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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5 | 연재 [클래식 뒷담화]
쇼팽과 상드의 만남, 정말 악연이었을까?
문윤걸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2013-05-02 16:02:24)

서양음악사에서 여성의 이름을 찾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만약 등장했다면 그건 아마도 스캔들이나 사랑이야기 등 작곡가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일 겁니다. 조르주 상드(Amandine Aurore Lucile Dudevant, 1804.7.1~ 1876.6.8, 조르주 상드는 필명입니다)가 그렇습니다.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쇼팽(Frederic Franois Chopin, 1810.3.1 ~ 1849.10.17)의 삶을 이야기할 때면 반드시 상드가 함께 거론됩니다. 그만큼 쇼팽의 삶을 이해하는 데 상드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쇼팽과 상드의 사랑은 클래식음악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둘의 관계에 대해 비난과 찬사라는 서로 다른 평가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파리 사교계에서 두 사람은 너무나 유명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쇼팽은 뛰어난 연주와 함께 세련되며 지적인 대화를 하는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여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며 상드는 여권확대와 여성해방을 주제로 한 소설가로 치마를 벗고 바지를 입으며(조르주 상드가 바지를 입은 최초의 여성이라고도 합니다) 시가를 피워 문 남장 여성으로 사교계의 이단아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만남 그 자체만으로도 관심의 대상일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보통 낭만시대의 사랑이야기들은 모두 첫 눈에 상대에게 반하고 이내 목숨을 건 사랑에 빠져 들지만 이들의 첫 만남은 첫 눈에 반하기는커녕 상대에 대한 혹평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쇼팽과 상드를 서로에게 처음 소개한 사람은 바로 피아노의 거장 리스트였습니다. 리스트는 1836년 애인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 경영하는 살롱에서 26세 쇼팽과 그보다 6살이나 많은 32세 상드를 서로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날 둘의 만남은 그저 그랬던 거 같습니다. 쇼팽은 친구에게 상드의 첫 인상에 대해 “오만하고 뻔뻔한 남자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고, 상드 또한 친구에게 “쇼팽은 어린 소년같은 사람”이라고 평했다고 전해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쇼팽은 여성인 상드를 남성적으로, 그리고 상드는 남자인 쇼팽을 여성적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의 성격이 너무나 달라 그 누구도 연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쇼팽은 다소 신경질적이고 까탈스럽기는 하지만 소극적이고 섬세하며 우유부단하고 귀족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그래서 쇼팽은 동시대 인물인 리스트와 파가니니가 큰 홀에서 많은 관객을 불러 들이며 연주하는 데도 연주회 공포증을 가졌다는 평가가 있을 만큼 작은 살롱에서만 연주했답니다), 상드는 적극적이고 개방적이며 솔직하고 결단력이 강한 사람으로 검소하고 대중적인 생활을 즐겨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무려 9년 동안 로맨스를 이어 갔다니 성격차이가 사랑의 절대적인 장애물은 아닌가 봅니다(더욱이 쇼팽은 상드를 만난지 얼마되지않아 폐결핵으로 성기능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도 상드는 조금도 소홀함없이 쇼팽을 돌보았답니다) 상대방에게 먼저 프로포즈한 사람은 역시 성격대로 남자인 쇼팽이 아니라 여자인 상드였습니다. 첫 만남이후 서로에게 별 관심이 없던 두 사람은 1년 반이 훌쩍 지난 1838년 초여름, 한 귀족 부인의 집에서 열린 밤 음악회에서 재회했습니다. 그날 쇼팽은 마지막 연주자로 나서 밤늦도록 피아노에 앉아 즉흥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꽃향기 가득한 초여름, 파리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밤에 울리는 쇼팽의 피아노 연주, 생각만 해도 그 밤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밤이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상드 역시 그 모습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쇼팽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는 단 한줄이었습니다. ‘당신을 열렬히 사랑합니다. 