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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4 | 연재 [서평]
길을 잃고 싶을 때마다 길을 걸었다
『와일드』 - 셰릴 스트레이드 저/우진하 역. 나무의철학
김정경 시인(2013-04-05 11:59:25)

등산화 때문이었다. 덩그러니 놓인 낡은 등산화 한 짝을 보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 셰릴 스트레이드라는 여자가 고요하게 걸었던 기록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녀가 현재 미국에서 가장 주목 받는 작가라는 둥, 뉴욕타임스 논픽션 1위라는 둥, 전 세계 21개국 출간 밀리언셀러라는 둥 수식어가 휘황했다. 책을 읽기도 전에 든 생각‘잘못 골랐다’. 책을 고를 때 나는 옷을 고르는 심정이 된다. 옷가게에서 옷 한 벌을 집어 들기 무섭게 점원이 한마디 거든다. “이 옷이 올봄 신상이라서 제일 잘나가는 거예요.” 이때 나는 슬그머니 들고 있던 옷을 제자리에 놓고 다른 옷을 보거나 옷가게를 나온다. 굳이 내가 아니라도 그 옷을 입을 사람이 많다는데, 나 말고도 많은 이들이 이 책에 대해 마르고 닳도록 찬사를 보낸다는데, 구태여 나까지 보탤 필요는 없으니까. 책을 제자리에 놓고 은근슬쩍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은 것은 요란한 찬사들을 감흥 없이 넘기다 발견한 단 한 문장 때문이었다.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 번은 길을 만든다.’ 그즈음 나는 자주 길을 잃었다. 분명히 이 길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는데 막상 도착하면 그 자리에는 생각과는 다른 것이 버티고 있었다. 현실에서도, 내 마음 안에서도 걸핏하면 길을 잃고 쩔쩔맸다. 그래서였다. 인생의 어디쯤에서 길을 잃은 한 여자가 온몸으로 만든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 따라가 보기로 마음 먹은 것은.

어느 날 한 여자는 길을 나설 결심을 한다. 그 길의 이름은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the Pacific Creat Trail: PCT)(이하 PCT). 일직선으로 1,600킬로미터 정도이지만 실제 걷는 거리는 4,285킬로미터. 멕시코 국경에서부터 캐나다 국경 너머에 이르기까지 아홉 개의 산맥, 사막과 황무지, 인디언 부족의 땅, 강과 고속도로까지 거쳐야 하는 길이다. 어쩌다 그녀는 혼자 이 길을 걸을 결심을 하게된 것일까. 여자가 혼자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친아버지의 학대로 인해 얻은 상처를 보듬어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렸고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빠져있는 동안 남편과 이혼을 했다. 결국 여자는 혼자 남았다. 그 후론 마치 한 짝을 잃어버리고 쓸모없어진 등산화의 나머지 한 짝처럼 자신의 삶을 내동댕이 쳐버린다. 여자는 마약에도 조금씩 손을 대고 아무 남자나 가리지 않고 잠자리도 함부로 가진다. 아무데서나 자고 아무데서나 일어나던 여자. 우연히 들른 상점 진열대에서 바위산에 둘러싸인 호수 사진이 실린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책자 발견한다. 그로부터 얼마 뒤 고작 너비 60센티미터 남짓, 거리로는 수천 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여자는 혼자 떠난다. 어차피 그녀는 잃을 것도 없었으니까. PCT 안에는 사계절이 공존했다. 폭염과 폭설, 아름다운 들판과 눈앞을 메우는 사막, 울창한 열대림과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 방울뱀과 곰과 퓨마가 여자의 여정 속에 뛰어든다. 분명히 길을 걷고 있는데 자꾸만 길에서 밀려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여자. 몬스터라고 이름 지은 배낭은 제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짓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아리와 허벅지는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고 배낭 아랫부분이 스치는 엉덩이에는 피가 났고 그리고 얼마 후엔 발톱이 빠졌다. 여자는 깨끗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PCT가 계속해서 자신을 뱉어내는 것은 짐 때문이라는 것을. 배낭 속에는 걷고 먹고 자는 데 필요한 물건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들어 있었다. 마음에 돌처럼 품고 살아온 질문들. ‘왜, 도대체 선량한 우리 엄마는 죽고 나는 이렇게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걸까? 한때는 그렇게 가깝고도 의자가 되었던 우리 가족은 엄마의 죽음 앞에서 왜 그렇게 속절없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걸까? 폴과의 결혼생활이 그 지경이 되도록 나는 도대체 뭘 한거지?’ (150쪽) 걷는 데는 불필요한 것들이지만 여자는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그 질문들이 그녀를 PCT 위에 올려놓았으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그러하듯 그녀 또한 뜻밖의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어머니가 꺾어주던 데이지 꽃이 피어 있는 들판을 만나고 우연히 저녁을 함께 먹게 된 인디언에게선 밥 말리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선물 받기도 한다. 캠핑을 하며 낯을 익힌 이가 나무그늘 아래 여자의 이름을 써서 남겨둔 복숭아 한 알의 달콤함을 맛보기도 한다. 그녀가 누린 또 하나의 호사로움은 독서였다. ‘하늘이 어두워지면 헤드램프 불빛 아래에서 책을 읽었다. 여행을 시작한 후 첫 일주일은 너무 지쳐 겨우 한 두 쪽만 읽다가 곯아 떨어지곤 했다. 그렇지만 점점 걷는 일이 익숙해지면서 더 많은 쪽들을 읽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일상의 지루함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면 지난밤 내가 읽은 부분을 불태웠다.’ (190쪽) 여자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분명히 있는데 마치 숲속의 그림자 괴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아버지의 잘못이야말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일’이었으나 PCT에서 어두워지는 대지를 바라보며 여자는 아버지 때문에 더 이상 놀라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에는 그보다 놀라운 일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러 여자의 여섯 번째 발톱이 빠진다. 열 개의 발톱 중 여섯 개의 발톱이 빠진 것에 대해 여자는 유쾌하게 외친다. 6대4, PCT 승! 4천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혼자 걸으며 그녀가 가장 많이 한 말은 “괜찮아. 너는 이 길에서 안전해.”라는 거짓말이었다.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지만 스스로를 안심시켜야할 때가 있다. 도중에 길을 접고 돌아갈 수도, 한 짝만 남은 등산화처럼 자신을 내팽개칠 수도 없으니까. 어쨌든 끝까지 가보긴 해야 하니까. 괜찮다고, 이 길에서 나는 안전하다고 스스로에게 말 해주기 힘들 때 이 책이 당신의 손을 잡아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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