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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5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재난은 일상에 있다 -
<테이크 쉘터>
김경태 영화평론가(2013-05-02 16:03:04)

제프 니콜스 감독의 <테이크 쉘터>(2011)는 일어나지 않은 재난과 싸우는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주며 관객들을 정체불명의 공포 속으로 전염시킨다.

재난 없는 재난영화
미국 중산층의 팍팍한 현실을 정밀하게 포착한, 제프 니콜스 감독의 <테이크 쉘터>(2011)는 보는 관점에 따라 SF 재난영화일 수도 있고 사이코 스릴러 영화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각 장르적 공식과는 어긋나게도 영화 속에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대한 쓰나미를 피해 필사적으로 내달리는 군중 장면도 없고 사이코패스가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칼에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희생양의 비명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그 어떤 재난영화와 스릴러영화 못지않은 매우 설득력 있는 긴장감을 선사해준다.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커티스’는 아내 ‘사만다‘와 청각장애를 가진 딸 ‘해나’와 풍족하지는 않지만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이들 부부는 회사보험의 적용을 받아 딸아이의 청각 수술비 부담을 줄이고 아내가 손수 바느질한 물건들을 벼룩시장에 팔며 여름 휴가비를 마련한다는 두 가지 목표를 세우며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소소한 꿈은 커티스에게 찾아온, 천둥과 번개, 노란 기름비, 불안정하게 나는 새떼, 이웃의 습격 등으로 점철된 악몽으로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 악몽은 조만간에 토네이도가 몰아칠거라는 망상으로까지 번진다. 커티스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집을 담보로 무리하게 대출을 받으면서까지 집 앞에 방공호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직장동료는 물론이거니와 가족조차도 그런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급기야는 그로 인해 직장을 잃고 만다.

일상을 지배하는 정체불명의 공포
재난영화에서 맞서 싸워야할 대상은 당연하게도 재해로 빚어진 갖가지 위협들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 위기와 극복의 ‘밀당’을 보며 쾌감을 느낀다. 과거에 일어났거나 혹은 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를 그 재난들을 영화적 소재로 소비하면서 우리는 비교적 무사안일한 현재에 위안을 받는다. 그런데 <테이크 쉘터>는 일반적인 재난영화에서 발단에 해당하는 단계에 머물며 언젠가 바로 여기에서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재해에 대한 커티스의 막연한 두려움을 극대화한다. 그 정체불명의 공포에 어느새 전염된 관객은, 재해의 본질적 공포는 블록버스터영화나 TV뉴스에서 펼쳐지는 스펙터클한 장면들이 주는 시청각적 자극이 아니라, 나도 저 재난 현장의 피해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일상을 점령하는 순간이라는 생각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이제 재난이 발생하지 않는 재난영화에서 커티스가 극복해야할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 된다. 그리고 그가 그 ‘가짜 공포’를 털어내고 맞서야만할 ‘진짜 공포’는 딸아이의 청각 수술비를 마련하고 대출금을 마련해야하는 상황에서 직장을 잃었다는 것이다.

미국 사회를 그대로 관통한 망상
그럼 그가 느끼는 공포의 실체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의 토네이도에 대한 공포는 순전히 그의 꿈과 망상에서만 기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변을 둘러보자. TV 뉴스에서는 재난 현장과 생존자의 인터뷰를 떠들썩하게 보도하고 있다. 그의 과거를 들춰보자. 정신질환을 앓던 어머니로부터 10살 무렵 차안에서 버림받았던 트라우마가 있다. 그의 일상을 관찰해보자.직장 상사의 업무 재촉과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중압감이있다. 이 모든 게 복합적으로 커티스의 불안정한 심리에 작용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망상은 뜬 구름이 아니라 미국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관통하고 있다. 즉 그의 공포는 각종 미디어에 너무 많거나 혹은 과장된 테러와 재해의 이미지들과 미국 금융위기 이후 무너진 중산층의 생활고가 중첩된 징후적 결과이다.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커티스의 악몽이 미래를 예언하는 ‘예지몽’일 가능성을 열어두며 스릴러적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단순히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남자와 그를 위해 헌신적인 아내가 고군분투하는 유사 재난영화로 오롯이 수렴되지 않는 이유이다. 커티스는 자신의 증상을 자각할 수 있는 현명한 망상증 환자와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불안한 초능력자 사이에서 흔들린다. 전능한 예지력을 소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정 하에서 관객은 커티스의 시점과 동일시하며 그의 주변을 보다 유심히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설정은 특히 영화의 결말이 주는 충격과 의미를 배가시켜준다.

정답 없는 공포
영화의 마지막. 정신과 의사의 조언에 따라 가족이 함께 해안가 리조트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여유롭게 휴가를 즐기던 중, 그들은 수평선에서 휘몰아치는 토네이도를 목격한다. 자신만의 또 다른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커티스는 말없이 아내를 바라본다. 아내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토네이도를 응시하고 있다. 심지어 예의 그 노란 기름비가 사만다의 손바닥 위로 떨어진다. 마침내 커티스의 꿈이 예지몽으로 판명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악몽의 한 장면일 뿐일까? 감독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장면이 꿈이든 현실이든 간에, 함께 앞으로의 역경을 이겨나갈 아내와 딸이 항상 그의 곁에 있을 거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 역경이 가짜 공포든 진짜 공포든 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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