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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5 | 연재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민족 정체성과 함께 성장한 중앙아시아 영화
전주국제영화제 8 포스트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의 영화 ①
임안자(2013-05-02 16:02:51)

2008년 전주영화제에서 진행된 다섯 번째 나의 특별전은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제작된 90년대 전후의 작품들이었다. 국명이 모두 ‘스탄’으로 끝나는 이들 다섯 나라는 전설적인 실크로드의 주요 연결선이었던 중앙아시아의 내부지역에 속한다. 이 지역은 7세기에 정착한 이슬람 종교의 전통과 수십 세기에 걸친 유목민의 문화공간을 공유한 다민족의 공동체로서 19세기 중반 제정 러시아의 점령지가 됐다가 1919년 러시아의 혁명 이후부터는 소비에트의 15개 연방국으로 묶여있었다.

그러나 80년대 말에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다음 1991년에 모두 독립국으로 자리잡았는데, 현재의 국경선과 국명은 스탈린의 민족분리 정책에 따라 1924~1935년 사이에 중앙아시아의 지역이 다섯 나라로 갈라지면서부터 쓰여지고 있다. 중앙아시아 영화 특별전은 옛 소비에트와 터키 지역을 거친 뒤에 실크로드로 이어진 영화탐색의 연속이었다. 시작부터 말하면, 나는 2003년 스위스 프리부룩 국제영화제의 <중앙아시아 영화 회고전>을 통해 소비에트 시절의 중앙아시아 영화를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전에도 국제영화제서나 시네클럽에서 몇몇 편을 본 적은 있었지만 프리부룩 영화제서처럼 고전을 체계적으로 볼 수 있었던 건 그게 처음이었다. 그때는 희귀작품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었지만 나중에 전주영화제서 소비에트 특별전을 만들면서 새롭게 중앙아시아 영화에 호기심이 갔다. 그리고 2006년 7월에 칼로비 바리 영화제에 카자흐스탄 출신의 영화평론가 굴나라 아비케에바 여사를 만났다. <유라시아 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며 책자 <세상의 심장: 중앙아시아의 영화>의 저자인 그는 2002년 뉴욕영화제와 2003년 비엔나 영화제에서 중앙아시아 특별전을 주도한 바 있다. 전문가인그를 만날 수 있음으로 중앙아시아 영화에 대한 나의 막연한 호기심은 좀더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됐다. 아비케에바는 전주영화제서 진행된 내 특별전들에 대해 처음에는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소비에트의 금지된 영화’의 이야기가 나오자 아주 놀라워하면서“그렇다면 중앙아시아 영화 특별전도 꼭 만들라”며 나를 부추겼다. 그리고 그는 내가 중앙아시아에 가본 적이 없다고 말하자 “준비를 충분히 하려면 감독들을 직접 만나고 현지의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하다”며 너그럽게 나를 유라시아 영화제에 초청했다. 그 후 나는 10월 초에 이스탄불을 거쳐 알마티로 날아갔다.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에서 열리는 유라시아 국제영화제는 명실공히 중앙아시아 5개국의 영화산업 중심지이자 국제적 접촉의 주무대였다. 그러나 세 번째로 치러진 행사였던 지라 프로그램의 수준과 조직의 운영 면에서 허술한 데가 많았으나 중앙아시아 지역 영화를 국제적으로 알리려는 주체자들의 의지와 결심만은 피부로 느낄 만큼굳세 보였다. 거기다 카자흐스탄은 풍부한 지하자원에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나라로 꼽히고 있던 터라 영화산업의 전망은 아주밝아 보였고 해외 제작자들과의 합작도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유라시아 영화제에는 카자흐스탄은 물론 다른 4개국의 주요 감독들이 거의 다 참석하였고 이들의 최신 작품들도 더러 소개됐었다. 한데, 적지 않는 영화들이 자막 없이 상영되어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감독들 대부분이 러시아어를 쓰는 바람에 통역자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소통에 한계가 있었다. 영화제 동안 내가 본 중앙아시아 영화의 대부분은 그 전의 작품들에 비해서 상당히 세련돼 보였다.그러나 독립의 해방감에 취해 만들어진 초기 작품에서 우러나는 감독들의 순수성이나 진지함은 훨씬 덜했다. 그 차이점은 내가 프로그램의 방향을 초기영화 쪽으로 잡는데 결정적인 요인이됐다. 아비케에바 역시 내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5개국의 초기영화 13편을 나에게 추천하고 또 각 나라의 영화센터 연락처를 알려주는 등 사전작업을 열심히 도와줬다. 여기에 한마디 덧붙이면, 영화제의 개막식 파티에서 나는 뜻밖에 김태용 감독을 만났는데, 그전에 그의 영화 <가족의 탄생>을 인상깊게 보았던 터라서 무척 반가웠다. 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초청됐던 그는 알마티에서 살고 있는 교포 부부와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알다시피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30년대 스탈린의 강제이민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쫓겨난 한국계의 후손들이 많아 살고 있는데 21세기에 들면서 한국의 이민 가족도 더러 있었다.

