치원에 다니던 때여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래도 틈만 나면 템스강 남쪽에 있는 영국영화원(BFI)의 영화관을 드나들며 세계의 명작을 봤고, 그 중에는 그 시절에 아무데서나 쉽게 볼 수 없었던 소비에트 영화들도 상당히 들어있어 나에겐 아주 귀중한 경험으로 기억에 오래 남아있었다. 주로 에이전스타인, 푸도브킨, 도브젠코, 베르토프, 쿨레쇼프 바르넷, 코진제프 등 소비에트 초기영화기를 빛낸 감독들의 영화를 봤는데 무성영화에서부터 50년대 말 사이에 만들어진 하나같이 뛰어난 작품들이 소개되어 감흥이 컸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뒤 2004년에 전주영화제로 일자리를 옮기고 내 프로그램을 처음 만들면서 런던에서 감동받았던 소비에트의 영화들이 문득 생각났다. 하지만 아예 이름조차 세계지도에서 사라져버린 소비에의 시절의 영화를 가지고 회고전을 만든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지 싶어 일단 그 일은 뒤로 미루고 쿠바영화 쪽으로 관심을 돌렸던 것이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데서 도움의 손길이 펼쳐졌다. 2004년 9월초에 스페인의 상 세바스찬 영화제에 가있다가 어느 날 영화관으로 가는 셔틀버스 안에서 나는 국제평론협회장 안드레이 플라코프를 만났다. 그는 러시아 출신으로 내가 1993년 국제영화평론협회의 회원이 되면서부터 국제영화제서 자주 마주치는 친지였는데, 우리는 셔틀버스가 영화제 건물 앞에 닿기까지 영화계의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기회에 나는 소비에트 영화의 행방에 대하여 그리고 소비에트 영화의 회고전 가능성에 대해 그의 의견을 물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플라코프는 내 물음에 ‘전주영화제에서 원하면 못할 것도 없다’고 간단히 대답을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대답이 너무 쉽게 나와 내가 좀 놀라워하자 그는 80년대 말의 고바초프의 정치개혁으로 일어난 소비에트 영화계의 변화에 대해 설명을 좀 더 자세히 들려줬다. 그의 말인즉, ‘페레스트로이카로 일컫는 고바초프의 ‘해빙선언’이 나온 뒤 소비에트영화총회에서는 과거 검열문제에 걸려 흔적없이 사라진 영화를 찾아내기 위하여 쟁의조정위원회를 만들고는 구조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구조대의 대표로 뽑혀 4년간 노력한 끝에 여러 지역에서 250편의 영화를 찾아냈으나 그건 빙산에 불과했다. 지하에는 그 몇 배의 영화가 묻혀있을 것으로 추측됐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 발굴된 영화 가운데 상당수는 베를린, 칸, 베니스 영화제를 통해 조금씩 서구 관객에게 소개되었고 이들 대부분은 수상영화로 떠오르면서 국제적 관심을 끌었다. 만일 전주영화제서 회고전을 할 생각이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몇 편 영화가 필요한지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때까지 금지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지만 소비에트 영화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가 도와준다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어 나는 그 자리에서 회고전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 뒤 우리는 2005년 2월에 베를린영화제서 만나 어떤 영화를 뽑을까를 토론했고 5월에 전주영화제 다시 만나 열편의 영화를 뽑았다. 플라코프는 그 해에 내 추천으로 전주영화제의 인디비전 부분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하게 되어 영화선정은 비교적 빨리 끝낼 수가 있었다.

‘영화는 모든 예술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는 레닌의 유명한 문구는 영화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소비에트 정권의 요구를 잘 나타내 보인다. 소비에트의 초기 영화들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만들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체제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검열과 금지는 소비에트 영화사에서 뗄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소비에트 정부는 언제든지 금지령을 내릴 수 있는 절대적 권리가 주어져있었기 때문에 두 번의 검열을 통과했더라도 권력자들의 무작위 횡포에 희생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금지 영역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미학, 도덕, 민족주의나 개인주의 또는 불복종’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30년대부터 소비에트 영화의 표준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월간지 키노테아트르(영화연극)의 라리사 부리우호벳스카 여편집장은 2006년 전주영화제에서 발간한 책자 ‘저항의 알레고리-소비에트의 금지된 영화들’에 쓴 글에서 ‘위대한 영화는 금지된 영화다’라고 썼는데 그런 면에서 전주영화제에 초대된 열 편은 소비에트 시대를 통틀어 검열이 가장 심했던 1960-198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들로 역설적이게도 뛰어난 영화들이 가장 많이 나온 시기로 알려져 있다.

