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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5 | 연재 [교사일기]
참교육의 현장
3학년 2반 전윤현
신형교 계복중 교사(2003-09-08 17:48:10)

우중충하고 쌀쌀한 날씨였어.
종일 왠지 모를 서글픔이 가슴을 쓰는 거야.
별로 아프지 않아도 될 일인지 모르나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실들이 이미 활궁수의 활을 놓여난 시위처럼 가슴 복판을 향해 달려오는 거였어.

3학년 2반 전윤현
내 이곳에 부임 온 며칠 후 학생지도주임이 상담카드를 가져와서는 부담임 자격으로 상담해 보라시더군.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학생이라나.
1, 2학년 때 학생 구타·폭행 및 금품갈취 혐의로 유기정학 경험 전과자며 3학년 진급해서도 불량소행이 누차 지적되었다는 거야

그러나 내 한번도 어느 특정한 시간 두고 상담해 보진 않았어.
적어도 내가 본 윤현이는 따글따글 뼈대 굵고 목소리 굵고 뱃심 있는 그리고 침착한 제법 사내다운 냄새가 묻어나는 남아였어.
머릿결 헝클어졌어도 얼굴은 갸름한 편이었고 짧게 짧게 웃어 보이며 어쩌다 내게 눈길 던져올 땐 총명하게도 수줍게도 보이는 얼굴이었어.
오히려 녀석은 빨간 볼 수줍은 가득한 얼굴이었어.
과목마다 간신히 중간을 따랐지만 그게 대수랴.
녀석은 녀석 자체로 이뻐 보였지.
언젠가 수북수북 눈 쌓여 무릎께로 깊던 날 두 주먹 눈 뭉쳐 둥글게 내 허리 휘감아 올 땐 참으로 녀석 가슴 따뜻하다 생각했어.
그 따뜻함으로 너그러운 연극배우 재질을 생각도 했지
구타·폭행한다거나 금품을 갈취한다거나 전에 몇 번의 물의를 일으켰을 진 몰라도 더 물의를 일으킬 만큼의 위인은 결코 아니었어.
내 예감이 맞았다고나 할까.
녀석은 내 여기 온 이후 지금껏 단 한 차례의 범죄행위도 보이지 않았어

오늘 아침 졸업식 이틀 앞둔 오늘 아침 졸업답사 낭독할 학생을 생각하다 불현 듯 윤현이를 떠올렸고 적격자라 내정했어.
제안이 너무 뜻밖이었겠지. 선생님들 대부분 알 듯 모를 듯 갸우뚱, 냉담하게 다물린 입술.
관례로 보나 풍부한 감정으로 보나 여학생이 자격에 우선하며 능력으로 보나 방정한 품행으로 보나 성적 우수 모범학생이 우선인즉 어찌하여……어찌하여.

내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지.
사람을 평가하기엔 너무 이르잖냐고.
절실하고 솔직한 답사가 필요하지 졸업의 영광이 성적우수자만의 독점물이냐고.
1교시 수업 전 녀석을 불러 답사를 부탁했어.
스스럼없이 승낙할 때 내 얼마나 즐거웁던지 두 손 꼭잡아 어루만져 보냈다가 그로부터 두 시간 후 다시 만났는데 녀석은 그만 못하겠다는 거야. 느닷없이.
「선생님 저는 나쁜 애였어요. 아시잖아요.
후배 졸업생 바라 볼 면목 없고 선생님들 감히 바라 볼 면목 없어요.
답사 읽으면 웃을 거여요
웃고 말아요. 후배도 친구도 선생님도 제게 모두 꼴값, 같잖은 꼴값한달 게 분명해요
저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 제가 다가가면 다 달아나는 사람들,
절 무서워하는 그들이 무섭고 그들 웃음이 무서워요
<.............>
자신 없어요. 설득하실 필요도 없고요.
언제였나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버릴 대로 버린 녀석 어느 곳 어느 장소에서고
너야말로 반겨할 사람 좋아할 사람 없을 거라고요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혼자일 운명이죠
<.............>
말씀 마세요
고맙지만, 선생님 말씀 다 알지만 허사일 뿐이예요.
그 모든 멸시 구태여 반대하고 싶지 않아요
그들이 바라는 것이고 제 스스로도 용서 기대하지 않으니까요.」

다만 아래로 고개를 꺾었을 뿐 녀석은 눈물 한 방울 없이 또랑또랑 말 이어갔어.
그것은 오히려 더 구슬픈 절망감으로 돌리면서 오히려 내 목소리와 오히려 내 심장을 부르떠는 뱃잎처럼 긴박하게 울리더군.

「미안하다 윤현아
자존심 흐트렸다면 내 용설 빌마
맘 그렇다면 답사도 강요 않으마
하지만 윤현아
저 넉넉한 산 앞산 남덕유를 보렴
밑둥부터 정상까지 숨김없이 들켜주고 있잖니
네 뉘우침 네 솔직함이 저만큼이나 넉넉하게 보이는구나.」

말은 그랬지만 정작은 내가 더 자신이 없었어
실인즉 내 어떤 방법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녀석으로 하여금 답살 읽게 하고 싶었거든
권위가 아니라 오기가 아니라 그것만이 스스럼없는 용서와 화해의 길이라 생각했는데 그 순간의 뜨거움보다 더 뜨거워질 자신이 없었어.
가겠어요.
한 마디 말로 슬그머니 일어서 가는 녀석 뒷모습에 싸늘한 바람 뒤따르고 있었지.
오늘처럼 선생이란 각자가 미워본 적 없었어.
녀석은 종일토록 내 가슴을 쓸면서 침묵한 채 쏘다녔던 게야.
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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