중앙아시아 영화의 탄생
소비에트연방 시절에 중앙아시아 영화는 세상 밖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뛰어난 작품이 많았건만 이들은 모두 소비에트 영화의 일부로만 다뤄졌다. 에이젠스타인, 베토프, 칼라토초프, 추크라이, 타르코프스키 등 국제적으로 크게 인정을 받은 감독들은 모두 러시아 출신이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터지면서 소비에트의 3대 스튜디오였던 레닌그라드, 모스코바, 키에브의 제작소는 알마-아타(현재 알마티)로 자리를 옮긴 뒤 카자흐스탄필름과 합병하여 ‘연합중앙영화스튜디오’를 설립했다. 이때부터 한동안 알마-아타는 소비에트 영화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이젠스타인의 서사극 <이반 폭군>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는 건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한데, 역설적이게도 알마-아타의 연합중앙영화스튜디오는 중앙아시아의 1세대 영화인들이 소비에트 대가들로부터 영화제작 기술을 직접 습득할 수 있었던 최초의 작업현장이었다. 50년대에서 70년대는 뛰어난 감독들이 대거 등장했던 시기로 이들은 중앙아시아의 영화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문화적 풍토를 만드는데 선구자 역할을 했다. 소비에트 정권의 압제정치에도 불구하고 나라마다 민족의 특이성과 정체성을 강화하는 새로운 미학의 작품들이 시도되었으며, 이들 작품들이 예술과 상업의 양면에서 크게 성공하면서 ‘민족영화 탄생’의 기반을 다졌다. 80년대 말이 이르러서 중앙아시아 영화계는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을 타고 독립과 함께 개방시대를 맞았다. 독립세대 감독들의 공동과제는 소비에트의 사회적 사실주의 도그마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새로운 역사관과 미학을 바탕으로 한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되찾는 영화를 만드는 일이었다. 한데, 전 세대의 감독들이 그랬듯이 젊은 감독들 대부분이 모스코바의 국립영화학교(VGIK)의 출신들이었고 80년대 말 중앙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진 소비에트 비판 영화들이 모스코바 영화학교의 강의실과 워크숍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역사의 바퀴를 되돌릴 수는 없는터, 중앙아시아의 영화는 1991년의 독립을 모태로 새로이 태어났다. 특히 ‘중앙아시아영화의 혁명기’로 불리는 90년대 초반부는 젊은 세대 감독들의 첫 작품들이 만들어졌던 시기로, 특징이라면, 전통의 미학과 철학을 바탕으로 한 영화들이 감독들의 개별적 제작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초기를 빛낸 작가영화의 창조적 경향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각 나라의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일부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는가하면 일부는 독재자의 횡포에 사그라지고 또는 전유물로 떨어졌다.

중앙아시아의 독립 초기의 작품들
원래 아비케에바로부터 추천 받은 영화는 13편이었다. 그러나 프린트 문제에 걸려 10편만 프로그램에 넣었고 그에 단편 두 개를 덧붙였다. 이제부터 선정된 영화 10편의 영화사적 특수성에 대해 말하려 한다. 카자흐스탄은 인구 절반이 러시아와 슬라브족이어서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적 통제가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보다 휠씬 심했던 곳이다. 그럼에도 60-70년대부터 민족의 정체성과 전통에 초점을 둔 영화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보다 힘찬 저항은 80년대 말 알마티에서 일어난 ‘카자흐스탄 뉴웨이브’로 시작됐으며, 새로운 흐름의 첫 신호탄은 라쉬드 누그바노프 감독의 1989년작 <바늘>이었다. 아비케이바는 ‘영화를 통해 본 중앙아시아의 정체성’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바늘>은 포스트 소비에트의 새로운 시대를 연 최초의 작품으로 소비에트 시대의 종말을 예고했다고 말할 수 있다. 주인공 모로를 연기한 빅토르 최는 소비에트 젊은이들의 우상이었고 그의 노래는 행동을 촉구하고 있었다. “변화하라!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그럼 모로는 누구인가? 그는 서구적 수퍼맨이고 문화적 영웅이자 사기꾼이며 질서와 정의를 위해 지구로 온 사람이다. 그는 서구영화에 나타나는 반항아들, 즉 마론 브랜드, 제임스 딘, 부르스 리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그가 해결할 두 가지 문제는 그의 여자친구를 약물중독에 빠지게 만든 마약밀매, 부패, 타락의 악당을 물리치는 것과 여자친구를 죽음으로부터 살려내는 일이었다.” 그런 한편, 알마티 대학의 영화학 교수 바우이르잔 노제르백은 ‘카자흐스탄 뉴웨이브 영화에서의 민족적 공간’이라는글에서 “<바늘>에서 카자흐스탄의 장면들은 실제 풍경이라기보다 공상과학에서나 봄직한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단조로운 파란색 하늘, 말라버린 바다, 끝없는 사막 그리고 가운데에 놓여진 녹슬고 버려진 배, 하얀 소금으로 뒤덮인 수평선, 이곳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장소가 아니며 혈기 왕성한 민족의 삶을 위한 장소도 아니다. 하나 분명한 것은,카자흐스탄의 민족적 공간에 대한 이례적인 소비에트의 정치선전용의 색갈이 이 영화에서는 완전히 거부됐다는 점이다….” 라고 썼다. <바늘>은 평단으로부터 “다채로운 장르를 바탕으로 라디오, 텔레비전 등 여러 미디어의 사운드들이 겹겹이 얼버무려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화”라 극찬을받으면서 소비에트 전 지역을 통해 2천5백만의 관객을 모집하고 ‘소베에트의 최고영화’로 뽑히는 등 전에 볼 수 없었던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성공의 뒤에는 고바초프 시대를 풍미한 록스타 빅토르 최가 있었다. 한국계 부모에서 태어난 빅토르 최는 정부로부터 금지된 ‘사나미즈다트 록’의 창시자로 소비에트 젊은이들의 영웅이었다. 최는 낮에는 난방장치 기술자로 일하고 밤에는 지하에서 그의 밴드 ‘키노’와 노래를 부르고 때로는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바늘>의 음악은 그가 작사하고 작곡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1990년 인기절정의 시기에 자동차 사고로 숨졌다. 그리고 그와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던 누그마노프 감독은 90년대 중반 프랑스로 삶터를 옮겼다.