50년대 중반 후르시초프의 유명한 ‘스탈린 우상주의 파괴 선언’으로 시작된 해빙기의 바람은 짧게 끝났지만 경제난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경직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영화제작은 짧은 기간에 몇 배로 늘어났고 소비에트 영화의 산실인 모스코바 국립영화학교(VIGK)를 졸업한 젊은 감독들의 등장으로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과 프랑스의 뉴벨바그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형식의 작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검열문제는 해빙기에도 그치질 않았고 감독들은 정권의 빈틈없는 통제를 벗어나기 위하여 알레고리나 메타포를 이용한 작품을 만들어 정부에서 강요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데올로기에 저항했다.

소비에트의 검열제도는 시나리오와 상영 배급에 중점을 두고 있었는데 전자는 연방지역 영화위원회에서 그리고 후자는 소비에트 영화의 중앙위원회에서 따로따로 검열을 실행했다.

당이나 영화행정부에서는 대중적이고 긍정적인 주인공을 앞세운 영화를 선호했으며 공산당의 독트린에 따르지 않는 영화는 가차 없이 검열에 걸려 지하의 선반 위에 올려졌다. 소위 ‘선반영화’는 그래서 생긴 새로운 단어이며 숱한 감독들이 한번의 금지된 영화 때문에 다시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그러다 고바초프의 시대가 열리면서 검열제도는 사라졌으나 그렇다고 발굴영화들이 곧바로 자유로워졌던 건 아니었다. 선반영화에 대한 최종의 판단과 결정은 전적으로 소비에트의 국립영화원에서 내려졌는데 일부 영화는 발굴되자마자 바로 풀려났지만 다른 일부는 소비에트 국립영화원과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거센 저항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소비에트 영화는 감독의 국적에 상관없이 상부의 결정에 따라 연방지역의 여러 제작소에서 영화를 만들었는데, 러시아의 4편, 우크라이나의 3편, 그루지아의 2편 그리고 투르그메니스탄의 1편이 회고전에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들 10편은 고바초프 개방정치 선언의 전후에 1차적으로 발굴된 60여 편 가운데서도 가장 주요시 됐던 ‘위대한 금지 영화들’이며 제각기 소비에트 검열제도의 잔학함과 불합리성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데 금지영화의 비극성을 좀 더 자세히 들춰보기 위하여 이 자리에 열편의 영화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스무 살(마르렌 후치에프, 러시아, 1961)은 2차대전의 전쟁터에서 아버지를 잃은 20세의 세 친구들을 주인공으로 거짓과 위선으로 일그러진 소비에트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상실감과 좌절에 짓눌려 사는 이들의 일상을 배경삼아 혁명시대의 꿈과 이상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60년대 초의 우울한 사회상을 뛰어난 네오리얼리즘 형식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후르시초프는 ‘감독은 소비에트의 영광스러운 과거사를 무시하고 사회에 쓸모가 없는 인간들을 대상으로 부정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영화를 만들었다’고 호되게 비판하면서 감독에게 다시 영화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두 번째 촬영이 끝나기도 전에 정권은 브레즈네프로 넘어갔고 1964년에 새로 편집된 영화마저 상영의 기회조차 받지 못하고 지하로 사라졌다가 24년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됐는데 전주에서 상영된 프린트는 1988년 감독이 다시 손질한 ‘Director’s Cut’이었다.

우크라이나 랩소디(세르게이 파라자노프, 우크라이나, 1961)는 소비에트 영화의 컬트 감독으로 우러름을 받던 파라자노프 감독이 정부의 위탁으로 만든 유일한 영화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형식의 주류영화에 속한다. 내용은 2차대전이 터질 무렵에 시골에서 자란 젊은 여인이 파리의 국제성악경연대회에서 수상을 하여 조국에 영광을 안겨주고 국제적인 인정을 받은 뒤에도 고향에 돌아와 음악인으로 사회봉사에 힘을 쏟으면서 입대한 애인을 기다리다 다시 평화를 맞는다는 순박한 드라마다. 그러나 그건 줄거리일 뿐, 이 작품에는 파라자노프의 후기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의 특유의 기발적인 장면화와 환상적인 색의 미학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뛰어난 민속적 음악이 빛을 내고 있다. 그루지아에서 태어나고 아르메니아에서 활동한 파라자노프는 예술인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소비에트 정권의 탄압에 누구보다 치열하게 저항한 대가이었으나1974년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형식주의, 신비주의, 민족주의, 동성애자’ 등의 죄목으로 두 번에 걸쳐 15년 감옥생활을 했고 ‘우쿠라이나 랩소디’는 1988년 27년 만에 자유를 찾았다.

