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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5 | 연재 [이십대의 편지]
양반전을 읽는 밤
전은혜 대학생(2013-05-02 16:02:06)

강의실에 들어서자 동기들이 동분서주한다. 누군가는 PPT를 확인하고, 누군가는 인쇄된 유인물을 다시 확인한다. 누군가는 칠판에 판서를 한 번 해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따뜻한 음료를 마시기도 한다. 오늘은 수업 시연이 있는 날. 원래는 45분인 중학교 수업을 15분으로 축소해서 하는 수업이다. 사범대의 특징이라면 아무래도 이 ‘수업 시연’을 들 수 있다. 내가 맡은 부분은 ‘풍자’와 관련된 수업으로 고전 소설인 박지원의 <양반전>을 제재로 한다. 전날까지 발표 PPT 를 확인하고 수업 지도서를 검토하고, 활동지와 평가지를 만들었지만 내내 그의 필력에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200년 전 사람이 이토록 통찰력 있을 수 있을까? 조선 후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어 소작농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지만, 또한 시전의 발달로 도시 상인들이 부유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앙법이 보급되어 시간적 여유가 생긴 농민들은 따로 장사를 벌이기도 했다. ‘사농공상’이라 하여 선비만이 제일 귀한 줄 알았던 양반들은 무능력함에 양반이란 신분까지 팔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렀고, 통탄한 박지원은 문제를 제기한다. ‘과연 양반의 도리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그의 생각은 <양반전>이란 소설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현대에도 풍자 소설은 세련되다고 평가받는데, 그는 통찰력 있는 실용가였을 뿐 아니라 총명한 문인이기도 했단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그렇지만 감탄은 여기까지. 나는 줄곧 나오는 한숨을 틀어막을 수가 없었다. 준비한 자료가 모자라거나 넘치지는 않을지, 8학년 수준에 맞는 것인지 고민했던 탓에 수업 시연전날에는 꿈까지 꿨던 것이다. 박지원이 나와서 지도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얼굴도 알 수 없는 그는 나오지 않고 애꿎은 한글97만 나와 계속 문단의 위아래를 바꿔갔다. 사실은 약안을 준비할 때 약간의 꼼수를 부린다. 약안의 경우 시간이 적기 때문에 학생들의 활동이나 발표, 질문과 대답의 경우 교사가 알아서 넘어간다. 그렇기에 약안에 있어서 나는 늘 ‘친절하고 관대한’ 안내자가 되는 것이다. 수업에서 나는 늘 어려운 질문을 하지만, 학생들은 하나도 궁금해 하지 않고 단번에 알아들으며, 늘 내가 바라는 대답만 하는 것이다. 나는 종일 ‘옳지, 그렇지!’ 하는 긍정적인 대답만 하면 만사형통하는 것. 그것만이 위로가 됐다.“다음 시연자.” 교수는 뒷쪽에 앉아 나의 이름을 부른다. 빠르게 지도안을 훑어보지만, 다년간의 교수 생활에 나의 흠집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찾아냈을 것이다. 나는 나름 신경 써서 입은 옷을 정돈하고 앞으로 나섰다. 칠판은 왜 이리 크고, 강단은 왜 이리 넓은지. 참고하고자 들고 나온 종이는 이미 구겨져있다. “제재는 양반전으로, 학습 목표는…….”그리고 그 때 불현듯, 졸업반인 지금까지도 약간은 떨리는 순간이지만,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떤 일을 해야 지금처럼 심장이 간질거리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곧은길을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 행복하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간호학과에 다니는 동생은 곧잘 내 전공을 가지고 놀리기 일쑤였다. 모음이 어떻고 자음이 어떻든, 고전 문학을 어디에 써먹을 거며, 시는 외워서 국 끓여 먹을거냐는 핀잔이 돌아왔다. 나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내 목숨을 살릴 수 있고, 전쟁이 나도 필요한 일이라고. 그런데 너의 전공은? 그녀는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처럼 실용주의를 내세워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목숨이 달린 일’, 혹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써먹을 수 있는 지식’ 같은 건 아닐지 몰라도…. 꿈을 찾아 헤매는 청춘이 많은 지금과 같은 시기에, 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 동생처럼 말이 생각만큼 빠르지는 못해서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던 말.그리고 동생은 다이어트 한다고 산 자몽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래도 너는 그거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몽 하나를 더 챙겨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것 역시도 그녀다운 실용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두 살 터울인 걔가 웃기면서도 귀여웠고, 그 자몽향이 참 상큼하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양반전을 몇 번을 더 읽어야 하는지 모른다. 다 읽었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덮어도 또 모자란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니까. 그렇지만 그 순간들이 참 즐거울 거란 예상은 할 수 있었다. 그 기집애 말처럼 내게 재미있는건 ‘이것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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