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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3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아빠
<7번 방의 선물>
김경태 영화평론가(2013-02-28 11:42:26)

<7번방의 선물>의 흥행돌풍이 무섭다. <각설탕>과 <챔프> 등 착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착한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 온 이환경 감독이 그동안의 실패를 딛고 비로소 관객과의 소통에 성공한 것이다. 물론 <7번방의 선물> 역시 그의 전작들처럼 착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심지어 악인들로 가득한(!) 교도소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말이다. 그럼 무엇인 달라진 것일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그의 착한 판타지 세계가 현실층위와의 선명한 접촉지점을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즉 지금 이곳의 현실과 맞물려 공분을 일으킬 수 있는 유아납치 강간치사라는 민감한 소재를 눈물없이 볼 수 없는 부성신화와 결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 속 치부를 잊게 만드는 착한 판타지
지적 장애인 ‘용구(류승룡)’는 어리지만 똑 부러진 딸 ‘예승(갈소원)’과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어느 날, 빙판길에 미끄러져 쓰러진 경찰청장의 딸에게 인공호흡을 하는 모습이 목격되면서 용구는 유아 강간치사를 저지른 파렴치한으로 누명을 쓴 채 투옥된다. 예승에게 인사조차하지 못하고 생이별을 하게 된 용구는 동료 재소자들의 도움으로 감옥 안에서 예승과 재회하게 된다. 그리고 용구는 마침내 일생일대의 재판을 목전에 두게 된다. <7번방의 선물>은 <도가니>(2011)처럼 사회적 약자인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폭행을 고발하거나 부패한 경찰의 안이한 수사를 비난하는 등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는 현실 속 치부를 일시적으로 가리는 스크린으로 작용한다. 그리고는 관객들에게 ‘그런 끔찍한 성적 학대는 없(었)다’고 최면을 걸며 착한 판타지로 인도한다. <도가니>가 시회적 이슈를 몰고 오며 해당 장애인 학교에 실질적인 변화를 꽤하였다면, <7번방의 선물>은 현실 속의 끔찍한 사건들을 부인하는 현실 밀착의 판타지를 통해 일시적 위안을 제공한다. 이 영화 속 국민들은 진실을 전혀 모른 채, 우리가 뉴스에서 유아 강간치사 사건의 흉악범을 접할 때처럼 용구에게 혐오의 눈빛을 보낼 것이다. 반대로, 관객은 그 사건의 진실을 공유하고 있기에 용구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응시한다.이제 우리가 현실에서 접하는 끔찍한 아동 성추행 소식이 모두 다 거짓이기를, 그 모든 믿기 힘든 사건들이 사실이 아닌 오해나 음모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영화와 공명한다. 그 범죄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관객의 욕망을 투영해, 경찰청장의 딸은 목격자가 없는 곳에서 사고사를 당해야만 했고 때마침 용구는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인공호흡을 하고 허리띠를 푸는 우연한 유사-강간 장면을 연출해야만 했다. 이제부터 관객은 현실 속의 가장 혐오스러운 아버지(딸 또래를 강간하는 아버지)를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아버지(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아버지)로 조금씩 대체해 간다. <7번방의 선물>에서 용구가 6세의 지능을 가진 30대라는 설정은 부성신화를 고양시키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 된다. 이것은 훌륭한 아버지의 조건이 높은 지적 수준도 많은 돈도 아닌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헌신적인 사랑이라는 당연한 교훈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과 동시에 그로부터 일말의 성적 탐욕이나 악의를 제거시켜 준다. 그가 6살 지능의 지적 장애인이라는 설정은 강간이 불가능한 존재로서의 알리바이이다. 무엇보다 그가 지닌 부성애가 지능을 초월한 본성임을 강조해준다. 아니, 지능이 낮기 때문에 계산 없는, 두려움 없는, 조건 없는 부성의 발현이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적 모순에 순응하는 너무 착한 아버지
용구의 무죄는 경찰의 냉철한 과학적 수사가 아니라,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그의 착한 본성이 드러나면서 증명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한 투쟁을 거부하고서 딸을 위해 기꺼이 억울한 희생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이 영화는 가족의 안위가 위태로울지라도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똑똑한 아버지가 아니라 당장 눈앞의 딸을 지키기위해 그 사회적 모순에 순응하는 너무 착한 아버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제 그가 명예를 회복하고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찾는 것은 오롯이 그가 지켜낸 자식의 몫으로 남는다. 용구의 사형 후 수년이 흐른 뒤, 예비 법조인이 된 예승이 모의재판에서 아버지의 승소를 이끌어내듯이 말이다. 한편, 경찰청장은 용구가 자신의 딸을 죽이지 않았다는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협박까지 해가며 용구에게 거짓 자백을 강요한다. 그의 이런 도착적인 태도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왜 그는 아무 힘도 없는 용구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일까? 사실 그 이유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영화도 그의 입장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영화 속 유일한 악인으로서 용구의 사형을 유도해 부성신화를 완성하기 위한 매우 기능적인 차원에서만 필요할 뿐이다. 착한 판타지의 세계에 악인이 머무를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용도인 것이다. <7번방의 선물>은 딸을 구하기 위해 사회 모순과 당당히 맞서 싸우는 액션 히어로 같은 아버지를 등장시키지도 않고,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당장 행동하라고 영화가 관객들을 자극하거나 선동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를 괴롭히며 불안하게 했던 범죄의 본질을 외면한 채 잠시나마 그 범죄에 덧씌워진 감동적인 판타지를 즐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판타지는 부녀가 탄 열기구가 담벼락에 걸려 탈옥이 다행히(!) 실패로 돌아가는, 딱 그 장면만큼 현실과의 균형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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