목마른 자를 위한 샘(유리 일렌코, 우크라이나, 1965)은 우크라이나 영화의 대부 알렉산드르 도브젠코의 30년대 작품에 뿌리박은 ‘시적 영화’의 미학을 바탕으로 만든 상징성이 짙은 미니멀리즘 스타일의 걸작이다. 시골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외롭게 살아가는 노인에게 마당의 샘물은 죽은 부인과 멀리 떠난 자식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연결시켜 주는 단 하나 밖에 없는 삶의 전부다. 계속 덮여오는 모래 때문에 망각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불모지에서 노인은 미래를 위한 책임감에서 목마른 자들에게 물을 떠주는 행위를 계속하면서 샘을 지킨다. 우크라이나 영화의 얼굴로 불리는 일렌코 감독의 영화는 영화계의 극구 칭찬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형식주의’라는 딱지를 받고 22년 동안 침묵을 강요받았다. 참고로, 일렌코는 파라자노프의 세기적 작품 <잊혀진 선현들의 그림자>의 카메라 연출을 맡았던 소비에트의 유명한 카메라 감독이다.

안드레이 루블로프(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러이사, 1966)는 소비에트 정부가 러시아 미술의 대가 안드레이 루블로프의 탄생 600년을 기념하기 위해 타르코프스키 감독에게 위탁한 프로젝트로서 콘찰로프스키 감독과 같이 쓴 시나리오 ‘안드레이의 수난’을 바탕으로 만든 대작이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화가에 대한 기록이 별로 많이 남아있지 않음을 틈타 자신의 철학적, 신학적 비전이 투시된 루블로프의 새로운 모습을 영상화했다. 영화의 루불로프는 예술의 정상에 오른 성현의 모습이 아니라 예술의 진실성에 다다르기 위해 삶의 밑바닥을 헤매며 수난의 길을 걷는 너무도 인간적인 수도승 안드레이며, 그에다 감독은 종교싸움과 몽골 타타르의 침략, 지배층의 부정부패로 위기에 빠진 15세기 러시아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루블로프가 성화의 대가가 되기까지 그가 겪는 수난의 역사를 여덟 개의 에피소드 통해 우화적으로 설파한다. 관객의 열광적인 찬사에 상관없이 정부는 감독에게 장면삭제를 요구했고 그에 감독이 거절하자 영화는 선반 위에 올려지고 감독은 7년간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가 1984년 유럽으로 망명했다.

아샤의 이야기(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러시아, 1967)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강요가 더욱 드셌던 60대말 한 시골의 집단농장에서 추수기 노동자로 일하는 아샤의 생활공간을 배경으로 소비에트의 단일화된 집단사회에서 젊은 여성이 경험하는 사랑과 결혼 그리고 미혼모의 문제점에 초점을 두고 있다. 부제인 ‘아샤는 사랑했지만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집단사회의 통념을 깨고 미혼모의 길을 택하는 아샤의 홀로서기를 뜻하며, 카메라에 잡히는 가난에 찌든 농부들의 삶은 혁명 반세기 이후 사회주의의 유토피아가 어디쯤에 와있는지를 숨김없이 보여준다. 안드레이 콜잘로프스키는 타르코프스키와 ‘안드레이 루블로프’의 시나리오를 공동저작하고 1965년 키르기스탄의 작가 징기스 에트마토프의 원작 ‘첫 교사’를 영화화 하여 정부의 호응을 받으며 국제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네오리알리즘의 대표작’으로 높이 평가 받은 ‘아샤의 이야기’는 검열에서 ‘너무 추잡하고 어두운 소비에트 비방영화’로 걸려 부분적으로 잘렸고 금지 되지는 않았으나 1988년까지 상영이 하락되지 않아 밖으로 전혀 알려질 기회를 얻지 못했다.

기나긴 이별(키라 무라토바, 우크라이나, 1971)는 브레즈네프 정권의 초강경 정책으로 소비에트 영화가 심한 침체기에 빠졌던 70-80년대의 초기 작품이며 다분히 프랑스 뉴벨바그의 영향을 받은 실험성의 작품이다. 영화는 남편과 헤어져 사는 중년의 여인과 시베리아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려는 사춘기의 아들의 일상을 바탕으로 여인의 고독에 대한 두려움과 아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심리적으로 예리하게 파고들면서 출구가 없는 이들의 사랑과 미움으로 뒤엉켜진 관계를 통해 잔인하고 추한 삶의 부조리를 희극형식을 빌어 보여준다. 소비에트 영화의 모더니즘시대를 열은 이 작품에 대해 우크라이나의 중앙위원회는 ‘소비에트의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를 그릇되게 묘사한 엘리트의 부르주아 영화 또는 페미니즘의 영화’로 죄목을 씌워 상영금지령을 내렸고 감독은 모스코바 국립영화학교의 졸업장을 빼앗김과 동시에 감독엽합회에서 쫓겨나 몇 년간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스튜이오에서 먼지에 덮여있던 ‘기나긴 이별’이 발견된 것은 16년 뒤였다.

