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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3 | 연재 [이십대의 편지]
나는 별 일 없이 잘 산다
강명지(2013-02-28 11:41:43)

오후 세 시, 시장 골목을 누벼들어간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른다. 만나는 상인들과 인사를 나눈다. 가게 문을 연다. 설거지와 밑준비를 하고, 술장을 체크하고, 바닥을 쓸고, 의자의 흙을 털어낸다. 가게의 등을 켠다. 자리는 달랑 여섯 개다. 쉴 새 없이 손님이 자리를 바꾸며 앉는 날도 있고, 한 자리나 채워질까 말까 하는 날도 있다. 아무튼 만족스러운 한 잔을 내고자 머리를 굴리고, 손을 움직여 잔을 채운다. 밤 열한 시, 문을 닫는다. 셔터를 내린다. 남은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한다. 나는 시장에서 장사를 한다. ‘낡아빠진’ 시장에서, 칵테일 바를 하는 게 신기해서인지 걱정돼서인지 “안 심심하냐” 부터 “부모님은 뭐라고 안 하시냐”는 진지한 물음까지 참 많은 질문을 받는다. 정색을 하기도, 웃으며 대답하기도 한다. 나는 참 별 일도 없이 잘 살고 있노라고. 비교적, 을 붙이지 않아도. 다직업가라는 명함을 달고 있다. 직업이 많다는 뜻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만 열거해 봐도 바텐더, 디자이너, 음악가 등 여러 개다. 거쳐온 일도 많았다. 보람이 큰 일도 했고, 버겁도록 큰 일도 휘둘러 보았다. 농땡이도 피워 보았고. 그리고 작은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리 젊어도 체력, 정신적 한계 이상으로 계속 일하는 건 좀 힘들다는 것과, 이러다 삶이 피폐해지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시키는 공부를안 하고 딴 일을 하면 참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노동 시장에 뛰어들었던 영특한(?) 인재였던 나는 잠시 일을 쉬고, 졸업을 목표로 낙향했다.‘이제부턴 졸업뿐이야!’ 일은 조금만 하리라 굳게 마음먹고 내려왔는데 옆으로 샜다. 우연찮게 내가 관심을 가진 정책을 고민하는 캠프에서 나를 불렀다. 피가 살짝 끓었다. 수업을 또 빠지고 캠프 일에 투신했다. 경선에서 탈락했다. 캠프야 다음 선거가 있지만, 수업을 또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아이고 수업 들어가기 싫은데 뭘 하지… 걱정하며 교정을 걷던 도중 포스터를 한 장 발견했다. <남부시장 청년가게의 사장님을 찾습니다> 바로 지원했다. 개인 창업이되 공동체로서 청년 장사꾼끼리 남부시장에서 함께 사는 것을 실험하는 프로젝트라는 설명이 좋았다. 모집설명회와 면접은 후루룩 지나갔고, 모든 장사꾼들이 사포와 드릴과 망치를 벗삼은 한 달도 지나 청년몰이 열렸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시작한 가게들은 재래시장이라는 우려를 놀리듯 남부시장에서 벌써 9개월째 대체로 순항하고 있다.

9개월간 장사를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은근히 가게가 힘들지 않느냐며 자신의 레일 위 삶이 낫다 말해 주기를 바라는 외로운 손님, 술 한모금마다 주문 외듯 맛있다 해 주는 고마운 손님, 매번 마감 직전에 바람처럼 다녀가는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손님까지… 가끔 마찰음이 생길때도 있지만 여유롭다. 할 만하다. 실은 프로젝트 단위로 쪼갠 것도 아닌데도 이렇게 오래 한 일에 싫증내지 않고 재미나게 해 본 적이 있나 하고 놀라기도 한다. 나는 내일도 시장으로 출근한다. 도넛 집 아주머니는 머리를 또 했냐고 물어 오실 것이고, 쪼론히 앉은 미곡상 할머니들은 술 파는디 벌써 나오냐며 알은 체를 하실 것이다. 이 층으로 올라가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한, 더 만나게 할 내 가게가 있을 것이고, 같이 삶을 부벼 온 청년 장사꾼 동료들이 나를 반겨 줄 것이다. 아. 나는 구 개월 만에 시장을 참 좋아하게 되었다! 사실 재래시장은 매력적이다. 편리하고 매끄럽지는 않지만 다채롭다.무엇보다도 전통이라는 말로 요약하기 어려운 시간의 켜가 있다. 역사라고 부르기에 덜 거창할지는 몰라도, 오랜 세월 사람들이 왕래하며 쌓은 가치는 일부러는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큰 자본들에 치여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정부나 사회적 기업의 주도로 이런 가치를 보존하려는 노력들이 있음에 감사한다. 덕분에 시장에 층층이 올린 세월의 탑 위에 내가 또 돌 하나를 얹을 여력이 생긴 것 아닌가. 가게가 불에 타거나 내가 아프거나… 별 일이 없는 한, 앞으로도 술을 잘 말고 디자인도 하고 노래도 하고 가끔 글도 쓰며 잘 지낼 것이다. 쫓기듯 비교하지도 않고, 걱정 없이 내키는 만큼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다. 청년몰 슬로건 말마따나, 난 ‘적당히 벌고 아주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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