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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3 | 연재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금지된 영화의 프린트 찾기
전주국제영화제 6 - 소비에트 연방의 금지된 영화들 ②
관리자(2013-02-28 11:42:37)

앞에서 말했듯이, 소비에트 영화 선정작업은 풀라코프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빨리 끝날 수 있었고 2005년 6월 초엔 그의 초청으로 흑해 지역의 소치 국제영화제에 참석했다. 소치 영화제는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국내영화제로서 그곳에서 러시아 영화계의 주요 인물들을 제법 많이 만나게 되어 러시아는 초행길이었던 내게 여러모로 도움이됐었다. 그런데다가 소치영화제가 끝난뒤 바로 모스코바 국제영화제가 열리는바람에 나는 모스코바에 일주일 더 머물면서 소비에트 영화 회고전 프로그램을골라서 봤다.하지만 영화보다 더 중요했던 건 내프로그램에 필요한 프린트를 찾은 일이었다. 풀라코프에게 프린트 재료 문제에 대해 묻자 “그건 자기 영역이 아니어서 직접 도와줄 수가 없으니 모스코바의 모스필름모폰도 아카이브 관장 ‘불라드미르 디미트리에프’를 만나 이야기 해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모스코바 영화제 동안에 디미트리에프 관장을 만나 프린트의 정보를 받았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페레스트로이카 이전의 영화들은 소비에트 연방국의 이름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소비에트가 해체된 뒤에도전 연방국들의 공동소유물로 간주되고있다. 당신이 원하는 프린트는 모두 고스필름모폰도 아카이브에 보관돼 있다.하지만 프린트를 빌려 쓰려면 영화를 만든 나라들로부터 허가를 받았을 때만 가능하며 그건 러시아 영화도 마찬가지다. 순서대로 할 생각이면 러시아 정부에 먼저 신청서를 내라”는 것이었다.나는 디미트리에프 관장이 하라는 대로 8월초에 러시아 정부의 영화과에 프린트 사용에 관한 문의를 서면으로 보냈지만 한 달이 넘도록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9월초 베니스 영화제에 가있는 사이에 플라코프를 만나게 되어 디미트리에프와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러시아 정부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불만을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는 “그날 저녁 러시아 영화 파티가 열리는데 그리로 가면정부의 영화과 사람들이 다 와있을 테니까 가보라”고 귀띔해줬다. 나는 잘됐다싶어 러시아 영화의 파티장을 어렵사리찾아갔고 거기서 정말로 러시아 연방정부 문화부의 영화과장 세르게이 라자루프를 직접 만났다. 나는 화려한 호텔의정원에서 초청객들에 둘러싸여 이야기하고 있는 그에게 가서 염치를 무릅쓰고내가 온 이유를 간단히 설명한 뒤 러시아 정부의 도움이 필요함을 힘주어 말했다. 그러자 그는 아주 여유 있게 웃으면서 “당신이 원하는 4편 영화의 프린트는내가 장담하고 새로 만들어 줄테니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 그러니 내 사무실로당신의 안건을 한번 더 팩스로 보내달라”며 나에게 명함을 줬다.

