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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5 | 연재 [김의수의 상식철학]
통일의 힘, 철학인가 문화인가?
김의수 전북대 명예교수(2013-05-02 16:01:59)

전주에서 만난 40대 시민이 정년 후 나의 생활에 대해 묻는다. “사립대에서 강의를 맡았어요.” “석좌교수이신가요?” “시간강사지요.” 그는 대학이 너무했다고 말한다. 엉터리 같은 교수도 장관을 잠깐 지내고 나면 사립대학에 석좌교수로 간단다. “학생들과 토론하니 좋고, 자유로운 신분이라서 좋기만 해요.” 제도와 명칭으로 주어진 명예는 우리의 영혼을 불편하게 할 뿐이다.

2013체제는 사라지고, 2013학번들만 코앞에 있다
지난 해 인문학세미나에서는 학생들이 시민들과 함께 ‘2013체제’에 대해 토론했다. 정치에서 경제로 민주주의를 확대시키고, 평화와 복지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권교체 실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체제는 가능할까, 일말의 기대를 가진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런 꿈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2013학번 학생들은 북한의 미사일 공격 위협에 대해 강력대응을 주문하며 흥분한다. 종편TV 채널이 고정시킨 냉전주의 프레임에 모두들 갇혀버린 느낌이다. 전주 숙소를 정리하느라고 내려와 제자들과 식사를 했다. 30대 남자 제자는 이번에 정말 전쟁이 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새 정부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참기가 어렵다고 한다. 평소에 다양한 주제들을 이야기하던 그들이 끊임없이 정치 이슈로 돌아온다. 새롭게 내놓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싸이의 ‘젠틀맨’을 화제로 던져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정치적 무관심보다는 낫겠지? 그런데 이 과정을 거치면 진짜 정치에 무감각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된다. 미국의 사회교육가 파커 J. 파머는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겪은 사건들로 무기력과 우울증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9.11사건에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미국인들이 감정적 획일적 분위기에 휩싸이는 것을 보면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도 그때 미국 때문에 힘들었고, 지금도 한국 정치 때문에 힘들다.

독일 통일은 철학의 힘이었나요?
천안에서 만난 시민이 나에게 던진 질문이다. 철학이라기보다는 문화라고 나는 대답했다. 우리도 남북정상회담을 두 차례나 거치면서 북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서독 국영TV에서는 그보다 20년 앞서 동독 영화를 보여주었다.더욱 놀라운 것은 그 영화의 내용이었다. 공산당 간부가 부하직원의 부인과 바람이 났다. 점심시간에 여자 집에서 사랑을 나누던 주인공은 남편이 나타나자 벌거벗은 채로 대로를 질주한다. 그 장면을 한참동안이나 길게 보여주는 것이다. 동독에서 만든 영화에 남자든 여자든 완전히 벗은 몸으로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과 무엇보다도 공산당 간부를 희화화한다는 사실이 정말 믿기지 않았었다. 그렇게 그들은 열린 마음으로 문화를 키우며 교류하더니 20년 후 통일을 이루었다. 그러고도 20년이 지났는데, 우리는 옛날 옛적 매카시가 설치던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니…. 철학보다 더 바닥에 문화가 있다. 거기서 터가 닦여야 한다. 그러나 닦이던 터에 폭탄이 떨어지면 터전은 엉망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되고, 우울에 빠지게 된다. 섣부른 대안도 잘난 희망도 꺼내놓을 수가 없다.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파이고 터져버린 그 바닥이 자연의 힘으로 조금은 아물 것이다. 정신과 영혼이 꽃피는 철학과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생활터전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드는 정치가, 재벌, 정보기관, 조폭, 무지한 알바들과 싸우기는 너무도 힘들다. 우선 연명이라도 하자. 희대의 바보 자매가 벌이는 쑈라도 구경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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