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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8 | 연재 [클래식 뒷담화]
아마추어들이 만들어낸 최고의 사치, 오페라의 탄생
문윤걸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2013-07-30 17:42:37)

인류의 문명사를 들여다보면 문명의 전환기마다 위대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세상을 변화시킨 것처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러했을까요? 사실은 위대한 한 인물이 등장할 때까지 무수히 많은 평범한 인재들이 세상을 느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변화시켜오지않았을까요? 위대한 인물이 된 사람들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작은 변화들을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여러 곳에서 그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것일테구요. 서양의 음악사에도 아마추어나 애호가들이 변화를 이끌어낸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음악가들을 후원한 패트런(후원자)들도 그런 사람일테구요. 또 음악가를 고용하여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 내도록 한 왕이나 영주, 교황, 추기경들도 그런 사람들이라고 봐도 될 겁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극명하게 서양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바로 1590년대를 전후로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살고 있던 유서 깊은 부유한 은행가 가문인 베르니오 백작 조반니 바르디(Giovanni Bardi, 1534-1612)와 그 집에 모여들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최초의 오페라를 만들어낸 인물로 서양음악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오페라는 이탈리아 말로 어원은 ‘opera in musica(음악으로 된 작품)’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당시 최고의 상업도시였던 피렌체의 부유한 집안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젊은이들답게 새로운 문예사조인 르네상스에 흠씬 빠져 있었습니다. 당시 피렌체의 젊은 부자들이 문화와 예술, 특히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음악이 르네상스 시대의 귀족계급에게는 교양 있는 계급으로서의 지위를 갖는 데 필수적인 덕목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피렌체 같이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유한계급들이 많은 곳에서는 음악이 지루함과 무료함을 달래주는 최고의 오락거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음악을 수동적으로 듣는 청중에 그치지 않고 음악을 직접 연주하고 음악적 행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능동적인 향유층으로 존재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르네상스인들이 이상적으로삼았던 인간형은 모든 것을 다 잘하는 ‘만능인’(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대표적이죠)이었는데 여기에 음악을 연주하고 악보를 볼 줄 아는 능력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왕이나 영주, 그리고 웬만한 귀족 집안의 자녀들은 한 가지 악기 정도는 비교적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바로 이런 태도가 근대사회로 이어져 피아노 레슨이 대유행하게 된 것이고, 우리 나라에도 동네 곳곳에 피아노 학원이 생기게 된 연유입니다). 바르디 역시 전형적인 르네상스 인간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음악애호가로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슷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여기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아버지 빈센초 갈릴레이도 있었습니다. 빈센초 갈릴레이는 수학자인 동시에 음악가로서 오페라의 선조가 되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을 자기 집으로 모이게 해서 그들이 전문가와 함께 토론과 연구를 지속해 가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습니다. 이런 집단을 카메라타(Camerata)라고 불렀습니다(바르디는 1592년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르디의 카메라타는 코르시(Corsi. J 1567-1604)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그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전통적인 음악에서 따분함을 느끼고 새로운 음악을 찾아가던 바르디의 카메라타는 우연한 기회에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그만 여기에 흠뻑 빠지고 말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은 단순한 연극이 아니라 일종의 음악극 같은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대사를 선율에 담아 노래로 전달했으니까요. 마침내 그들은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재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에 영상자료가 있을 리 없으니 어떻게 재현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문음악가를 영입하여 연구를 거듭해 갔고 마침내 1597년 최초의 오페라로 인정되는 첫 작품을 코르시의 저택에서 올렸습니다(이 저택은 현재는 ‘바르디니 박물관’ 또는 ‘코르시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첫 작품은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다프네>(미모에 반해 쫓아 온 아폴로를 피해 나무가 되어버린 여인의 이야기)라는 작품으로 피렌체에서 최고의 작곡가로 꼽히던 ‘야코포 페리(Jacopo Peri,1561-1633)’가 작곡한 것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작품의 온전한 악보는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이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답니다. 왜냐하면 각본과 아리아 한 두곡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작품은 음악적으로는 졸작이었습니다. 4개의 악기만을 사용하고 있고, 주로 독창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카메라타그룹은 훌륭한 음악작품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음악적인 현란함보다는 노래가 있는 연극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음악적 형식보다는 연극적 서사구조와 그 표현에 더 큰 관심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음악적으로는 단순했지만 이 작품은 대성공을 거둡니다. 피렌체의 청년부자들은 교양있는 계급이 되기 위해 배운 따분한 음악 대신 드라마가 살아있는 새로운 형태의 음악적인 오락거리에 완전히 매료된 것입니다. 피렌체의 아마추어들은 르네상스인답게 고대 그리스의 전통을 완전히 부활시킨다는 열망을 가지고 이 일에 동참했고 이것이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일이라는 사명감까지 갖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3년 뒤인 1600년에 역시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가져온 <에우리디체(Euridice)>라는 작품을 만들어 올립니다. 이 작품은 온전한 악보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 역시 페리가 작곡하였습니다(사실 이 작품은 두 사람이 대본을 놓고 다투다가 동시에 작업을 시작했습니다(하지만 페리가 간발의 차이로 먼저 작곡을 마쳤는데 뒤늦게 작곡을 마친 이가 바로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로 유명한 ‘줄리오 카치니’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오페라의 첫 작곡자라는 영광은 페리가 차지했습니다). 이 작품은 피티 궁전의 백색살롱에서 열린 프랑스의 앙리 4세와 피렌체의 마리아 데 메디치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축하음악으로 상연되었습니다. 당시의 오페라는 오늘날의 오페라처럼 연주자와 관람객이 엄격히 구분된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마치 판소리처럼 작품을 보며 중간 중간 참견도 하고, 때로는 같이 노래도 부르고, 때로는 악기를 들고 와 같이 연주도 하는 일종의 대형 음악놀이판 같은 것이었습니다. 피렌체에서 시작된 두 편의 오페라는 당시 상류층을 흠뻑 매료시켰습니다. 최고의 오락거리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페라 한편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는 의상, 조명 등은 물론 전문악사와 가수 등 많은 사람을 동원해야 했기에 꽤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부자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피렌체의 재미나면서도 희한한 이 놀이 거리를 인근의 부자도시에서도 금방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피렌체에 필적할 만큼 부를 쌓아가던 베네치아와 결혼식 피로연에서 직접 이 놀이거리를 체험한 프랑스의 왕이 살던 파리였습니다. 피렌체는 물론이고 베네치아와 파리의 부자들 또한 가만 앉아서 오페라를 관람하지는 않았습니다. 한술 더 떠 극의 진행에 직접참여하기 위해서 좋은 선생을 구해 악기와 노래를 열심히 배우기까지 했습니다. 오페라가 대도시에서 큰 인기를 모으자 유명 작곡가들이 너도나도 오페라 작곡에 뛰어들었고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하자 오페라는 음악적 형식차원에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추어들의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했던 오페라가 서양음악사의 중요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문화와 예술은 전문가들에 의해서 성숙하고 발전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명문가 못지않은 역할을 수많은 아마추어와 애호가들이 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문화와 예술이 풍부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아마추어와 애호가들이 그만큼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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