물론 나는 그에게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나 팩스를 보냈지만 두 달이 지나도 그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받지 못했다. 전화를 걸면 그의 비서가 한결같이“그는 지금 사무실에 없다”고 할 뿐이었다. 나는 기다리다 못해 하는 수 없이 11월말에 플라코프에게 구원요청의 긴급신호를 메일로 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러시아연방 문화부의 국제부장 콘스탄틴 가브르신의 연락처를 알려줬다.나는 라자루프 과장에게 보낸 같은 내용을 가브르신에게 보냈고 몇 주가 지나서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래서 혹시나 했지만 그는 독일어로 “팩스를 받으라”고 짧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데 팩스 내용은 더욱 기가 막혔다. 라자루프 영화과장이 한 약속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이 “러시아 정부는 새 프린트의 경비가 너무 많이 들어 당신의 프로젝트를 도와줄 수 없다”고만 써있었다. 라자로프의 거짓 약속 때문에 고스란히 두 달을 잃어버린 나는 다급히 다른 방법으로 프린트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모스코바 국제영화제의 수석프로그래머 키릴 라즈로고프한테서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안드레이 루블로프>의 프린트가 ‘모스필름’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소비에트의 대표적인 제작소 모스필름은 해방기 이후 ‘러시아의할리우드’로 불릴 만큼 급성장한 개인소유의 스튜디오로 바뀌었는데 나는 소식을 받자마자 모스필름에 전화하여 프린트 예약을 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러시아 친구의 도움으로 파리에 있는 소비에트 영화의 전문배급사 ‘아르케이온필름즈’에서 후치에프 감독의 <나는 스무 살>의 프린트도 찾을 수 있었다.그리고 11월 말에 나는 우크라이나로떠났다. 몰로디스트 영화제의 집행위원장 ‘안드레이 칼팍치’가 초청하여 키에프에 간 것인데, 소치 영화제에서 알게 된 그는 내가 소비에트 회고전 때문에 우크라이나 영화의 프린트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나를 도와주기 위해몰로디스트 영화제에 특별히 초청했던것이다. 내가 키에프 영화제에 도착하자 그는 손수 문화부에 전화를 하여 나와 모임을 주선해줬는가 하면 영화제의사무국장 ‘올레나 에르소바’는 영화제의차까지 내주고 여성통역자를 보내는 등친절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젊은 통역자와 나는 문화부 영화과 사무실에서 야로슬라브 홀린스키 과장과 알렉산더 도브간 팀장 그리고 그 밑의 팀원 두 사람을 만나 소비에트 프로그램에 대해 두어시간 동안 토의했다. 홀린스키 과장은“한국과의 원만한 외교통상 유지는 우리에게 중요한 일인 만큼 문제의 세 개프린트를 새로 복사하고 영어자막을 넣어 전주영화제에 보내주겠다”고 친절이말했는데, 러시아 정부의 뒤틀린 정책때문에 속상해있던 나에게 그의 협조적인 태도는 큰 위로가 됐고 힘을 북돋아주었다.

토의가 끝난 다음에 우리는 영화과 직원의 안내로 영화를 보기 위하여 도브젠코 스튜디오로 갔다. 그곳은 소비에트 초기의 영화사를 빛낸 우크라이나 출신 ‘알렉산드르 도브젠코(1894-1956)’ 감독의 이름으로 세워진 역시적인 제작소였는데 우리가 도착하자 중년 남자가 우리의 방문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곧장 시사실로 안내를 했다. 허술하고 자그만 실내에서 나는 그때까지 볼 수가 없었던 <우크라이나 랩소디>, <목마른 자를 위한 샘>, <기나긴 이별>의 세 편을 비디오의 확대화면을 통해 마침내 볼수 있었다. 내가 세 영화를 다 보는 동안에 내 옆에서는 한 젊은 여인이 그날 찍은 듯한 할리우드 영화의 장면들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있었다. 한때 소비에트의 주요 스튜디오들이 소비에트 붕괴 이후 경제적 위기를 맞으면서 할리우드 제작자들에게 촬영소를 빌려주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졌는데, 도브젠코 스튜디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홀린스키 과장이 약속한 영어자막의 새 프린트 또한 정부의 경제적 사정으로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키에프에서 돌아온 지 두 달 뒤에 홀린스키 과장은 팩스를 통해 “애초 우크라이나 정부에선 모스코바의 고스필름모폰도에 보관돼 있는 네가티브를 빌려다 새 프린트를 뜨려고 했었으나 프린트 복사비가 아주 비싼데다가 네가티브의 대여금까지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하여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다. 하는 수 없이 새 프린트 대신에 영어자막의 베타캄을 보내려고 하는데 그에 동의해줄 수 있는지를 알려주면 고맙겠다”고 통지했다. 물론 실망이 컸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베타캄(Beta SP) 사용에 합의했다. 그러자 그는 감사의 표시로 사용료를 받지 않았고 외교행랑을 통해 무료로 사용재료의 왕복수송을 주선하는 등 힘껏 도와줬다. 우크라이나 다음은 그루지아와 투르크메니스탄이었다. 프로그램에 든 그루지아 영화는 두 편이었는데 이오셀리니의 <노래하는 검은 새가 있었네>는 감독이 프랑스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그루지아를 통하지 않아도 됐고, 아불라제감독의 <참회>는 감독이 중은 뒤 딸에게 배급권이 넘어갔으나 그루지아 국립영상원의 츠케이즈 원장이 중간에서 도와줘 예약은 순조롭게 진행됐다.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 감독 만수로프의 <장례식>은 원래 ‘카작스탄-영화스튜디오’에서 만든 영화였으며 감독은쿠르크메니스탄 정부의 독재정치를 피하여 카작스탄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의 연락은 알마티 영화제의 집행위원장 ‘아비케에바 굴나라’의 도움으로 걸림 없이 통과됐다. 만수로프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전주영화제에 초청된걸 아주 기뻐하면서 “카작스탄-영화스튜디오의 국제영화제 담당자 올가 클라쉐바가 보관하고 있는 프린트를 갖다 쓰라”고 했으나 베를린에서 다른 프린트를 찾게 되어 그 문제는 저절로 끝났다.12월 말쯤에 나는 숱한 우여곡절 끝에 여덟 개 프린트 소재를 알아냈다. 하지만 러시아의 두 개 프린트는 그때까지도 오리무중이었다. 생각다 못해 2월초에 베를린 영화제에 가는 김에 포럼 부문의 집행위원장 그레고 부부를 찾아가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들 부부는 내가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언제나 망설임없이 나를 도와주곤 했는데 러시아 영화 이야기를 듣자 에리카 그레고는 “왜진즉 묻지 않았느냐”며 나를 데리고 ‘독일영화우회협회’(이 기관에 대해서는 전에 소개했음)로 가서 그 곳에 보관돼 있는 프린트의 목록을 샅샅이 뒤적였다.그리고 그는 거기서 내가 그토록 찾았던 두 러시아 영화, 즉 콘잘로프스키 감독의 <아샤의 이야기>와 게르만 감독의 <체크포인트>를 찾았고 그뿐만 아니라 이오셀리아니의 <노래하는 검은 새가 있었네>와 만수로프의 <장례식> 그리고 아불라제의 <참회>까지 찾는데 성공했다. 덕분에 나는 카자흐스탄과 그루지아의 먼 곳으로부터 프린트를 가져오지 않아도 됐고, 그에다 에리카 그레고는 ‘전주영화제를 위해’ 프린트 사용비를 모스필름이나 아르케이온 보다 낮게 해주어 경비를 줄이는데 보탬이 됐다.