조르주’ (상드는 일평생 주변사람들에게 17,0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가 가장 짧게 쓴 편지랍니다) 이 편지를 받은 후 쇼팽은 상드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쇼팽은 이편지를 평생 가지고 다녔습니다. 쇼팽이 죽은 후 상드는 쇼팽과 주고받았던 모든 편지를 태워버렸는데 이 편지는 다행히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상드가 비록 남자처럼 하고 다니지만 겉모습과 달리 모성애가 강하고, 소문처럼 난잡하고 바람기가 많은 여성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 자주 상처받는 스타일인 자신에게는 상드처럼 따스하게 위로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둘은 열렬히 서로에게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상드와 연인관계에 있던 남자(아들의 가정교사)가 무서운 협박을 하는 등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파리를 떠나 마요르카섬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우연히도 쇼팽은 상드를 만나면서 건강이 더욱 나빠졌습니다. 이 때문에 상드가 마치 쇼팽의 요절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쇼팽은 종합병원이라고 할 만큼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쇼팽의 직접적인 사인은 폐결핵으로 알려져 있지만 폐결핵 외에도 늘 크고 작은 병에 시달리고 있었고 소심하고 나약한 성격 탓에 병을 이겨내려는 강한 의지도 부족했다고 합니다. 이런 쇼팽을 상드는 끔찍하게 보살폈습니다. 쇼팽은 병에 시달리며 음울한 슬픔과 절망 속에 빠져 있었지만 상드와 함께 지내던 마지막 9년 동안 전주곡 24곡 등 빛나는 작품들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상드의 어머니 같은 사랑과 헌신적인 간호가 없었다면 쇼팽은 더 일찍 죽었을 것이며 그의 빛나는 작품도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비록 쇼팽이 죽기직전 두 사람은 오해가 쌓여 헤어지고 말았지만, 상드의 헌신적인 사랑이 쇼팽을 있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늘 떠나온 조국을 그리워한 쇼팽은 상드에게서 따스한 어머니의 사랑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드는 일생동안 1,000명이 넘는 유럽의 유명 인사들과 교류했습니다. 그 덕에 쇼팽도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습니다. 어느 날 상드의 집에서 작은 연주회가 있었는데 그날 리스트가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리스트가 악보에도 없는 장식음을 수시로 만들어 연주하자 쇼팽은 리스트에게 쇼팽곡은 쇼팽만이 편곡할 권리가 있으니 악보대로 연주하던지 아니면 다른 것을 연주하라고 요구했답니다. 그 말에 삐친 리스트가 “그럼 어디 당신이 한번 연주해 보시오”라고 자리를 비켰지요. 어디 내가 편곡한 게 좋은 지 네 음악이 좋은 지 보자 이런 마음이었겠지요. 쇼팽이 연주를 막 시작하려 할 때 공교롭게도 주변을 비추던 램프불이 꺼졌고 달빛만이 비추는 어두컴컴한 상황이 되었답니다. 하지만 쇼팽은 다시 불을 밝히지 않은 채 자신의 야상곡을 1시간 가까이 연주했습니다. 연주를 다 마치자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리스트가 뛰어나오면서 쇼팽을 격하게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는 “친구여, 당신 말이 옳았어, 당신의 작품은 성스러워서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일이야. 당신은 피아노의 진정한 시인이고 나는 엉터리야.”라고 했답니다. 또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들라크루아도 어느 궁전 도서관 천정화를 그리면서 단테의 얼굴을 쇼팽의 얼굴로 그려 넣을 만큼 두 사람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들라크루아는 두 사람의 초상을 많이 그렸는데 어느날 피아노에 앉아있는 쇼팽과 그 음악에 매혹되어 있는 상드의 그림을 한 화폭에 담아 그렸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둘 사이를 가위로 잘라 두 개의 그림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합니다. 쇼팽이 나온 화면은 루브르박물관에, 상드가 나온 화면은 코펜하겐 미술관으로 나뉘어져 전시되어 있다니 참 고약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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