독립 이후 카자흐스탄 신세대 영화의 대부로 떠오른 다레잔 오미르바에프는 알마티 뉴웨이브의 대표적 인물의 하나이다. 프랑스 뉴벨바그의 영향을 받은 그의 첫 작품 <카이라트, 1991>는 카자흐스탄의 새로운 수퍼맨으로 떠오른 <바늘>의 주인공 모로와 정반대의 인물이다. 영화는 시골에서 자란 카이라트가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알마티로 가는 도중에 우연히 날라온 돌에 의해 기차의 창문이 깨지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카자흐스탄의 예측 불가능한 사회생활의 불안정성을 암시하며, 첫 작품에 짙게 깔려있는 불안, 공포, 불확실성 등의 심리적 요소는 나중에 오미르바에프 영화에서 계속 떠오르는 주요 모티브이기도 하다. <카이라트>의 핵심주제는 80년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의 빠르게 변하는 카자흐스탄 사회의 시공간에 대한 소외감과 미심쩍음이며, 서구화된 도시와 시골생활 사이의 분열과 불공평에 아무런 방패막이 없이 노출된 젊은이의 악몽같은 삶에 대한 이야기다. 다레잔 오미르바에프는 한국영화계에도 잘 알려진감독이다. 2006년 그는 전주영화제의 3인3색 감독으로 참가하여 <어바웃 러브>를 연출했으며 올 2013년에는 전주영화제 국제경쟁부문의 심사위원장으로 초대되어 전주영화제와 다시 조우한다.나는 2007년 유라시아 영화제를 다시찾아갔다. <바늘>과 <카이라트>의 프린트를 찾기 위하여 갔던 것인데 두 번째 때는 전주영화제의 유운성 프로그래머와 같이 갔다. 아비케에바의 말에 의하면 “독립 이후 영화소재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초기영화의 기록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실제로 감독들조차 자신의 프린트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카자흐필름 국립영화사’의 세르게이 아지모프 사장에게 선정영화에 관련된 정보자료를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오미르바에프 감독과 그의 부인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부인은 오미르바에프 감독의 모든 작품을 관리했기 때문에 프린트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들은 갑갑해 하는 나를 데리고 옛날의 ‘연합중앙영화스튜디오’로 갔다. 한때 전 소비에트를 대표했던 대형 스튜디오는 엉성하게 뼈대만 남아있었고 아카이브 안은 듣던 대로 완전히 뒤죽박죽이었다. 오미르바에프 부인은 나더러 “저 안의 어딘가에 <카이라트>의 프린트가 들어있을텐데, 찾아는 보지만 기대하지 말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로부터 아카이브 한 구석에 처박혀있는 영어자막 프린트를 며칠에 걸려 가까스로 찾아냈다는 희소식을 받았다. <바늘>의 경우는 누그마노프 감독이 마침 유라시아 영화에 참석하는 바람에 그를 직접 만날수 있었고, 그는 프랑스의 집에 보관돼있는 프린트를 보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런데 하루는 유라시아 영화제에 ‘영화인 모임’에 갔다가 나를 찾고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 이고르 고노폴스키 감독과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 인사도 거른 채 우렁찬 목소리로 대뜸 “당신이 중앙아시아 영화 회고전을 한다고 들었는데,내 영화도 그 안에 넣었으면 좋겠다”며 비디오와 사진 자료를 줬다. <알마-아타의 세르게이 에이젠스타인, 1941-1944>의 제목이 붙은 1998년작 다큐멘터리는 에이젠스타인과 그의 조감독들이 1941년 모스코바를 출발해서 알마-아타에 도착하기까지 닷새 동안의 기차여행과 그 후 4년 동안 알마-아타의 스튜디오에서 <이반 폭군>를 만드는 과정을 영상에 담은 것이었는데, 특별전 테마에 맞지 않았지만 작품도 우수했거니와 마침 에이젠스타인의 110주년 탄생과 겹쳐져 프로그램에 넣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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