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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6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그 때 그렇게 빛나던 우리의 만남
<비포 선셋>
송경원 영화평론가(2013-06-05 10:14:41)

모든 연인은 아쉽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전하지 못함이 아쉽고, 상대에게 완전한 기쁨을 전하지 못함이 아쉽고, 언젠가는 서로 다른 시간을 걸어가야 함이 아쉽다. 우리는 늘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가 되길 원하지만 결국엔 그것이 실패하고 말 것임을 알고 있다.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겪어야만 하는 아쉬움 중 ‘헤어짐’이 가장 절실한 까닭은 이 불가능성을 직접 증명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연인들은 매일 매순간 헤어져야만 한다. 그들은 못내 인정하기 싫겠지만 만남은 헤어짐의 다른 말이다. 사랑이란 단어의 빈칸은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우는 기다림으로 채워져 있다. 꿈처럼 짧은 데이트를 끝낸 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순간은 함께 했던 시간이 달콤했던 만큼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준다.

아쉬움 가득한 ‘조금만’의 순간들
그렇기에 모든 연인은 헤어짐을 미루려고 한다. 필연적으로 다가올 그 순간을 가능한 한 미뤄보려는 연인들의 발버둥은 때론 귀엽고 때론 안타깝다. 1시간만, 아니 30분만, 아니 1분만. 사랑의 마법 같은 시간은 바로 그 찰나에 머문다. <비포 선셋>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도 바로 이 헤어짐을 미루는 장면들이다. 정확히는 아쉬움 가득한 ‘조금만’의 순간들이야말로 이 영화를 이끌고 가는 원동력이자 우리가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소멸되는 사랑의 그림자를 시인하면서도 못내 아쉬워 상대방의 옷자락을 붙잡는 손길, 살짝만 당겨도 와락 안겨오는 몸짓에서 사랑해본 자라면 알 수 있을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작 <비포 선라이즈>에서 미국남자 제시(에단 호크 분)와 프랑스여자 셀린느(줄리 델피 분)가 펼쳐 놓은 12시간의 설레고 흥분 되었던 만남은 9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포선셋>의 담담하면서도 원숙한 열망으로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2004년 개봉 당시 평단으로부터 가장 성공적인 후속편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았던 <비포 선셋>은 낭만적으로 만나고 사실적으로 이별하는 순간을 수수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하지만 이 총명하고 지적인 영화가 남기는 울림은 실로 깊고 아름답다. 거창한 사건으로 치장하는 대신 조곤조곤하면서도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만남과 헤어짐, 관계와 애정, 사랑과 기억에 대한 수다를 늘어놓는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스물세살 시절, 열차에서 만난 셀린느와 제시의 재회를 그린다. 우연히 열차안에서 만난 두 남녀가 서로에게 이끌리며 계속 헤어짐을 미루다 결국해가 뜰 때 까지 함께 있었던 이야기가 전작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9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두 사람이 해가 질 때까지 함께 하는 시간을 이야기한다.

대화 사이사이로 이어지는 애틋함과 긴장감
무려 9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만난 두 사람이건만 나누는 대사는 소소하기 이를 데 없다. 9년 전 셀린느와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서 성공한 제시는 소설 <비포 선라이즈>의 유럽출판행사를 위해 파리를 방문한다. 몇 시간 뒤면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 때, 그는 9년 만에 다시 셀린느와 재회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제시의 비행기가 떠나기 전까지 여전히 미소가 아름다운 그녀와 함께 쌓였던 이야기를 하나 씩 풀어 놓기 시작한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비포 선셋>의 매력은 두 사람의 재기 넘치면서도 지적인 대화이다. 우연과 기억, 노쇠와 찰나, 변화와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지적인 대화 사이사이로 두 사람의 애틋함과 그리움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미국 인디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한 사람인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시간의 예술’로써의 영화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때론 조급한 걸음으로 산책을 하며 수다를 늘어놓고, 때론 까페에 앉아 인생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느긋함을 보여주는 감독은 절묘한 리듬으로 두 남녀의 사연을 풀어간다. 덕분에 <비포 선셋>은 멜로드라마임에도 왠만한 서스펜스 영화 이상의 긴장감을 자아낸다. 상영시간 80분간이 실제 두 사람의 80분 간의 이야기라는 사실만으로도 연인의 ‘헤어짐’을 실시간으로 목도해야 하는 관객으로써는 손에 땀을 쥐고 두 사람의 이야기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여기서 그 어떤 직접적인 설명 없이도 두 사람의 애절함과 열망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은 바로 센 강의 유람선에 타는 순간이다. 비행기 시간이 다가오자 초조해진 제시와 셀린느. 짧은 망설임의 순간. 그리고 한번 타면 한 동안 내릴 수 없는 배 위로 뛰어드는 두 사람.

흐르는 강물처럼
80분 내내 끊이지 않는 두 사람의 대화를 그대로 찍었다고도 볼 수 있는 이 영화는 사실 ‘길의 영화’라고 불러 마땅하다. 두 사람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정확히는 나눌 수 있게 해주는 공간들이야말로 이 영화가 관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골목, 까페, 산책길, 공원, 벤치, 센강, 유람선, 노틀담 성당, 차 안, 그녀의 집으로 이어지는 파리 구석구석의 풍경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 장소인 동시에 흘러간 시간에 대한 직접적인 이미지이다. 두 사람이 이제 몇 시간 뒤에 다가올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뭔가 핑계를 만들어 계속 이별의 시간을 미루고 싶어 할 때, 영화는 쏟아질 듯 늘어놓는 대사들 한가운데에서 헤어짐이란 운명을 맞이해야 하는 연인들의 눈빛과 몸짓에 집중하도록 한다. 유유히 흐르는 센 강의 강물 위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평온해진 두 사람의 모습은 사실 모든 사랑하는 연인들의 얼굴이다. <비포 선셋>에서 센 강을 흘러가는 유람선 위 두 사람의 모습이 유난히 인상적인 것은 그것이 단지 흘러간다는 것 이상으로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흘러감 속에서도 봉인된 탈출 불가능한 두 사람에게 허락된 시간. 헤어짐은 아쉽고 쓰라릴 테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름답다. 사랑의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낭만적으로 그릴 줄 아는 이 장면은 삶과 사랑에 대한 대화를 쏟아내던 영화 속에서도 가장 영화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장면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삶은 지속되고 다음 만남이 찾아온다. 변하지 않는 것은 단지 흘러간다는 것뿐이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은 사랑도 삶도 아쉬움도 기대도 모두 품에 안고 흐른다. 지금은 잊어버린 당신의 사랑도 아직 여전히 그 날의 그 강 위에서 아름답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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