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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6 | 연재 [백제기행]
풍류를 즐기고, 시대를 논했던 선비들의 이상향
다시 문화유산답사. 호남유림과 정자문화, 담양
황재근 기자(2013-06-05 10:11:51)

4월의 마지막 일요일, 봄이 절정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141번째 백제기행_다시 문화유산답사 일행은 담양으로 향했다. 푸르른 대나무와 영산강을 따라 늘어선 관방제림, 그리고 우뚝 솟은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 담양만큼 나무, 그리고 푸르름과 연관이 깊은 고장도 없다. 그래서 알록달록 꽃이 지고 연녹빛 잎들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계절, 담양은 더욱 각별했다.

대나무, 떡갈비, 정원, 정자, 가사문학. 담양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한 가지 테마만 갖고 돌아봐도 시간이 부족할 터이다. 이 요소들을 최대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교집합을 궁리하다 떠올린 것이 바로 인물이었다. 원림, 정자, 가사문학 모두 사람이 만들고 지은 것이다. 오늘날 담양에 남아있는 유적지들은 그들이 남긴 흔적이다. 당대의 학자, 문장가, 정치인들이 담양에서 어울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어떤 얘기들을 나눴을까. 그 궁금증 하나를 오롯이 품고 답사를 시작했다. 이날 답사를 이끌어준 강사는 담양에서 나고 자라 오랫동안 자신의 고향을 알려온 송명숙 문화해설사였다.

나무와 숲의 땅, 담양
이번 기행의 첫 번째 일정은 죽녹원에서 시작됐다. 31만㎡에 이르는 거대한 대나무 숲 죽녹원은 2003년 조성됐다. 본래 죽공예제품을 만들기 위한 대나무 숲이었으나 죽공예산업이 점점 쇠퇴하면서 방치된 것을 담양군이 사들여 공원으로 조성했다 한다. 지금은 담양군 관광수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으니 참으로 현명한 투자였다. 송명숙 해설사를 통해 대나무의 생태와 종류, 그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까지 들으며 걷다보니 대나무 전문가가 된 느낌이었다. 이어서 찾은 곳은 천연기념물 336호 관방제림. 조선시대 영산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쌓은 둑 위에 숲을 조성한 곳이다. 수령이 200년이 넘는 고목들이 종류도 다양하게 자리잡고 있으니 둑으로서의 기능은 물론 경관 상으로도 훌륭하다. 관방제림의 끝은 담양의 또 다른 명물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과 인접해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어진 담양과 나무, 숲의 인연은 참으로 깊었다.

당대의 학자와 문인들 담양으로 몰려들다
읍내에 위치한 오층석탑과 석당간을 둘러 본 후 향한 곳은 면앙정.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호남유림과 담양의 정자문화에 대한 답사가 시작됐다. 담양과 무등산 원효계곡 인근 주변 정자는 현존하는 것만 무려 38개소에 이른다. 이 일대에 이토록 많은 정자가 자리 잡은 것은 빼어난 자연경관이 제일 큰 이유고, 또 하나의 이유로 당시 호남시단에 유행했던 강호가도, 즉 자연예찬의 풍조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사연, 빼어난 경관을 지닌 정자들도 많지만 면앙정을 꼭 들렀으면 했던 것은 강호가도의 선구자가 바로 면앙정 송순이기 때문이다. 담양에서 태어는 송순은 1519년(중종 14)에 문과에 급제한 후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성공한 관리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 관리로서의 송순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담양인맥의 중심, 호남유림의 뿌리로서의 역할이다. 그의 학식과 인품으로 인해 주위에는 학자와 문인들이 끊이지 않고 모여들었다. 호남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부터,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 이항과 기대승, 고경명과 정철 등 당대의 대학자와 명문장가들이 그를 따르는 이들이었다. 훗날 이들을 호남사림 중 송순계열로 분류하기도 할 정도로 송순이 호남사림에 미친 영향은 크다. 퇴계 이황도 그를 만나려 면앙정을 찾았다하니 당시 그가 지녔던 명성의 높이를 짐작할 만하다. 또 그 스스로도 면앙정가를 통해 가사문학의 대가로 이름을 올렸으니 선비로서, 관리로서, 학자로서 모든 것을 다 이룬 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눈부신 명성을 짐작토록 하는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77세에 정계를 은퇴하고 고향에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던 송순이 87세 되던 해. 그가 관직에 오른 지 60년이 된 것을 기념해 회방연(回榜宴)을 면앙정에서 열었는데, 그를 따르던 명사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낸 것은 물론이고, 정철 등 그의 제자들이 그의 가마를 직접 메고 집까지 모셔다드렸다 한다. 오늘날의 면앙정은 외관상으론 허름해보일지 몰라도 퇴계 이황, 김인후, 기대승, 고경명 등의 시가 편액으로 남아있어 당시의 영광을 더듬어볼 수 있게 한다. 점심 식사 후 오후에 찾은 곳은 한국 전통원림의 정수라 불리는 소쇄원이다. 소쇄원을 조영한 소쇄 양산보는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후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큰 충격을 받아 현세적인 벼슬길의 무상함을 깨닫고 고향에 은둔하게 되었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초야에 묻힌 이후에도 스승과 함께 꿈꿨던 이상향까지 버린 것은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유교적 이상을 뜻하는 글귀와 건물배치, 그리고 전각의 이름까지, 소쇄원이야 말로 그가 원했던 이상향의 축약판이었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움과 건축적, 조경적 가치에 대해서는 더 덧붙일 말이 없을 것이다. 인물을 테마로 삼아 바라볼 때 눈에 띄는 것은 지연, 학연, 혈연으로 끈끈하게 이어진 호남유림의 구조다. 면앙정 송순이 바로 소쇄 양산보의 이종사촌이고, 하서 김인후가 그의 사돈이다. 소쇄원 역시 당대의 명사들이 드나들며 풍류를 즐기고 학문을 논하던 호남유림의 산실 역할을 했다.