체크포인트(알렉세이 게르만, 러시아 1971)는 작가이며 기자로 유명한 감독의 아버지 유리 게르만의 소설 ‘정초의 작전’을 영화에 옮긴 것으로, 나치 군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전방에 배치된 유격대의 세 인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반역사건과 그에 대응하지 못하는 군부의 경직된 도그마 그리고 집단살상에 대한 개인적인 모랄 문제를 과감히 들춰 보여줌과 동시에 영웅주의와 충성으로 미화된 소비에트 군대의 신화를 깨는데 앞장을 섰다. 영화는 초연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정부로부터 소비에트 영화사를 통틀어 ‘최대 스캔들의 영화’로 딱지를 받았다. 게르만 감독은 15년 동안 영화의 프린트를 침대 밑에 몰래 숨겨둠으로 프린트의 원판을 지킬 수 있었다.

장례식(불랏 만수로프, 투르크메니스탄, 1972)은 투르크메니스탄의 이름난 시인이며 음악가였던 아칸 세리의 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민속예술 성격의 대하영화이다. 줄거리는 1876년 부라바이에서 전통적인 장례식을 미끼로 행해지는 폭군의 횡포에 대항하는 민중의 지도자 아칸을 중심으로 엮어지며 억압자 밑에서 자유를 잃고 고통당하는 부라바이 민중의 슬픈 역사가 일곱 개의 에피소드를 플래쉬백으로 진술된다. 원래 음악전공가인 만스로프 감독은 ‘장례식’에서 성악, 악기, 시 낭독 등의 음향효과를 최대한 활용했으며 이를 폭군에 저항하는 민중의 슬기로운 정신력의 상징으로 승화시켰다. 하지만 영화는 ‘민속학적인 내용과 알레고리의 표현법, 민속언어, 정권에 저항하는 장면’ 등이 검열에 걸려 16년간 창고에 갇히고 말았다.

노래하는 검은 새가 있었네(오타르 이오셀리아니, 그루지아, 1970-1974)는 반복적인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꾀하는 젊은 청년의 헛된 꿈을 익살스럽게 그린 사회비판적인 ‘새로운 영화’다. 작곡가를 꿈꾸며 오케스트라에서 타악기연주자로 밥벌이를 하는 주인공은 7분으로 끝나는 자신의 하찮은 연주에 매달리기보다는 연주장 밖의 수시로 변하는 거리의 풍경에 더 마음이 쏠린다. 거리에는 손만 벌리면 모든 게 잡힐듯한 무한한 가능성과 찰나의 순수한 즐거움이 널려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시간이 없는 그는 길에서 예쁜 아가씨를 돌아다보는 찰나 자동차에 치어 목숨을 잃는다. 감독은 이 영화를 ‘추상적인 희극’이라고 불렀는데, 그의 4편 작품이 다 그랬듯이 이 영화도 특별한 이유 없이 금지처분을 받아 4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칸영화제의 설득으로 1974년 ‘감독주간’에 초대되면서 프랑스 평론계의 대환영을 받았다. 이오셀리니 감독은 그 당시 소비에트 정부의 외무부장관이었던 그루지아 출신 에드워드 쉐바드나제의 도움으로 1982년 구르지아를 떠나 프랑스로 망명했다.

참회(텐기즈 아불라제, 그루지아, 1984)는 5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그루지아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던 ‘저항영화’의 제일인자인 아불라제의 명작이다. 그루지아의 정통예술에 깊이 뿌리박은 신랄한 풍자정신과 풍부한 유머감각, 동화적인 민담의 영향을 받은 그의 작품경향은 코카서스 지역영화의 정체성 회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참회’는 1984년 그루지아 공산당의 당수 쉐바드나제의 정치적 보호아래 그루지아 국립텔레비전의 지원으로 제작된 그루지아의 독립제작품이다. 영화는 30년대 사회를 생지옥으로 만들었던 독재자의 장례식을 출발점으로 독재자의 희생자인 한 여인의 법정진술을 통해 어둠 속에 묻힌 근대사의 참사를 설파한다. 히틀러의 콧수염과 무쏠리니의 불룩한 배와 검정색의 옷, 스탈린의 안전부장 베리아의 코안경을 쓴 희극적이고 기괴한 주인공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스탈린의 화신이여 끝에 가서 선조의 죄과를 대신하여 자살로 참회하는 손자의 모습은 스탈린의 폭력성 정치의 비극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참회’는 초연의 문턱을 무사히 넘었으나 쉐바드나제가 모스코바로 떠나는 바람에 비밀경찰의 온갖 방해를 받다가 고바초프의 개혁정책 결과로 1986년에 소비에트 전 지역에서 상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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