2006년 전주영화에서 소개된 소비에트의 금지된 영화 특별전은 내가 만든 특별전에서 전주영화제의 표어인 ‘자유, 소통, 독립’에 제일 어울리는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았다. 프로그램을 실현시키기까지 여러 어려움이 따랐으나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과거의 한국영화사를 훑다 보면 독재정권들의 검열제도 때문에 가위질을 당하고 상영이 금지되는 등 상처받은 영화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소비에트의 금지영화에 대한 학계와 평단의 관심은 기대 이상으로 높았고 무거운 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금지영화의 상영장은 매번 관객으로 꽉꽉 채워져있었다. 소비에트 영화 프로그램에 기자와 관객들이 자주 쓰던 말을 몇 개 인용하자면 “발굴 영화의 특별전은 전주영화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프로그램이다”, “소비에트의 금지된 영화는 역시 전주영화제서나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영화다”, “소비에트 검열 시스템이 그처럼 지독한지 몰랐는데 그 면에서 많은걸 알게 됐다”, “‘알레고리의 저항’이라는 회고전 제목이 매력적이다”,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고생이 많았던 것 같다”등이었다.

한마디 덧붙이면, 소비에트 영화의 회고전을 대표하여 전주영화제에 참가한 인사는 아이젠스타인의 아카이브 책임자이며 모스코 영화박물관 관장인 ‘나움 클레이만’이었다. 그는 소비에트 역사의 전문가일 뿐 아니라 소비에트의 검열제도를 몸소 겪은 역사의 증인으로 빡빡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틈을 내어 전주영화제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는 후치에프의 <나는 스무 살>과 타르코프스의 <안드레이 루블로프>의 상영시간에 직접 참가하여 관객과 열띤 대화시간을 가졌고 그의 해설시간에는 빈자리가 없을 만큼 관객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그는 4월 29일에 CGV 4관에서 열렸던 ‘시네토크’에 발제자로 초대되어 소비에트 시절의 제작환경과 검열문제에 대한 명쾌하게 해설을 한 다음, 질문과 답변 시간에는 관객과 진지한 대화를 가졌다.

끝으로, 클레이만의 방문에 감사함을 표시하기 위하여 나는 당시 ‘천년전주사랑모임’의 김영배 회장에게 부탁하여 한옥마을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김 회장은 하루 오후 시간에 클레이만 그리고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온 영화제의 손님 두 명과 함께 한옥마을을 두어 시간에 걸쳐 두루 돌아다니면서 그곳의 전통과 특이성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줬다. 그런 다음에 전통찻집에서 차를 즐기는 것으로 안내는 끝났는데 한국을 처음 방문한 클레이만 관장은 “한옥마을의 아름다움과 전통찻집의 아늑함과 모과차의 향기가 아주 좋았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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