신선같은 문인? 냉혹한 정객? 송강 정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한국가사문학관과 식영정이 다음 목적지. 한국가사문학관에는 호남뿐 아니라 전국의 가사문학 작품들과 관련 유물이 전시돼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높은 인물은 누가 뭐래도 송강 정철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둘로 엇갈린다. 주옥같은 시조와 가사를 남긴 문인, 그리고 상대당파를 인정사정없이 몰아쳤던 서인의 영수. 그의 시대에 이르러 사림은 본격적으로 당파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학문과 문장에서는 모두가 그를 인정했으나 정치인 정철은 파란만장한 역정을 겪어야했다. 그 절정은 정여립의 난과 그에 이어진 기축옥사였다. 당파가 분열된 후 호남사림은 서경덕계열은 동인으로, 송순계열은 서인으로 나뉘었다. 정여립의 난 이전까지 조정에서는 동인이 우세했던 상황이었다. 정철은 기축옥사에서 심문을 주관하는 위관을 맡아 호남의 동인을 몰아세웠다. 이 옥사로 호남에서만 1천명에 이르는 선비들과 가족들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가혹한 숙청이었다. 그러나 정철 본인 역시 정쟁으로 유배를 받아 비운의 말년을 보내게 되니, 이 역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송순계열의 서인들마저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전해 대거 목숨을 잃으며 호남사림은 정치·사상의 주도권을 경기·충청의 기호사림와 영남사림들에게 내주고 만다. 호남유림의 정치적·문학적 전성기를 일으켰던 정철이 그 몰락의 단초를 마련했으니, 역사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 목적지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원림 명옥헌이었다. 임진왜란 후 오희도가 자연을 벗 삼고자 조영한 곳이다. 화려했던 담양 선비들의 전성기는 지났지만 자연과 가까이 살고자 했던 그 정신은 후대에도 이어진 듯하다. 명옥헌은 아담한 정자와 그 앞의 연못을 배롱나무가 빽빽이 둘러싸고 있는 소박한 원림이었다. 배롱나무 꽃이 피는 철이 오면 전국의 사진동호인이 찾을 정도로 아름답다 한다. 우리가 찾았을 때 아직 배롱나무는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 조차도 기묘한 풍광을 만들어내어 감탄케 만들었다. 일행 중에는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명옥헌이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 배롱나무 꽃이 필 무렵 다시 한 번 찾으리라 다짐하게 했다. 담양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아름다운 경관을 다 즐기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 땅에서 풍류를 즐기고 시대를 논했던 선인들의 자취를 따라가며 잠시나마 그들이꿈꾸던 이상을 들여다본 것으로도 만족스러웠던 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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