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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3 | 연재 [클래식 뒷담화]
베르디, 음악과 정치에 다리를 놓다
문윤걸 |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2013-02-28 11:41:51)

며칠 전 아주 오랫동안 찾고 있던 글 한편을 찾았습니다. 바로 저의 작은 외할아버지께서 남기신 글입니다. 작은 외할아버지께서는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성악을 공부하시고 해방전후 광주, 목포, 순천 등에서 성악가로, 문화운동가로, 음악교사로 활동하시다 1948년 여순사건에 휘말려 안타깝게 돌아가셨습니다. 1990년대 중반, 해방전후의 한국음악사를 연구한 후배의 학위논문을 보던 중 작은 외할아버지께서 1945년에 어느 문예잡지에 글을 남기셨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글을 찾다 포기했는데 며칠 전에 친지가 찾아낸 것입니다. 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이제 해방된 우리 나라는 신문화를 창조하는 문화국가가 되어야 한다. 문화국가의 건설을 위해서는 문화는 정치화되고 정치는 문화화되어야 한다. 문화와 정치는 무관하다 하나 국민생활과 유리되고 정치가 담기지 않은 문화는 한낱 오락이요 유희일 뿐이며 진정한 예술은 삶이 담긴 것이어야 하며 정치에 반영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조선을 건국하는데 모든 예술가들은 이념을 향하여 전진하고, 실천을 동반한 문화운동에 앞장서야 한다’이 글을 읽는 동안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하는 소감과 함께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오히려 지금보다 그 시절이 더 치열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민족, 조국, 통일, 반외세 등 치열한 이념전쟁 속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때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른 정치체제를 만들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한 몸 바치려 했을 것입니다. 서양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로 꼽는 베르디(주세페 포르투니노 프란체스코 베르디 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년~1901년)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베르디는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 그리고 새로운 국가건설이 숨가쁘게 진행되던때인 1860년 전후로 활동하면서 이탈리아의 정치적 격변을 자신의 음악적 활동에 반영하였습니다.

온 유럽을 호령하던 로마의 몰락과 새로운 항로의 개발로 지중해 무역이 힘을 잃자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들은 급속히 쇠퇴하였습니다. 특히 제국주의의 등장으로 이탈리아 북부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차지하였고, 남부 도시국가들은 에스파니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을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며 분열과 반목을 계속해 사분오열 지경이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을 유럽에 전파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은 제국주의 봉건왕조에 시달리던 약소국가들에게는 희망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북부 이탈리아에서부터 민족주의 운동, 민족해방운동이 시작하여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에스파니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같은 외세로부터의 독립과 사분오열된 도시국가 통일운동이 뜨겁게 전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디 자주, 독립, 통일운동이 그리 쉬운 일입니까? 수백년간 분열되었던 탓에 여전히 이탈리아인들은 서로 반목하면서 하나로 뭉치지 못하였습니다. 베르디는 젊은 시절 반오스트리아 단체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운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는 어쩌면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와의 악연이 영향을 주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르디는 이탈리아 북부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두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오스트리아 군대가 쳐들어와 마을을 초토화했습니다. 그들은 닥치는대로 마을 사람들을 찾아내어 학살했는데 베르디의 어머니가 두 살짜리 베르디를 옆구리에 끼고 한팔로 밧줄을 타고 교회의 종루 꼭대기까지 올라가 겨우 목숨을 구했습니다. 어린 시절 다른 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사는 것이 얼마나 치욕적인 것인지를 목숨을 담보로 경험한 셈이지요(빈필이 신년음악회 앙콜곡으로 관객과 박수치며 연주하는 라데츠키 행진곡은 이탈리아인들에게는 독립투사들이 흘린 피를 연상시키는 노래랍니다. 오스트리아의 라데츠키 장군이 밀라노의 독립투쟁을 진압한 후 이 행진곡에 발맞추어 밀라노에 입성했거든요).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운동을 지지하던 베르디는 자신의 오페라 작품들 속에 현재 이탈리아의 처지를 은유적으로 상징하는 장면들을 만들어내면서 국민들의 가슴에 애국과 혁명의 불길을 당겼습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오페라 <나부코>입니다. <나부코>는 바빌론과의 전쟁에서 져 포로로 끌려간 히브리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가 ‘히브리노예들의 합창’인데 이 노래는 합창과 제창을 오가며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베르디는 여러명의 개인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되는 이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작곡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정치적 상황 때문에 민족해방과 독립을 고취하는 작품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탈리아인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은 독립운동 시기에 ‘히브리노예들의 합창’을 국가를 대신해 불렀습니다. 베르디도 “이 작품으로 나의 본격적인 예술가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스스로 평했답니다(이런 인연 때문에 베르디의 장례식 때 ‘히브리노예들의 합창’이 연주되었습니다). 또 다른 오페라 <레냐노전투>에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이탈리아 만세’라는 합창으로 시작합니다. 레냐노전투는 1176년 이탈리아를 침공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대항한 롬바르디아 도시동맹들의 승리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 외세의 침공에 저항하여 나라를 지키는 애국심을 강조한 작품이었습니다. 이외에도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이라는 작품은 지금은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시달리고 있지만 롬바르디아인들이 제1차 십자군 전쟁때 보여준 이탈리아인의 기상을 통해 독립의지를 고취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아틸라>, <잔다르크>,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등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사실주의적 작품을 창작하여 이탈리아인들의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처럼 베르디는 탄압받는 민족의 투쟁과 승리를 작품의 주제로 자주 다루면서 해방과 독립의 의지를 일깨우고 애국심을 고취시켜 이탈리아 사람들이 통일조국에 대한 열망을 갖게 했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런 베르디를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오페라가 막을 내리면 모두 일어나서 “베르디, VERDI”하고 외치곤 했습니다. 이는 베르디를 연호하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당시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이끌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연호하는것이기 했습니다(VERDI=Vittorio Emmanuele Re d’Italia, 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베르디의 이름이 이탈리아 독립과 통일운동의 아이콘이 된 것이지요. 베르디는 이탈리아가 통일을 달성하자 초대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국사를 논하는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 오래하지는 않았습니다. 역시 정치보다는 음악이 더 좋았던 것이지요. 그는 국회의사당이 오페라극장처럼 생겨서 오페라극장인줄 알았다는 농담을 남기고 국회를 떠났습니다.베르디와 그의 작품들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여름 휴가를 떠난 베르디를 찾아 온 손님이 수많은 아코디언이 집안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웬일이냐 물으니 베르디는 “길거리 가는 곳마다 아코디언 악사들이 내 작품을 연주하는데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어서 연주하지 못하도록 모든 악기들을 임대해버렸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또 베르디 집으로 소포를 보내려고 주소를 물으니 그냥 ‘베르디에게’ 라고 적어서 보내면 알아서 가져다 준다고 대답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나 모르면 간첩’ 이런 뜻이겠지요.

1901년 베르디가 밀라노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자 호텔측에서는 베르디의 편안한 휴식을 위하여 모든 투숙객들을 내보냈고, 주변 도로에는 일체의 소음도 발생하지 않도록 경찰을 배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베르디가 쓰러졌다는 소문이 이탈리아 전역에 퍼지면서 거리에는 수시로 베르디의 경과를 알리는 벽보가 붙었으며 국왕은 매시간 전보를 통해 상황보고를 받는 등 베르디의 안위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베르디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베르디가 숨을 거둔 밀라노에서는 모든 상점이 가게 문을 닫고 조기를 내걸었고 장례식장에는 무려 20만명의 인파가 몰려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운동의 상징이 된 ‘히브리노예들의 합창’을 부르며 베르디를 떠나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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